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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쪽 맨 왼쪽부터 가은, 사라, 한울, 가람, 해님.
ⓒ 함박은영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의 '공연 안내소'에는 색색의 연극 팸플릿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볼만한 공연 없을까 싶어 우연히 들른 길, 무언극 <거울인형>의 전단지가 눈에 띈다.

'무언극'만 하는 극장이 대학로에 있다고? 호기심에 이끌려 안내 데스크에 극장 위치를 문의했더니, 이 연극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며 고개를 흔든다. 대신 요즘 인기라는 코믹 연극 포스터를 들이민다.

'도대체 어떤 연극이길래 극장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거야?'

극단 '한얼'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문제의 극장을 찾은 것은 지난 4월 말 어느 날 저녁. 홈페이지를 뒤져 찾아간 극장은 혜화동 파출소 뒷골목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얼연극영화예술원'이라 크게 새겨진 녹색 간판이 반갑다. 가까이 다가가자 극장 앞 테이블에 앉았던 서너명이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며 일어난다. 알고 보니 이 사람들, 배우란다. 예약한 관객이 오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 날 관객은 공연 시작 직전에 도착한 나와 내 친구, 딱 둘이었다.

'한국적인 마임'으로 동양인 최초 졸업생 되다

▲ 이건동씨
ⓒ 함박은영
공연 후 연출가 이건동(50)씨 및 배우들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한얼'은 연출과 배우를 비롯해 모든 단원이 가족인 '가족 극단'이었던 것. 아빠 이건동씨는 작가 겸 연출 겸 배우로, 엄마 이희즙(50)씨는 조명과 음향을 맡는다. 또 가은(30·여·영어학원 강사)과 사라(24·여·회사원), 한울(19·여·회사원), 가람(17·여), 해님(16·남) 등 다섯 자녀는 배우였다.

한얼과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이들의 또 다른 작품, <기억해봐> 관람을 위해 극장을 찾은 지난 14일 저녁 이뤄졌다. 공연 직후 연출가와 배우들, 그리고 3명의 다른 관객과 함께 극장 앞 파라솔 밑에 둘러앉았다. 늦저녁의 봄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고, 모인 이들의 손에는 배우들이 '쏜'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들려있었다. 이씨는 공부가 싫어 연극을 시작하게 됐노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서울예대 연극과 75학번 출신인 그는 졸업 후인 1985년 독일로 유학, 폴크방국립예술대학 연극과에서 마임(무언극)을 전공했다. 독일의 세계적 안무가 '피나 바우슈'를 배출하기도 한 이 곳에서 이씨는 동양인 최초의 마임 전공 졸업생이라고.

"처음에는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독일어가 '딸려서' 할 수 없이 마임을 택했다.(웃음) 당시 '밀란 슬라뎃'이라고 유럽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 지도 교수였다. 카르멘을 무언극으로 만들기도 했던, '판토마임 연극'의 창시자라 할만한 분이다. 지금 '한얼'의 작품은 그 분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입학할 때는 24명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나 혼자였다. 그만큼 졸업하기가 까다로웠다. 1년에 두 번 작품 심사가 있었는데, 나는 한국의 '춘향전'을 무언극으로 만들었다. 졸업작품으로는 <거지의 죽음>이라는 극을 공연했었다. 당시 교수들이 내 작품을 '한국적인 마임극'이라 평했다. 아시아권에서 온 대부분의 학생들이 유럽 스타일을 흉내만 내곤 했는데, 독자적인 스타일을 시도했다는 점이 인정받았던 것 같다."

2002년 '한얼소극장'의 개관...1년 유료관객 67명

▲ <거울인형> 공연 장면
ⓒ 안홍범
1993년 귀국 후 2002년까지 이씨는 서울대와 서울예대 등에 출강하는 강사였다. 그러다 2002년 5월 공연과 함께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는 '아카데미 극장'을 꿈꾸며 '한얼연극영화예술원'을 개관하게 된다. 배우 4명과 식구들이 단원의 전부인 조그만 극장이었지만, 가족들은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열악한 한국의 공연계에서, 그것도 '무언극'만으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03년 한 해 유료 관객은 고작 67명. 결국 배우들은 모두 극장을 떠났다. 연극이 좋아 세상 물정 모르고 살던 이씨였지만 당시는 '침몰하는 기분'이었다고. 결국 연기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가은·사라씨가 배우들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사라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연극은 험한 길'이라며 말렸지만 이렇게 문을 닫기는 너무 억울했다, 조명과 음향을 하면서 나도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내게는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마임'이라 불리는 무언극은 기본적으로 대사가 없는 '넌버벌 연극'을 일컫는다. 무성 영화 시대에 활약했던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등도 마임, 정확히는 서커스 배우 출신이었다. 최근에는 퍼포먼스나 댄스와 접목된 무언극이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시장의 성공에 힘입어 해외로 진출한 <난타>나 <점프>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얼'의 연극은 이들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무언극'이다. 이씨가 독일에서 공부하던 당시 유럽에서는 정통 연극에 영화나 음악 등의 장르를 접목한 실험극이 유행했다. 이씨의 지도교수인 밀란 슬라뎃은 '판토마임 연극'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극을 만들었다. 동작 위주이던 기존의 '마임'에 '스토리'를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한얼의 공연 역시 대사만 없을 뿐, 이야기는 생생히 살아있는 무언극이다.

