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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좋은 날, 차는 무료'

이 문구는 87년 6월 29일 08:30분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을 발표하고 난 후 소공동 '가화 다방' 앞에 서툰 글자로 써서 붙여놓은 글이었다. 세상에 차를 무료로 준다니…. 다방 주인의 심정은 어떠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까?

그해 1월 14일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의 사유를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발표로부터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전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의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와 데모가 증폭되었다.

억울하게 아들의 목숨을 잃은 아버지는 종철의 영혼을 남한강에 뿌리면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하며 울부짖는 모습에 국민들은 함께 분노하고 애도에 잠겼다. 아들을 잃은 참적의 슬픔을 어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아픔이었다.

▲ 고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이한 지난 1월 14일 고인이 사망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건물에 고인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시민 자극한 전두환정권의 4.13호헌조치

여기에 전두환 정권은 '호헌조치'를 선언하여 학생과 시민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당초 고문치사를 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다가 담당 의사의 양심에 의해 밝혀졌는데도 정권은 국민에게 그리고 유가족에게 사과는커녕 오히려 강공책을 쓰고 있었으니, 그들의 음모가 있었다.

5·18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세력은 과도기 1년에다 단임 7년을 정하면서 8년의 집권에 만족지않고 5공헌법대로 단임을 끝내고 정권연장을 위한 모종의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소위 8년을 포함한 20년 집권 시나리오다. 여기에 대한 모델은 버마(미얀마)였다.

1983년 10월 9일 전 대통령 일행은 서남아 대양주 5개국 순방의 첫 방문지인 '버마'를 방문하여 아웅산 묘지를 참배하려는 순간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각료와 기타 17명이 묘지 폭발로 숨지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또한 슬픔을 안고 있었다.

17명은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엘리트 지식의 동량들이었다. 그 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후진성 국가인 버마를 찾았는가가 의문이었다. 계속된 의문은 버마의 장기권력의 화신이었던 네윈 장군의 집권현장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사연으로 인식하게 되는 뉘앙스는, 20년 집권의 모델로 설정한 버마 통치권의 견학에 아까운 인재들을 너무도 많이 잃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국민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4.13호헌조치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웅산 묘지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모든 것이 잠행하고 오직 순직으로 국민들의 슬픔만을 갖게 하고 또한 안보의식을 고양했으며 묻혀진 일들로 넘어가고 있었다. 5·18로부터 불과 3년 후의 일이었다. 5공 말기의 전 정권은 정권마감이 10개월로 다가옴에 초조한 나머지 '오버'하고 말았다.

초등학생이 봐도 박군의 죽음 후에 내려진 4.13 호헌조치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20년 집권시나리오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내각제를 관철하여 항구적인 정권유지를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터이었다. 그러기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내각제를 위한 야당 이민우 총재와 중용의 이모 전 총재를 회유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하고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국의 실정에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가 현실성이 있다면서 은근히 주장하였던 사실이다. 이에 양김은 대통령 책임제와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6월항쟁에 전두환정권 반짝 계엄 고려

그러니까 4.13 호헌조치는 불에 기름을 부은 조치이고 학생과 민중의 강한 저항을 감수하면서 국면저항을 부추기는 고도의 술책이었음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5.18 광주항쟁 7주년 기념 추도 미사에서 사제단 김승훈 신부님의 '박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 발표로 박군 고문치사에 대한 분노와 은폐조작에 대한 커진 울분이 폭발되었다.

이로 인해 5공 정권은 부도덕한 정권으로 나락에 빠지고 있었다. 5.26 민심수습을 위한 총리를 포함한 대폭 개각을 단행할 때 필자도 이한기 총리서리를 보좌하느라 함께 했다. 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의전 책임자로 함께 총리를 보좌했었다. 그런데 5월 27일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고 6월 9일은 이한열군이 최루 직격탄에 중상을 입었다.

