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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9일 안양시내에서 열린 6월항쟁 20년 기념 행진 모습
ⓒ 이민선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중에 재미있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평소 안면도 있고 대화도 몇 번 해본 사람이었지만 그런 일화가 숨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9일 오후 2시경, 경기도 안양에서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옛 안양경찰서에 집결해서 간단한 행사를 하고 안양 일번가까지 약 2km의 거리를 행진하는 중이었다.

옛 안양경찰서는 20년 전인 87년 6월 26일, 민주화 열기가 한창 뜨거웠을 당시 시위대의 화염병에 건물 일부가 불태워졌던 곳이다. 그리고 일번가는 시위대가 집결해서 행진을 시작한 곳이다. 그 길을 거꾸로 걸어가며 20년 전을 상기하자는 의미의 행사였다.

"일번가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눈에 띄는 거야. 순간적으로 당황했지! 열다섯 명 정도였던 것 같아. 이 녀석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말 안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씩 웃으면서 그냥 얘기해도 된다고 했지."

얘기인즉. 20년 전 교사 신분으로 민주화 시위대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당시 장재근(51) 선생은 안양공고 체육 교사였다. 전교조 같은 진보 단체도 없었을 때라 교사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우연히 제자들을 만나서 당황했다는 것이다.

장 선생은 시민단체 모임에 있을 때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던 사이다. 나이 차는 열 살 이상 나지만 워낙 털털한 성격이라 스스럼없는 대화가 꽤 자연스럽기 오간다. 장 선생이 교사라는 신분으로 집회 대열에 합류한 이유는 전두환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집회에 합류했던 시민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장 선생도 군사정권의 폭거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시위대에 합류한 것이다.

▲ 20년 전 6월항쟁 시위대였던 장재근 선생.
ⓒ 이민선
"20년 만에 이 길 다시 걷는데 왠지 슬퍼! 떡 만들어서 남한테 준 기분이야! 민주화 쟁취했는데 그 과실은 일부 기득권층이 다 가져갔잖아.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됐는데 이젠 돈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어. IMF 지나면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됐잖아. 그래서 슬퍼."

"기분이 어떠냐?"고 가볍게 던진 질문에 장 선생은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감회가 깊다'는 식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장 선생의 진지한 대답은 또 다른 질문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노태우가 대통령될 때는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땅을 쳤지! 그리고 예수님을 원망했어. 성당 가서 기도하면서 막 따졌어. 어째서 이렇게 되냐고."

장 선생은 천주교 신자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 당시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서 군사정권을 몰아내지 못했을 때 너무나 억울해서 기도하며 예수님을 원망했다는 것이다.

장 선생이 시위 현장에서 제자들을 만난 날은 87년 당시 안양에서 2만명이 운집했던 대규모 시위가 있던 날이다. 안양 일번가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시작된 시위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참이 일어나면서 그 세가 점점 불어나 약 2만명의 엄청난 대오가 되었던 것.

장 선생은 제자들을 안양 일번가에서 만나 옛 안양경찰서가 불에 탈 때까지 함께 시위를 벌였다. 그 당시 시위 현장에서 만난 제자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부는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열사 이름 앞에 서면 빚진 기분

▲ 기념식장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시민
ⓒ 이민선
행진이 끝나고 안양4동 2002아울렛 앞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사회자는 "그 당시 청년이었던 분들이 이제는 중년이 되어 아이들 손을 잡고 이 자리에 다시 모였다"며 "옆 사람 얼굴을 살펴보라"고 한다. 예전에 집회 현장에서 마주쳤던 사람이 있나 확인해 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난 빚을 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87년 뜨거운 민주화 열기가 6월의 아스팔트 열기를 녹이고 있을 때 난 "차 막힌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시위대를 원망했다. 그리고 길거리 아무 데서나 검문을 한다며 가방을 뒤지는 경찰들에게 퍼붓던 원망을 원인 제공자인 시위대에게도 똑같이 퍼부었다.

87년 6월에 난 농촌에서 갓 상경한 떠꺼머리총각이었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별다른 대책 없이 무작정 상경한 촌티 팍팍 풍기는 스무 살 햇병아리 촌놈이었던 것. 서울만 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왔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취직, 공부는 고사하고 당장 기거할 곳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대책 없는 인생이었던 것.

원인 모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사방으로 쏘아졌는데 그 중 하나가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이었다. 그 당시 보수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처럼 학생들을 '좌익 용공세력'이라 생각하며 원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나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훨씬 수월해 보이는 학생들이 나보다 더 세상에 대해 적개심이 있어 보이는 것이 얄미웠을 뿐이다.

▲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이민선
학생들 그리고 그 당시 피를 흘리며 싸웠던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단순한 적개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난 이후에 알게 되었다. 희생과 헌신, 나보다는 우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용기가 되어 최루탄이 난무하는 도로에서 "독재타도"를 외칠 수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이한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그리고 수많은 민주 열사들의 이름 앞에 서면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빚진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공기가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살듯이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수많은 열사와 투사의 이름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기에.

길거리에서 가방을 열라고 으름장을 놓던 경찰들의 행동이 우리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준 분들은 법조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바로 열사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6월항쟁 20주년인 2007년 6월을 보내며 나의 스무 살 6월을 되돌아보고 제자들과 함께 최루탄 냄새 맡으며 "호언철폐"를 외쳤던 장 선생의 열정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6월항쟁, #안양일번가, #장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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