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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민족담론의 거대서사에 갇혀 있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최근에 유행처럼 번진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미시사 연구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압제와 수탈의 민중현실, 강고한 항일투쟁과 친일, 사상과 노선의 사분오열 등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대는 유행가와 딴스홀, 자유연애와 대중잡지가 공존하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사회로 재탄생 되었다.

이러한 미시사 연구의 흐름은 TV 드라마로까지 이어져 과거를 재전유해 내는 지칠 줄 모르는 우리 시대의 복고적 욕망을 확인시켜준다. 새롭게, 더 새롭게, 역사는 다시 쓰여지고, 우리의 욕망도 더욱 섬세하게, 더욱 내밀하게 자신의 대상을 찾아간다.

그렇게 <경성스캔들>(진수완 극복, 한준서 연출, KBS 수목미니시리즈)은 유쾌한 전도를 감행한다. 매우 꼼꼼하고 영리하게 준비된 이 드라마의 경쾌하고 발랄한 전도는 텍스트 내외적으로 몇 겹에 걸쳐 이루어진다. 드라마의 일차적 전략은 우리의 약한 고리 일제 강점기에 대한 외경과 금기를 한낱 로맨스 따위의 스캔들로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불경한 시도는 이 시대에 대한 우리의 오랜 콤플렉스와 부채감을 스윙재즈의 경쾌한 선율에 맞춰 한방에 날려버린다. 이는 물론 망각과 숙고의 반복적 진통이 만들어낸 그만큼의 시간적 거리와 사회의 성숙을 반영하는 것일 게다.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면 그러한 전도의 욕망은 더욱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드라마 전체를 떠돈다. 네 명의 주인공이 그려내는 식민지하 젊은이들의 사상·문화의 공간적 좌표는 그 대척적 거리에도, 뭔가 불온해 보이는 공모의 기운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 KBS 수목드라마 <경성스캔들> 주인공들.
ⓒ KBS
서점 혜화당을 운영하며 야학도 하는 새내기 독립투사 나여경(한지민 분), 요정 명빈관의 얼굴마담이자 경성의 유명한 모던 걸이나 실상은 '애물단'이라는 비밀테러조직의 전사인 기생 차송주(한고은 분), 삼류 대중잡지 '지라시'나 불법댄스홀이 노는 근거지인 경성 최고의 카사노바 선우완(강지환 분), 여기에 심지어 독립투사에서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에 들어간 뭔가 베일에 휩싸인 인물 이수현(류진 분)까지 이들 사이에는 은밀하게 통하는 삐딱하고 불온한 모종의 기류가 흐른다.

그것은 법과 질서에 대항하는 불법적이고 비합법적인 충동들이다. 저항이거나 외면이거나, 분노거나 냉소거나, 위장이거나 가식이거나, 여기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여러 양태의 부인이 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방점은 식민지 현실이 아니라 부인과 저항의 행태에 찍힌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 그 자체이자, 금지된 것에 대한 '위반'의 쾌락이다.

이곳이야말로 조국해방투쟁과 불법댄스홀이 만나는 지점이다. 구습과 구문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이 식민지 조국의 억압체제에 대한 반발과 모순적으로 충돌하는 곳에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극단적으로 갈리는 두 경향이 강렬하게 맞부딪침으로써 양자는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여기서 드라마의 강력한 힘이 생성된다.

따라서 여느 드라마와 달리 갈등은 항일투쟁과 그에 대한 탄압 사이에서가 아니라, 근대적 욕망과 반제국(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사이에 놓여진다(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주제로 이 드라마가 우리의 현재적 욕망의 투영임을 명확히 드러내준다). 탄압의 현실은 그 둘 사이의 갈등과 궁극적 결속을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으로 기능할 뿐이다.

조마자(조선의 마지막 여자)라 불리는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나여경과 룸펜 부르주아인 경성의 최고 멋쟁이 모던 보이 선우완은 그렇게 만난다. 여기서 스타일은 가치관이다. 이들의 상반된 스타일은 상반된 가치관을 말해준다. 그러나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극도의 경계와 반발심은 뒤집어 보면 서로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치명적 매력에 매혹되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다.

