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전성기시절 김선진은 94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으로 인해 그 다음해에는 4번타자로까지 지위상승하는 영광을 누린다

LG의 전성기시절 김선진은 94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으로 인해 그 다음해에는 4번타자로까지 지위상승하는 영광을 누린다 ⓒ 최대우

흔히 선수들을 평가할 때, 진부한 표현이지만 '소금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쓴다. 그 자체보다도 음식에 녹아 들어가며 맛을 조절해주는 소금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팀에 이바지하는 선수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26년 프로야구 역사에서 이러한 선수들에 대한 추억은 어느 팀 팬들이나 가지고 있을 것인데, 90년대 중반 전성기를 구가하던 LG트윈스는 이런 선수들이 많았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김선진이 떠오른다. 그것은 그가 원래 '소금 같은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교시절, 그리고 몰락

고교시절의 활약상으로 보면, 실상 그는 '소금'이 아닌 '메인디쉬'같은 존재가 되었어야 옳다. 광주일고 시절, 그는 1학년으로는 드물게 주전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물론 프로에서 뛰었던 선수치고 고교시절 야구 못했던 선수가 있겠느냐마는, 그는 그 정도를 뛰어넘어선 선수였다.

1983년 대통령배에서, 그는 당시부터 동년배 최고 투수였던 세광고의 송진우(한화)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뽑아내었으며, 그것은 광주일고의 대통령배 우승을 결정짓는 안타였다. 그 해 광주일고의 우승은 5·18 비극으로 초상집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는 광주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잔칫집으로 만들어 놓는 역할을 했다(이후 광주일고의 봉황기, 황금사지기 우승, 그리고 프로팀 해태의 우승까지, 1983년은 '광주의 해'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선진이 광주의 영웅으로 떠올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머지않아 김선진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어깨부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 당시 유격수였던 김선진에게 어깨부상은 '유격수로서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이 택한 포지션은 1루. 하지만, 장거리포보다는 빠른 발과 컨택 능력이 주무기였던 그였기에, 장타력이 중시되는 1루에서 그가 부각될 가능성은 적었다.

결국 고교시절 최고 지역구 내야수였던 그는 연세대 시절에는 존재감을 잃고 그저 그런 선수로 지낸다. 그의 대학 졸업이 다가왔고, 고교시절 어깨부상을 당하지 않고 유격수의 포지션을 유지했다면, 당시 유격수 기근에 시달리던 고향팀 해태에 당연히 1차 지명될 수 있는 대상이었으나, 해태는 그를 외면했다.

(필자는 김선진의 어깨부상이 없었다면 KIA,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역사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약간 엉뚱한 의문을 가져본다. 3년 후 해태에는 김선진의 고교 3년 후배인 이종범이라는 유격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에서 입단 테스트까지 치렀으나 거기서마저 쓴잔을 들이킨 한때의 천재 유격수는 결국 '발만 빠른 1루수'라는 어색한 타이틀을 지닌 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90년 LG에 입단한다.

90~93년, 그의 '개털' 인생

그래도 LG입단 첫해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1루 자리에는 '미스터 LG' 김상훈이 버티고 있어 주전은 언감생심이었지만, '뛰는 야구'를 중시하던 백인천 당시 감독에게 김선진의 스피드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해 백업 1루수겸 대주자로 45경기에 출전하며 .344 9홈런 5도루라는 성적을 올리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어 우승까지 맛보는 등 무명 신인치고는 괘 괜찮은 데뷔시즌을 보냈다.

그 다음해에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김상훈이 예상외의 부진을 보이자 그는 1루수로 기용되는 경기가 많아졌으며, 104경기에서 .255 3홈런 18타점, 12도루라는 꽤 짭짤한 성적을 올리지만, 백인천 감독의 히트앤드런 작전이 읽히기 시작하자 그는 점점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게다가 92년부터는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고, 김상훈이 원래 기량을 회복하자, 다시금 일자리를 잃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 정도까지만 해도 '평균 선수'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었다. 그는 92, 93년 두 시즌동안 3홈런 30타점의, 어찌 보면 '딱 백업다운' 성적을 냈으니까. 하지만 93년 가을은 그를 '평균 이하의 선수'로 만들고 말았다.

LG는 93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석패, 최종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는데, 결정적 원인은 두 차례의 주루 미스였다. 첫 번째 주루미스는 잠실 2차전에서 윤찬의 '묻지마 질주'로, 그 경기를 1점차로 패한 LG는 홈에서 삼성에게 2연패하고 만다. 하지만 신인 이상훈, 노장 정삼흠이 대구에서 연일 호투하며 2승 2패로 간신히 균형을 맞춰 놓았다.

