ⓒ 비단길
개인적으로 <음란서생>의 첫 번째 관람 목적이 '음란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었다면, 두 번째 목적은 '과연 어떻게 음란함을 이야기 할까' 하는 것이었다. 색 고운 한복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는 예고편은 <스캔들>에 뒤이은 '음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말도 안되는 자세요, 분명 누가 따라할텐데 어쩔거요?", "아니, 어쩐다니, 책 맨 앞에 써 놓을 거요.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 라고" 하는 대사 등 통통 튀는 상상력은 '코믹 사극' <음란서생>에 대한 기대감을 더했다. 그러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음란서생>은 하다 만 얘기 같다. '음란함'에 대해 뭔가 얘기하는 듯하다가 이야기가 흐트러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정작 '음란함'에 대한 '진맛'은 맛볼 수 없게 됐고, 이마에 '음란' 딱지가 붙은 한석규의 기발한 상상력이 묻어나는 대사로 허둥대다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은 듯한 느낌이다. 음란함의 근원을 탐구하다 시작은 좋았다. 명망 있는 사대부이면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윤서(한석규)가 유기전의 난잡한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음란함을 이야기 하는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꿈인듯, 꿈에서 본 듯, 꿈에서라도 하고 싶은' 것들이기에 난잡한 소설에 끌리며, 그런 것을 '진맛'이라고 이름한다는 장사치의 말에서, 관객을 꿈틀케 하는 뭔가가 엿보였다. 진맛이라니, 어라? 이 영화가 음란함에 대해 제대로 썰을 풀려나 보다 싶었던 것이다. '진맛'은 공연히 툭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윤서라는 주인공도 생뚱맞은 게 아니다. 실제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학이었던 사설시조만 봐도 성행위에 대한 거침없는 묘사와 끈적끈적한 음담패설이 가감없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극적인 시조의 작가 반열에 사대부가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선후기 시인 이정섭(그도 사대부 출신이었다)은 성과 사랑에 대한 욕구를 "자연의 진기(眞機)"라고 표현했다. 엄격한 도덕률에 따르는 성인군자의 법도가 아닌,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본능이기 때문에 진솔하다는 의미의 '진기'는 <음란서생>에서 줄곧 붙잡고 있는 '진맛'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맛의 개념적 정의와 윤서라는 주인공의 사회적인 정체성은 '음란함'에 대한 화두를 풀어내기에 매우 적합했다. 윤서가 난잡한 소설을 직접 쓰면서 줄곧 진맛에 집착하는 장면은 음란함 또는 음란물에 대한 인간의 공통적인 욕망을 보여줬다. 유기전에서 난잡한 소설 속의 적나라한 문장을 접한 윤서. 그는 당파싸움에서 수모를 겪은 집안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억지로 상소를 쓰려고 글상머리에 앉아서는 '상소' 글귀 옆머리에 자신도 모르게 '음부' '음경' 따위의 문장을 쓰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다가도 '축축한 음부에 음경이 밀고 들어갔다'는 식의 문장을 쓴 뒤 종이를 찢어 불태운다. 음란함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수퍼에고'로도 완전히 억압할 수 없는 본능. 본능이기 때문에 욕망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진기'인가 말이다. 우리는 상소를 가지고 끙끙대고 있는 윤서의 모습에서 '너나 나나 똑같다'는 동질감을 가질 수 있다. 에로티시즘의 정수를 꿈꾸는 '진맛' 그렇다면 '진맛'을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윤서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쪽 방면'에서는 최고의 작가를 꿈꾸게 된 윤서는 점차 음란함의 진맛에 골몰한다. <음란서생>에서의 진맛은 에로티시즘과 매한가지다. '꿈같은' 몽환적인 상태로 이르게 하는 그것은 인간 성본능의 최극점에 위치한 무엇이다. 음란함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윤서의 소설은 남성 독자들의 "그것이 서게" 만들고, 여성 독자들의 "원하는 것을 콕콕 찍어주는" 신통한 것이면서, 점차 많은 독자를 끌어모으는 '맛'을 발휘한다. 특히 가문의 정적인 광헌(이범수)이 소설 속 삽화를 그려줘 대성공을 거두는 것에서 우리는 윤서의 소설 속에 '관음의 욕구'라는 또다른 성욕이 덧붙여짐을 알 수 있다(실제로 광헌은 '그리기 어려운 체위'를 잘 그리기 위해 윤서와 정빈의 섹스를 벽틈으로 '훔쳐 본다'). 음란한 것은 인간성과 결부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장 음란한 것은 인간 욕구의 정점에 닿아 있는 것이기에 가장 강렬히 욕망하는 '진맛'에 가깝다. 그것은 육체와 육체가 파도를 넘듯이 밀고 당기면서, 단순히 두 알몸을 비비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저 건너편에 있는 자유와 해방의 세계에까지 솟아오르게 하는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차원이다. 진맛이 이렇게 허무하단 말야? 안타까운 것은 윤서와 광헌의 음란함에 대한 탐구는 거기서 멈췄다는 점이다. 관객은 '진맛'의 실체에 다가가기는커녕, 음란함에서 말하는 진맛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윤서와 정빈의 '비현실적인' 사랑 문제에 끌려갔다. 영화는 '비현실적인 현실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음란함의 경계를 말하고자 하는듯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주제를 흐트려뜨렸다. 대관절 윤서와 정빈의 사랑이, 윤서가 정빈을 정말 사랑했느냐 아니면 소설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빈을 이용했느냐 따위가 영화의 흐름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극적인 긴장감을 원했다면 난잡한 소설을 쓴 실제 작가가 윤서임이 만천하에 공개돼 윤서의 사회적 위상(진맛과는 최극단에 있는)에 심각한 위협이 닥쳤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그도 아니면 정빈과의 사랑을 어떡해서든 끌고 가려 했다면, 정빈과 윤서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왕이 칼을 들었다가 자리를 피해주는 낭만적이면서도 황당한 상황은 좀 정리했으면 싶다. 진맛을 한참 얘기하려던 순간, 이야기가 고리타분한 사랑 쪽으로 붕 뜬 듯한 느낌. 한참 재미있게 읽던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찢겨져 나간 것처럼 관객에게는 맥이 주욱 풀리는 대목이다. 그래서요, 음란서생님! 도대체 음란함의 '진맛'이란 뭡니까? 거 왜 얘기하다 슬쩍 이야기를 돌리는 게요? 내가 본 게 혹시 원필름이 아니라 '상영가능' 처분 받은 편집본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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