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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미세한 물방울들은 끊임없이 사락거리며 주변 풍경에 내려 앉아 안개 감옥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갇혀서 온 몸 구석구석을 습기로 채우다가,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고 말았다. 브장송(Besançon)에 도착을 하니, 두터운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시리게 푸른 겨울 하늘이 들어차 있었다.

▲ 브장송이 품고 있는 '두' 강
ⓒ 최미숙
▲ 생-에티엔느 산에 있는 브장송 성곽
ⓒ 최미숙

프랑스 동쪽 국경에서 멀지 않은 브장송에는 아주 오래된 외적 방어용 성이 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생-에티엔느 산에 있는 성은 루이 14세가 부리던 엄청나게 바쁜 건축가, 보방(Vauban)이 설계했다.

17세기에 보방은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160여개에 달하는 성곽을 건설하거나 보수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하니, 말 타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렸을 그를 상상할 수 있다. 산 아래 쪽으로는 '두'(Doubs)라는 이름을 가진 강이 조용하게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존경하는 프루동을 화폭에 담은 쿠르베

산을 끼고서도 모자라 강까지 품고 있는 브장송에서 피에르-조셉 프루동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쿠르베 때문이었다. '오르낭의 장례식'의 화가 쿠르베는 평생 유일하게 존경한 사람이라고 떠들어댄 프루동을 자기 화폭에 담았다.

▲ 프루동의 초상화 (쿠르베 작, 1865년, 오르세 미술관)
ⓒ 최미숙
그림 속의 프루동은 차갑고 지적이며 무표정하지만, 눈가에는 얼핏 고단한 삶의 피로가 그늘져 보인다. 프루동은 1809년, 술도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책을 사줄 집안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를 돌보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열아홉이 되던 해, 인쇄소의 직공이 되어 자신이 교정하던 기독교 서적을 읽으며 그리스어 라틴어를 익히고 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1838년, 프루동은 브쟝송 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를 시작하고, 1840년, 그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소유권이란 무엇인가?>를 출판한다. "소유권, 그것은 도둑질이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이 책은 소유권을 부정함으로써 권력을 부정할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정부는 무정부적 형태를 취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폴레옹이 쫓겨난 뒤, 왕정파가 공화주의자들의 재등장을 막으려고 사상 검열을 엄격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프루동은 소유권을 공격하고, 정부를 모독하고, 종교와 풍습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브쟝송 법정에 기소된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판사에게 (내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업주의적 교환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즉 유익한 가치와 교환의 가치는 서로 공통점이 없고 영원히 대립하는 상황에서, 소유권은 완전히 비논리적이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그 같은 이유로 노동자들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며, 소유자들은 점점 덜 소유하게 된다. 판사는 내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설명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자기 판단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편에 서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2월 혁명의 역사에 보탬이 되려는 한 혁명가의 고백, 1849)

개인소유를 인정하고 절대권력을 부정하다

@BRI@프루동은 개인적인 소유가 아니라, 교환 가치 체계 속에서 운용되는 소유권을 거부했다. 그는 토지에 부과된 상업주의적 교환 가치를 걷어내면, 토지 고유의 가치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땅은 사고파는 교환 가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는 그 자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고 절대 권력을 부정하는 프루동의 생각은, 공동 소유와 프롤레타리아의 절대 권력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부딪혔다. 특히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위상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 받는다. 그러나 그가 도시 산업 노동자의 자식이 아니라 대지에 무한한 경외감을 느끼는 농촌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프롤레타리아 세력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 못한 사실도 이해는 간다.

1848년, 정치에 입문을 한 프루동은 상호 부조 은행을 추진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은행은 정부 기관이었는데, 프루동은 정부로부터 독립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는 은행을 꿈꾸었다. 모든 가입자들은 싼 이자로 대출받을 수 있는데, 이자는 은행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는 차원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야심찬 계획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프루동은 수감자가 되어 혹은 망명자가 되어 남은 삶을 보낸다.

그냥 방치된 프루동의 생가

▲ 프루동의 생가, 쁘띠-바땅 거리 23번지
ⓒ 최미숙
"프루동의 생가는 방문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살고 있거든요."

프루동이 태어난 곳의 주소를 알고 싶다는 내 말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시립 관광 안내소 직원은 힐끗 쳐다보며 대답한다. 내게 프루동이 누구냐고 되묻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분위기이다.

"어머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프루동의 생가가 보존이 안 돼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멀리서 그걸 보러 왔는데요."

호들갑스런 내 말투에 자극이 됐는지, 심드렁하던 직원은 갑자기 책을 꺼내 들며 부산스럽게 생가의 주소를 확인하고 지도를 보여준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듯 한마디 덧붙인다.

"건물에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란 표지가 있어요."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스쳤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장모와 아내를 데리고 3년을 살았다는 파리 14구에 있는 방 한 칸도 보존돼 있는 마당에,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했던 피에르-조셉 프루동의 생가는 그냥 방치돼 있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프루동의 생가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초라했다. 건물은 시커먼 세월의 때와 참담한 무관심의 더께로 누더기가 돼 있었고, 돌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 문에는 낙서까지 한 가득이었다.

세계화와 자유주의의 깃발을 들고 자본의 대리인 노릇을 하면서, 반이민자 정책이 실업률을 낮추고 사회 안전을 확대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니콜라 사코지가 대통령이 될 꿈에 부풀어 있는 세상에서, 프루동의 낡고 초라한 버려진 생가를 만나게 된 것은 잔인하지만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프루동이 남긴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은 21세기 자본의 야욕이 넘실거리는 프랑스에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고, 비참한 가난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들의 조건을 효과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등이 없다면, 비참한 가난과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나 존재하게 될 것이다." (<민중신문>, 1848년 11월 8-15일)

▲ 외진 곳에 프루동의 동상이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 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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