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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김영순은 국내에 그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얼마 전 기자의 한 지인이 자신에게 후원을 요청한 재미교포 여성의 자료를 보여주었다. 연극 기획서, 지역지와 인터넷 매체에 소개된 연극 기사, 그리고 하얀 천에 펜으로 곱게 적은 편지였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그녀의 글은 "이곳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극을 통해 알리고 싶습니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요즘 사람 같지 않은 예의와 진심이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천을 통해 느껴졌다.

 

그녀의 이력을 살펴보니 한국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연극에 빠져 지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감행해 연극으로 유명하다는 뉴욕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취재를 일삼은 사람에겐 일명 ‘필’이라는 게 있다. 그녀가 있는 뉴욕으로 전화를 돌렸다. 밤과 낮이 한국과 반대인데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전화와 이메일로 진행되었다.

 

29세 연극 유학... 늦은 나이에 정말 어려워


-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력을 보니까 한국에서 연극활동을 하셨네요?
"네, 충북 제천에 있는 제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극이 하고 싶어서 서울로 갔어요. 학교에서 연극반을 했거든요. 한 10년간 서울에서 극단생활을 했죠. 극단 창조·로얄 씨어터 등에서 극단생활을 했고, 풀통 들고 다니며 포스터 붙이고 단속 경찰이 쫓아오면 도망가고, 시내 곳곳에 전단 돌리고 극장에서 표 파는 일도 했어요. 그냥 연극이 좋아서 그런 일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셨나요? 29세라면 언어와 학문을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일 수도 있는데.
"돈이 생기면 극단에 가서 연극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돈 버는 일을 하며 왔다갔다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스물아홉이 되어 있더라고요. 친구들은 결혼도 하고 자리를 잡고 사는데 나만 비전 없는 삶을 계속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삶을 계속 살다가는 내 인생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다 싶어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9개월 정도 열심히 일해서 자금을 모아 유학을 왔어요."

 

- 공부할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연극은 언어가 정말 중요한 학문이라 이곳에 와서 영어부터 공부해야 했어요. 사실 도서관에 오래 앉아있는 연습부터 했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하루 4시간 아르바이트하고 잠은 3~4시간, 그리고 나머지는 숙제하고 공부했죠.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데이트 신청을 받아도 정말 숙제가 많아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언어 때문에 힘들었던 일은 사투리 연기 과목이었어요. 영어만으로도 힘든데 사투리까진 정말 힘들었죠. 아무리 듣고 외워도 한계가 있으니까 연기를 하는 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죠. 그때 교수님께서 '영순아, 난 네가 보인 노력만으로 충분하다'라고 하셨죠. 진정한 이해가 삶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 일이죠."

 

북한은 핵만 있고 사람도 없는 나라처럼 미국언론 보도


 

'오프 브로드웨이'란?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란 '브로드웨이를 벗어난'의 뜻이다. 브로드웨이 선상에 있는 500석 이상의 대극장을 브로드웨이 극장이라고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예술의 전당 등 대극장들이 대학로 극장가에 밀집해 있는 것에 비유된다. 500석 이하 99석까지의 극장들을 '오프 브로드웨이'라고 한다. 즉 작품성을 위주로 다양한 메시지를 지니는 소규모 연극공연이 이곳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이뤄진다.

- 연극 <사랑의 약속>으로 2004년 오프 브로드웨이에 입성하셨는데요. 어떤 작품인가요?
"2000년 이산가족 상봉에 선택된 한 이산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미래, 한국과 북한을 넘나들며 한 남녀의 아름다운 연애와 전쟁으로 인한 이별 그리고 2000년 가족 상봉에 이르기까지 되짚는 이야기입니다. 평화주의자 한결은 아내와 아들을 먼저 피난 보내고 자신은 늙은 어머니를 만나 남으로 가려 했지만 이것이 50년간의 이별이 되어 버립니다. 이후 상봉을 통해 아내, 아들과 며느리, 손녀를 만나 격한 감정을 느끼며 그 속에 그동안의 고통, 그리움 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역사 속 개인의 고통, 냉전과 정치적 소외 등이 그려집니다."