그리고 5차전, LG로서는 잔인한 주루 미스가 또 한 번 일어났다. 7회초 1사 1,3루에서 3루주자가 견제구에 걸려 횡사한 것이다. 결국 LG는 그 경기를 3-4, 딱 한 점차로 지고 말았다. 그 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이광환 감독은 그해 겨울 두 차례나 병원신세를 져야 했으며, 그 3루 주자는 다름 아닌 김선진이었다.

죄질이 중한 만큼 팬들에게도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으며, 더욱이 그동안 공헌도가 있었던 선수도 아니었기에 '개털'이라는 별명까지 붙고 만다. 83년 광주의 영웅은 10년 만에 그렇게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100% 트레이드 혹은 방출 대상이었지만, '미스터 LG' 김상훈이 갑자기 트레이드되며 1루에 대안이 없어지자 그는 다행히도(그 당시로서는 다행히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LG에 남을 수 있었다. 1루에서 그나마 경험이 있는 이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94년,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의 한 방

94시즌 태평양과의 인천 개막전. 김선진은 선발 1루수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단 그 외에는 서용빈, 허문회 등 모두 신인들이었기 때문에 대안이 없어서였다는 편이 옳았다. 그의 자리는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 하는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그날 교체 출전한 서용빈이 중월 2루타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는 바람에, 그 다음 날은 아예 선발 명단에서 빠졌으며, 그 다음 날도 서용빈은 3안타를 날리며 결국 김선진의 주전 1루수 자리는 '1일 천하'로 끝나게 된다.

서용빈은 그 해 전 경기에 출장했으니까. 반면 그 해 김선진의 성적은 겨우 48경기에서 .263, 1홈런 7타점에 그쳤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피드도 도루 3개로 많이 퇴색했다. 비록 LG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김선진은 그 주역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퇴출의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성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그는 엔트리에 포함되는 행운을 얻는다. 이광환 감독이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맞은 잠실 1차전. LG와 태평양은 1-1로 팽팽하게 맞서며 연장에 돌입했지만, 사실 경기 분위기는 LG에 불리했다. 트윈스가 이상훈-차동철-김용수 등 주축투수들을 모두 동원해가며 힘겹게 위기를 넘기고 있었던 반면, 태평양은 마무리 정명원을 대기시켜 놓은 채 김홍집 하나로 버텨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김홍집이 있을 때 '쇼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LG는 10회가 되도록 단 4안타로 눌리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연장 11회말. 믿노라 하는 선두타자 유지현이 아웃되자 팬들은 거의 자포자기로 가고 있었다. 그 다음 타자는 요즘말로 '자동아웃' 타자였던 김선진이었기 때문이다.

발은 빠르니 몸에 맞아서라도 출루나 해줘서 김재현-한대화에게 연결이나 해주면 다행이라 생각한 그 순간, 김홍집의 초구는 밋밋하게 들어왔으며, 김선진의 배트는 힘차게 돌아갔다. 그리고 공은 순식간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5시즌 통산 7홈런이, 게다가 그 시즌에는 1홈런이 전부이던 김선진이 팀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잠실팬들의 환호는 11년 전 동대문구장의 환호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태평양은 그를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시킨 팀이기도 했기 때문에 의미는 더욱 컸다.

이광환 감독이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가장 힘겨웠던 1차전을 잡고 나서는 일사천리였다. LG는 정규시즌의 사기를 회복하였으며, 태평양은 그 패배의 충격으로 공황에 빠진 채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LG의 4전 전승 우승. 비록 한국시리즈 MVP는 김용수에게 돌아갔지만, 임팩트로 따지면 김선진 역시 충분히 MVP를 수상할 자격이 있었다.

그 후, 팀의 소금이 되다

김선진은 그때의 활약으로 별명도 바뀌게 되었다. '개털'이라는 별명이 1년만에 '용털'로 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김선진의 활약이 단순히 그때에 그쳤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해결사 본능을 확인한 이광환 감독의 그를 보는 시선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해져 있었다. 냉랭하던 이광환 감독의 마음을 돌려놓은 그는, 여전히 완벽한 붙박이 주전으로 나서기는 부족했지만, 점점 주전으로 출전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95년은 때마침 '원조 해결사' 한대화가 노쇠를 보이기 시작한 해였다.

주로 지명타자 자리에서 뛰던 한대화가 부진하기 시작하자, 이광환 감독은 한대화 대신 김선진을 선발 4번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실제로 그는 그에 부응하는 활약을 했다. 특히 OB와의 순위싸움이 치열하던 8, 9월에는 아예 붙박이 4번으로 나섰다. 비록 LG는 아쉽게 순위싸움에서 밀렸지만, 김선진은 94경기에 출전, .294로 3할에 육박하는 타율을 올렸으며, 자신감이 붙자 그의 주특기인 도루도 다시 12개를 기록했다. 그리고 9홈런 39타점. 안타가 74개였는데 타점이 39타점이라는 것은 충분히 '신해결사'의 자격을 인정해 줄만한 내용이었다.