선우완이 형의 죽음 이후 애써 외면했던 항일투쟁의 길로 나여경이 가고 있으며, 그는 여자를 사랑하기 전에 이미 독립운동 자체에 끌리는 충동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의지 사이에 놓여 있었다. 형과 함께 동경에서 독립운동 중 변절하여 형을 죽음으로 이끈 죽마고우 수현의 존재는 그의 이러한 심리적 갈등을 더욱 부채질한다.

장난삼아 내기로 시작된 '조마자의 모던 걸 만들기' 프로젝트는 선우완이 나여경을 실험해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실험하는 모험과 도전임을 드러내준다. 그는 나여경의 단호한 의지와 어설픈 실행 사이에서 알리바이가 되어 주고, 비호세력이 되어 줌으로써 그녀의 세계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게 된다.

그리하여 드라마는 초지일관 식민지 현실에서도 청춘남녀들의 로맨스는 혁명과 투쟁의 열기만큼이나 강렬하게 피어난다는 핵심적 주제에 이른다. 물론 이들의 사랑은 <사의 찬미>에서의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처럼 비극적이거나 도피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KBS 수목드라마 <경성스캔들> 한 장면
ⓒ KBS
여기서 사랑은 혁명과 투쟁의 한 가운데서 자라나고, 혁명과 투쟁은 사랑 안에서 그 가능성의 싹을 틔운다. 그 둘은 서로서로의 내재적 계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혁명이 단지 낭만성이나 작렬함이라는 둘 사이의 유사성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공동 운명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드라마의 매력은 그처럼 사랑과 투쟁을 촘촘히 뒤섞어놓는 전략과 구성의 탁월함에 있다. 네 사람의 로맨스는 그야말로 사랑이 조국해방투쟁의 강력한 위장전술인지, 아니면 항일투쟁이 단지 이들의 로맨스를 위한 명분 좋은 구실인지,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그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지점에 위치한다.

차송주가 나여경을 이용해 선우완을 교묘히 끌어들이듯이, 나여경에게 이수현과의 위장연애 임무를 내리듯이, 내기로 시작되고, 위장연애전술로 시작된 연애는 진짜 사랑이 되어가고 동시에 항일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여기서 위장이라는 단어는 드라마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키워드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의 전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적들의 허점을 파고들어 그들을 속여 넘기고 골탕먹이는 것이다. 이것은 약자의 생존전략이자 목적 달성을 위한 치밀한 수행이지만 동시에 위장과 가면이라는 놀이로서의 행위이기도 하다.

거짓과 진실 사이의 숨바꼭질이며, 무엇보다 네 남녀의 은근하고 애틋한 사랑놀음이 펼쳐지는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다. 임무수행을 위해 나여경이 선우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애써 감춰야 하는 것처럼. 얼굴 없는 '애물단' 수장이 혹시 이수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네 남녀의 사각관계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몰고 가는 것처럼.

이 드라마에서 유쾌한 전도와 역전이 발생하는 마지막 지점은 위장과 가면 놀이라는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거침없는 과장과 과감한 축약이라는 코미디 전략이다. 사상도 노선도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애물단'에서부터 극도로 희화화된 총독부 보안과장과 사치코 부부, 코러스 역할을 하는 '지라시'의 삼인방 등 리얼리티의 부담에서 벗어난 코믹 요소들이 드라마의 뒤집기 전략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라는 어둠의 시대는 과거를 새롭게 쓰려는 우리 시대의 욕망에 따라 유쾌하고 다채로운 퓨전 스타일로 복원되었다. 위반의 쾌락과 로맨스의 활기가 있는. 그처럼 식민지의 약동하는 근대적 욕망 위에는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적 욕망이 덧씌워 있다.

태그:#경성스캔들, #KBS, #드라마, #한지민, #한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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