6월 10일은 이미 시작한 6월 항쟁의 시초의 날로 전국적으로 부도덕한 5공 정권에 항의였다.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명동성당 농성은 일조의 분수령이었다. 대통령이 화를 내고 현장을 찾겠다고 했으나 총리는 대화로 풀 것을 주장하여 4일동안 토론과 토론을 거듭하여 결국 농성을 풀어 총리의 제의가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성 해제 이후 6월 항쟁의 열기는 더욱 불타고 있었다. 6월 18일은 전 대통령이 반짝 계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은냄비 근성이기에 빨리 잊고 빨리 식는다'는 약점을 이용한 술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반 총장과 나는 총리에게 적극 주장하고 있었다. 만약 군이 나온다면 88올림픽은 물 건너가고 경제는 나락에 빠진다.

▲ 2003년 2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그리고 아직도 5월 광주의 아픔이 가시지 않았는데 불가하다고 건의했었다. 그 건의는 노태우 대표와 대통령에게 하였다. 그리고 군이 나오면 4.19와 같이 탱크에 시위대가 올라타고 거리를 누빌 것이다, 혁명으로 간다면 많은 피를 보고도 남는다, 올림픽은 철회되고 경제는 몰락한다, 그러고도 정권이 유지되겠는가?

이런 건의는 수없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켈리가 방한하여 반대하고 군 내부도 반대했다. 당정간의 대표인 총리와 당대표도 반대하는 군 출동을 전 대통령은 거두었다. 그게 6월 18일이다. 항쟁은 그날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6.26날은 평화대행진으로 전국 소도시까지 항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는 국민들의 뜻이었다.

당시 총리서리, 6.29선언 내용 건의

총리는 국민들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여 노 대표와 6.29선언의 내용을 건의하고 있었다. 한때 노 대표는 직선제로는 자신의 집권이 어렵다며 동의하지 않았으나 결국 국민에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총리의 건의도 있어 청와대와 협의를 한 결과 수용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가 6월 25일이었다. 평화대행진의 항쟁이 공권력과 군 출동으로 차단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6.29선언을 나오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가다. 그 선언을 두고 물론 당정간에 안가에서 수차례 회동이 있었다. 한때는 수용을 하지 않는다면 혁명을 하게 된다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가닥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 이미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준비를 빙자해 여의도에 1개 사단이 출동해 있었으나 나는 여의도 현장을 가서 확인하고 총리에게 보고했다. 총리는 놀라면서 절대로 계엄을 선포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각오였다.

다행이었다. 6.29선언은 당정뿐만 아니라 재야와 국민들의 의견도 수렴했다. 문제는 혁명이냐 국민에 대한 항복이냐다. 전두환 정권 말년에 20년 집권 시나리오는 완전히 거두었다. 거기에는 88올림픽이 있었고 당정간의 건의가 있었고 현대사회연구소의 주요한 문서도 있었다. 그 문서는 총리와 내가 보고 삭제하였다. 지금은 대봉투만 있다.

내용은 6.29선언 내용의 전부에다 알려지지 않은 추가 2항이 있었다. 국민에 대한 항복이지만 자신들도 선거로 인해 야당이 될 수도 있다는 결단과 양김의 분열을 부추기고 단일화가 되지 않도록 조정을 모처에서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6.29선언으로 그렇게 강하게 불붙던 항쟁의 불길이 꺼지고 있었다. 아니 6.29선언 내용대로만 하면 항쟁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들어준 셈이 되었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깊은 의지의 표현은 6.29가 아니고 '속이구'라는 노골적인 불만이었으나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특히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당선을 포기한다는 뜻도 있어 수용이었다.

총리공관은 그때부터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어쩌면 건의한 내용이 다 들어있어 만족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를 수용할까, 의문이었지만 수용한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헌법개정과 선거관리 내각이었다. 이 총리는 총리를 맡을 때 사양했으나 지상발령을 받았다. 건강이 지병으로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일단 맡았으니 열심히 직무를 수행했다.