어쨌든, 그는 9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이 '1회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96년, 서용빈이 원인 모를 부진에 빠지며 주전 라인업을 들락거릴 때, 그 자리에는 김선진이 있었다. 데뷔 후 가장 많은 115경기에 출전하며 .235 6홈런 39타점, 도루 18개로 쏠쏠한 활약을 보였다.

그는 이제 단순한 '한국시리즈의 영웅'이 아니라 '소금 같은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젊은 시절 성실함과는 거리가 있던 그였으나, 30줄에 들어선 그의 그라운드 내에서의 눈빛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좌투수들에게 김선진은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자였다.

그러나 97년, 그는 1년을 허송세월하게 된다. 1루 원주인인 서용빈이 기량을 회복하고, 부상까지 겹친데다 그해 1루수로 전향한 최동수의 깜짝 활약까지. 45경기에서 .181 1홈런 3타점으로 다시 예전의 '개털 김선진'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또한 97시즌 종료 후, 그해 프로야구는 갑자기 닥친 경제한파로 인하여 여느 때보다 많은 주전급 선수들이 옷을 벗어야 했으며, LG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전 중견수인 노찬엽까지 방출될 정도였다. 김선진 역시 그해 성적과, 적지 않은 나이로 보았을 때는 퇴출이 유력했다. 하지만, 김선진은 방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구단 측에서 최근 몇 년간 팀에 필요한 플레이를 높게 산 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98시즌 김선진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98년은 그에게 있어 최고의 시즌이었던 것이다.

LG의 98시즌은 사실 그리 밝지는 않았다. 이상훈이 일본에 진출하고, 주전 내야수 송구홍이 해태로 이적한 데 이어, 시즌 개막 직전 주전 1루수 서용빈이 훈련 중 '시즌아웃' 진단을 받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마무리와 3할과 수비를 보장하는 1루수가 빠진 채 시즌에 임해야 했던 것으로, 그해 LG는 전년도 준우승팀으로서는 박한 '중하위권'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LG의 정규시즌 순위는 3위. 김선진이 그 자리를 충실히 메워준 덕이었다. 그는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115경기에 출장, 커리어 최다타수(369)를 기록하고 처음으로 100안타를 돌파하며(104안타) 한때는 3할을 치기도 하는 등 .282 8홈런 46타점 13도루로 활약했다. 비록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상에서 회복된 서용빈에게 또다시 자리를 넘겨줘야 했지만, LG가 좋지 못한 전력으로 한국시리즈까지 갈 기반을 마련해준 시즌이었기에 어느 시즌보다도 행복했다. 만약 김선진이 아니었다면 그 해 LG는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5~6위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소   2001년 LG의 홈개막전에서 김선진이 은퇴식을 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받고 있다

▲ 그동안 수고했소 2001년 LG의 홈개막전에서 김선진이 은퇴식을 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받고 있다 ⓒ 최대우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떠난 그, 아직도 종종 그립다

99년, 서용빈이 병역비리 혐의로 구속되며 LG의 1루 자리는 또다시 비게 되었다. 하지만 김선진의 자리는 없었는데, 그 자리는 케빈 대톨라라는 용병이 꿰찼다. 대톨라의 기량은 함량미달이었지만, 용병을 뽑아놓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그때만 해도 시즌 중 용병교체라는 개념이 낯설었다) 김선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해 LG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며, 김선진은 같이 광주일고를 이끌던 친구 박준태의 퇴장을 보며 '나도 얼마 안남았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시즌, 원 주인이던 서용빈이 2년 만에 돌아오자 34살의 노장이었던 그가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자랑하던 스피드도 나이 때문에 예전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그해 아예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끼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하고 말며, LG는 뒷심부족으로 두산에 패하고 만다. 후반에 마땅한 해결사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김선진이 퇴진한 이후,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전성기 시절이던 90년 중반에는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이병규, 김동수 등 스타플레이어들의 활약상도 있었지만, 김영직, 최훈재, 김선진 같은 조커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런 고속 질주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트윈스를 보면 경기 후반 클러치 상황에서 마땅히 내세울 '조커'가 부족한 상황으로, 그나마 나아졌다고 한 올 시즌에도 김재박 감독은 대타 기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90년대 중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소금 같은 그 이름들이 떠오르며, 특히 김선진은 자칫 '소금 같은 존재'가 아닌 '백색가루 같은 존재'가 될 뻔했던 위기를 스스로 극복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그의 통산성적(11시즌 .258 501안타 33홈런 222타점 83도루)에 비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 '해놓은 것 없이 욕만 먹는다'고 자학하는 선수들에게도 그의 이야기는 용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팬들도 '저 선수 하는게 뭐냐'라고 비난하기보다는 따뜻한 눈길로 봐주길 바란다. 그들도 김선진같이 인생역전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LG 김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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