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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받아들면 어떤 기사부터 읽는가. 톱기사? 아니면 사진기사?

이건 어떤가. '만평(漫評, cartoon)'. 기사가 소설이라면, 만평은 시와도 같다. 촌철살인의 풍자, 절로 살며시 웃음을 짓게 하는 위트. 이것이 한 컷 만평만의 무기다. 시대상의 성격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여 인간, 혹은 사회를 풍자·비판하는 만평은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어 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일간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시사만화와 만평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는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 영국)의 풍자화가 인기를 끌던 18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

 윌리엄 호가스 <매춘부의 편력(the Harlot's Progress)> 연작 중 일부, 1732년
 윌리엄 호가스 <매춘부의 편력(the Harlot's Progress)> 연작 중 일부, 1732년
ⓒ 호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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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Moll)은 시골에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왔다. 하녀 일자리를 구하던 몰은 그녀의 미모를 눈여겨본 한 노파를 만나게 된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소개해줄게."

이렇게 몰은 창녀가 되고 그 때부터 험난한 인생이 시작된다. 감옥에 들어가서 노역을 하는가 하면, 가난에 시달리며 매독에 걸리기도 하고 결국 23세의 나이에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해주는 사람은 동료 매춘부들뿐이다.

[호가스] 20세기 만화의 탄생을 예고한 풍자화

이 작품은 20세기 만화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주인공을 특출한 캐릭터로 부각시키고, 오늘날의 만화에서처럼 글과 그림이 결합된 연작그림 형태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각각 하나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컷을 나눠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이어서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드는 초기 만화의 시초라고 일컬을 만하다.

이 작품이 내세우고 있는 주인공도 파격적이었다. 성스럽고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라, 제목 하롯(Harlot, 고어로 매춘부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문란한 여자였다.

이 작품은 꽤 인기를 끌었나 보다. 호가스는 이 작품의 속편격인 '탕아의 편력'(the Rake's Progress, 1735)을 출간하기도 했고 이후 '매춘부의 편력'의 각 장면에 설명을 달아 고급판을 출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1828년 버전에서는 장면별로 수직으로 열을 지어 인쇄를 해서 주간지 <Bell's Life in London and Sporting Chronicle>에 실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최초의 신문만화'로 불리게 된다.

 1822년부터 1886년까지 간행된 영국의 주간지 <Bell's Life in London and Sporting Chronicle>에 실린 ‘매춘부의 편력’
 1822년부터 1886년까지 간행된 영국의 주간지 <Bell's Life in London and Sporting Chronicle>에 실린 ‘매춘부의 편력’
ⓒ 호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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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들은 연작이든 단일 작품이든 모두 나란히 놓아 차례대로 보게끔 고안되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마치 그림책을 보듯 그의 그림을 쉽게 이해했다. 호가스의 친구인 극작가 필딩이 호가스의 작품을 '화구(畵具)에 의한 소설'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는 호가스도 의도했던 바였다.

"나는 캔버스 위에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상연하는 것 같은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다. 캔버스는 나의 무대이다. 남자와 여자는 나의 배우이고, 이들은 대사 없는 연극을 몸짓과 태도로 연기한다."

그의 그림은 수천 개의 동판화로 찍혀 나갔다. 불법 업자들에 의해 해적판이 만들어지기도 했을 정도다. 미술가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법률, 즉 '호가스법(1735년)'을 만드는 데 그의 작품이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니 호가스의 작품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부유한 후원자 없이도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등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호가스의 붓은 사회 풍자를 하는 데 더욱 날이 바짝 섰다.