- 배우가 모두 미국인인데 어려움은 없으신지요?
"연출을 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 연습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통해서 서로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 <사랑의 약속>은 국내 정치 및 분단 상황과 맞물려 있는데, 왜 이걸 굳이 미국 땅에서 올리셨나요? 나름의 생각이 있으셨는지.
"미국인들은 전쟁으로 가족이 와해되고 50년 동안 서로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다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 미국 미디어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북한, 즉 핵을 보유한 위험한 독재정권의 공산주의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익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은 핵만 있고 사람은 없는 것처럼 미국 미디어가 보도를 했으니까요. 그러한 미국 관객들에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그들도 공감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통일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고 북한이 핵만 있는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그곳에도 우리가 만나야 할 가족과 친지와 이웃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사랑의 약속>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분단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에서 이런 연극을 올렸다는 것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당시 어떤 평가를 받으셨는지요?
"정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통일의 중요성을 제시했다고 좋게 평가해주신 분들도 있고, 또 한편에서는 너무 휴머니즘에 중점을 두어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를 피해갔다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둘 다 제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한국의 민주화 무임승차한 나, 늦은 공부로 사회문제에 눈떠


- 흔한 말로 대학 운동권도 아니었는데 역사 인식력을 가지셨어요. 계기가 있었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배우고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했고, 그래서 다른 386세대가 겪었던 격동의 80년대를 너무나 안일하게 보냈습니다. 그런 무지함으로 부끄럽게도 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접하면서 내 나라 내 민족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눈을 떴고, 강준만 교수님의 <인물과 사상>이라는 책을 접하고 비로소 사회적 현상과 문제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 역사관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연극을 공부하면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연극을 통해 사회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또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올바른 역사인식에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분단과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사실 이 부분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 대작가 조정래 선생님께서 장편 <한강>을 마치며 쓰신 후문에 있는 글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소국들이 힘을 모으는 데는 민족주의 밖에 없었다.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민족주의와는 반대로 방어적이고 공생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소국들이 민족주의로 힘을 응집시켜 저항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이 제국주의자들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내년 5월 정도에 다시 사랑의 약속을 수정작업해서 연장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꼭 미국이 아니더라도 세계 각국의 관객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조정래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제가 이 공연을 이어가는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월남전은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180만이 죽었다. 그런데 6.25는 단 3년 동안에 300만이 넘게 죽었다. 그럼에도 월남전은 신제국주의의 악을 세계에 고발하는데 성공했는데 6.25는 세계 어느 한구석에서 일어났던 사소한 전쟁으로 묻히고 말았다."

 

"또한, 유태인이 영화 연극 TV 드라마 소설 시 등으로 전세계에 그들의 이야기를 알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역시 문화예술은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 <사랑의 약속> 공연을 이곳 브로드웨이에 올리는 일을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서양배우로 우리의 이야기 풀어가기, 도전은 계속


- 브로드웨이의 한류열풍, 가능할 것으로 보십니까?
"한국에서는 셰익스피어와 번역극이 판을 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곳에서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한국배우들은 제임스가 되고 수잔이 되는 번역극을 잘하는데 왜 서양 배우들은 철수가 되고 영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미국에서 연극 공연을 하면서 미국 관객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야기를 이곳 미국 배우들이 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영화계에서 이루어 내는 한류 열풍들을 이곳 브로드웨이에서도 이룰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가능하다는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도전해 보고 싶어요. 이곳에서 뮤지컬과 연극을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있고 그들이 공부한 후에 이곳에 남아서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김영순씨는 지난 5월 스테이지 월드(Stage World)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설립 목적의 첫째는 재능있는 한국인들의 작품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는 것, 둘째는 재능있는 유학생들을 후원하는 것이다. 김영순씨는 자신을 일컬어 연극 외의 일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비싼 보석이 눈앞에 있어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명품 브랜드를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이렇게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사람이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싶지 않단다. 인종과 언어 국경을 넘어 열린 가슴으로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이고자 했다.

 

인터뷰 말미에 고국의 동포에게 할 말을 부탁했다.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어 연륜이 쌓이면 하겠노라고 짧게 답했다. 다만, 마냥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연극을 통해 사회변화에 작은 일조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여성 월간지 <우먼라이프>에도 게재됩니다.


태그:#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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