7월 5일 이한열군이 중상을 입은 지 26일 만에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구름처럼 운집한 7월 9일 장례는 장례위원회와 협의하여 무사히 치르기로 정부는 약속했다. 5일장인 7월 9일 발인은 연세대에서 하고 신촌 노제를 지내고 시청 앞 광장에서 마지막 거리제를 지내기로 하여 인파가 몰려들었다. 100만명의 추모인파가 모였다.

그런데 시청 앞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 일부 추모인파가 중앙청 청와대로 가자고 해서 이순신 동상 앞을 마지노선을 정했지만 성난 군중이 청사나 청와대에 진입한다면 4.19처럼 발포도 불사했을 터이다. 그러면 어찌되는가? 혁명으로 가지 않을까. 정부와 경찰은 물론 중앙청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에는 수경사 전차가 겹겹이 싸고 있었다.

그러나 자제했다. 만약 6.29선언이 없었다면 군중이 자제했을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6.29선언은 여러 가지 이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묶었던 운동권도 석방되고 민주 직선제를 시행하기 위한 헌법을 여야가 사이좋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6.29선언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서로 자신의 작품이라느니 승리 전리품을 나누려 하고 있었다.

▲ 6월항쟁 당시 고 이한열 추모식 때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군중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군의 장례행렬은 서울을 떠나 고속도로를 거쳐 광주 망월동 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거리제를 또 지내고 새벽 3시에 안장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잠에 들었다. 그 후 총리는 이제 뜻한바 대로 정국이 흘러가니 이쯤해서 사표를 내겠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중립내각구성을 위해서도 사표를 내야 한다고 했다. 건국 이후 두 번째로 단명인 서열 제2위인 총리는 기회가 왔다면서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7월 13일 사직서를 직접 들고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독대했다. 서리도 못 떼어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총리는 지병이 심해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겸손하셔서 그러신 줄 알았다며 그동안 수고를 많이 하셨다면서 위로했다. 총리는 사직하고 사저로 곧장 이사를 했다. 하루가 한 달 같았고 한 달이 1년 같았다면서 당신의 뜻이 관철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6.29선언은 국민에 대한 굴복

그렇다면 6.29선언의 진실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대로 민주화의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런데 6.29를 선언한 결단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반짝 계엄도 안 되고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서로 6.29는 자신이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었다.

우선 전두환 대통령이다. 그가 노 대표에게 그런 방향으로 가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후보도 되고 다음의 정권을 위해 힘을 실어주었다고 자찬했다. 그리고 부인도 그리고 자식들까지도 6.29선언을 건의했다고 한다. 다음은 노태우 자신이다. 본인은 정치적 결단을 위해 국민에게 항복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다음에는 김복동 의원이다. 자신이 적극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권복경 당시 경찰수뇌였다. 고명신 보안사령관도 자신의 작품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박철언도 적극 건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6.29선언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맞다. 그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진정한 6.29선언은 포괄적으로 국민에 대한 굴복이었다.

허나 절대적인 역할은 아무래도 당정간에 긴밀히 협의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나' 했으나 그 방울은 48일간 사심 없이 총리직을 수행하고 과감히 사직한 총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국민들의 힘이다. 앞으로 역사의 반면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분석한 6.29선언의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군사문화가 횡행하는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오직 우리가 가야할 길이 평화와 남북통일 아닐까? 6.29선언 7주년을 맞이하여 그날을 기억한다. 시대의 불꽃처럼 희생된 박종철군과 이한열군의 희생이 6.29선언을 하게 한 동인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잊혀져가는 20년 전 6.29 선언이다. 온국민이 하나되어 힘을 합하면 위정자들도 그 뜻을 알아차린다.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가 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치는 세상을 위해 6.29를 선언케 했던 당시 6월항쟁의 하이라이트인 6.29 선언이었다.

*윤영전 기자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이한기 국무총리서리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태그:#6.29선언, #이한기 총리서리, #박종철, #이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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