그러나 '무언극' 혹은 '마임'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장르는 아니다. 극단 '한얼'의 형편도 무언극이 아니었다면 나아졌을지 모를 일. 혹시나 '전향'을 꿈꾸었던 적은 없었을까. 이씨는 독일어의 한계라는 '불순한 의도'로 무언극을 선택했지만, 참 맛을 안 후로는 무언극만 하게 되더라고 말한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삶의 '찰라'들이 너무나 아름다울 때가 있지 않나. 사실 그건 정지 상태다. 그 순간들은 언제나 '무언'인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느낌, 그 순간의 아름다움,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요즘 TV다 DMB다 각종 기계들로 얼마나 말이 많아졌나. 말의 홍수 속에 사는 시대일수록 '무언'이 가치가 있다. 말없이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 감동이 불멸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다."

'한얼'을 찾는 아주 특별한 관객

▲ <기억해봐> 공연 장면
ⓒ 극단한얼
2002년 5월 극장 개관 이후 <거지의 죽음>과 <돈 Show> <거울인형> 그리고 <기억해봐> 등이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올렸다. 지난 2004년에는 <돈 Show>를 들고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거울 인형>과 <기억해봐> 두 작품을 장기 공연할 예정이다.

'한얼소극장'의 객석이 다 차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이씨는 마음이 통하는 관객 '한 명'을 위해 공연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분석하기에 바쁜 평론가보다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그에게는 더 좋은 관객이라고. 그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관객 두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기억해봐> 공연 때의 일이었다. 혼자서 오신 남성분이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욕을 퍼부으셨다. 이게 애들 학예회지 사람을 우롱하느냐. 이런 걸 돈을 주고 표를 파냐… 등등. 엄청남 혹평이었다. 생각이 다르거니 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또 한 분은 4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인데, 아이 둘과 함께 <거울인형>을 보러 오셨었다. 공연 후에 홈페이지에 '출구를 발견하다'는 제목의 관극평을 남겨주셨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연극을 봤는데, 중년의 위기에 뜻밖에도 연극 한편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연극이 '출구' 찾기에 도움이 되었으니, 가치가 있구나 싶어 행복했다."

성인 4명이 신용불량자, 그래도 마음은 '부자'

▲ <거짓말이야> 공연 장면
ⓒ 극단 한얼
배우들은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공연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가족 중 성인 4명이 신용불량자가 됐지만, 자녀들은 구김살 없이 잘 커주었다. 반찬이 간장밖에 없어도 선글라스를 끼고 파라솔 아래에 앉아 "가난해도 멋있다"던 자녀들이었다. 이씨 옆에 앉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둘째 딸 사라씨는 "마음은 가난하지 않으니까"라며 환하게 웃는다.

다섯 자녀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배우로 극단에 남을 계획이다. 아버지의 반대도 자녀들을 꺾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가난을 감수해온 이씨의 삶이 자녀들의 표본이 된 까닭이다. 아직 고등학생인 막내 해님씨는 "아빠의 공연을 보며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선택의 기회를 주셨고, 내가 배우를 선택했다"고 당차게 말했다.

연극이라는 힘든 길로 뛰어든 자녀들을 보는 이씨의 심경은 '기쁨'만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고. 원하는 일을 택하는 삶이 당장에는 입에 써도, 훗날 달콤하다는 경험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 출강하던 당시 무모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아 '돈키호테 교수'로 통했다는 이씨, 그에게 앞으로의 비전을 물었다.

"일본의 가부키 같은 것은 한 집안이 몇 백 년씩 대를 이어 간다고 하더라. 가족끼리 한국에서는 우리가 그런 집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대를 이어서 연극하는 꿈. (자녀들을 둘러보며) 어디서 이런 배우를 구하겠나. 정말 감사하다. '한얼'은 행복한 극단이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부탁했다. 나란히 극장 앞에 선 일곱 식구들을 자세히 훑어보니 자녀들 얼굴이 아빠 엄마를 쏙 빼 닮았다. 함께 공연을 봤던 친구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이 가족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야, 그러나 존재 자체가 한국의 '보물'이야"라고. 범상치 않은 이 '연극 가족'의 공연은 매 주말 '한얼소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문의: 한얼 소극장 02)-766-7010  ☞극단 한얼 공식홈페이지 바로가기


태그:#무언극, #극단 한얼, #거울인형, #이건동,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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