윌리엄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中 결혼 직후> 174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돈으로 신분을 산 중산 계층의 여성과 몰락한 가문의 남자 그들의 결혼 생활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 재산취득이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서의 결혼이 '유행'이 될 정도로, 극에 달한 영국사회의 허영을 풍자했다.
▲ 윌리엄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연작 中 결혼 직후> 174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돈으로 신분을 산 중산 계층의 여성과 몰락한 가문의 남자 그들의 결혼 생활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 재산취득이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서의 결혼이 '유행'이 될 정도로, 극에 달한 영국사회의 허영을 풍자했다.
ⓒ 호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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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영국화가들은 왕실과 귀족계급에 의존하고, 유럽대륙의 화가들을 모방하여 성서나 신화에서 그림의 소재를 구했다. 그러나 호가스는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 특권계급으로부터 시민 일반에 이르는 살아있는 인간들,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그렸다.

귀족과 상류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풍자하면서, 사실적인 인간묘사를 추구한 점에서 그는 분명히 '풍자만화의 기본'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도미에] 국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풍자

하지만 호가스의 붓은 권력의 핵심인 국왕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1757년에 왕실화가로 임명될 정도로 국왕에 대한 풍자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프랑스)가 국왕을 어떻게 그려놓았는지 보라.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 도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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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는 1831년 12월에 국왕을 풍자한 가르강튀아(Gargantua)를 발표한다. '가르강튀아'란 풍자 문학가인 프랑수와 라블레가 중세 말기의 봉건주의와 가톨릭 교회를 풍자하기 위해 창조해낸 거인이자 대식가로서 식욕뿐만 아니라 체력·지식욕이 뛰어난 괴물과 같은 사람이다.

도미에는 '가르강튀아'의 이미지를 빌어 당시 프랑스의 왕인 루이 필립을 탐욕스런 가르강튀아로 비유했다. 그리고 루이 필립에게 아첨하고, 수구파를 옹호하는 교활한 정치가와 법관을 가르강튀아의 배설물 주위에 꼬이는 추한 인간 군상으로 표현했다. 당시 왕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기에 왕의 얼굴을 닮은 '서양 배(快果, 배는 바보·멍청이·얼간이를 뜻했다)'로 왕을 대체하였고, 가르강튀아의 혀는 민중을 착취해 제 배를 채우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처럼 묘사했다.

국왕의 입으로 운반되는 금화와 재산은 민중이 피와 땀으로 만든 것이고, 그것은 국왕을 살찌운 뒤에 똥으로 배설된다. 그리고 그 배설물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국회의원들에게 분배된다. 도미에는 이 적나라한 '만화적인' 그림을 통해 당시 지배계급의 부패와 착취를 풍자했다.

도미에는 순수회화로서는 자신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 사회현실, 모순과 그 갈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만화는 대상을 실물 그대로 그리지 않고 과장하여 야단스럽게 그려냄으로써 진실에 다가서고,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짖게 하고 웃게 만드는 힘도 지니고 있다.

도미에는 이 같은 힘을 지닌 만화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로서 정의감을 표현하는데, 그리고 언제나 민중을 생각하면서 권력과 권위를 비판하는데 만화만큼 유력한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도미에는 스무살 무렵 풍자 잡지 <실루엣>에 데생들을 발표하며 초창기 시사 만화가의 대열에 참가했고, 그 뒤 <카리카튀르> <샤리바리>등에서 시사만화를 담당하면서 독자들만이 아니라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29년부터는 일간지에 석판화로 정치풍자화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진실을 직시하고 거침없이 부정을 고발하는 도미에의 통쾌한 이미지들은 대부분이 문맹이던 당시 서민들의 뇌리에 그 어느 칼자국보다도 강력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왕정복고·7월혁명·2월혁명·파리코뮌 등 역사적 사변들이 점점이 박힌 격동의 시공간이었다. 당대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글이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도미에는 만화를 통해 혁명의 변절과 위선, 그리고 모순을 그 어떤 글보다도 정확하게 통찰해내었다. 한 컷 속 그림의 은유는 어떤 언어보다 우리의 직관에 가깝게 다가온다. 바로 그렇기에 도미에는 현상의 뒷면에 자리하고 있는 '진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미에는 당대 권력자들의 초상과 부르주아적 풍속을 비판적 화폭에 담음으로써 예술과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그 시대의 눈 밝은 기록자가 되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정치풍자만화는 소비력을 갖추고 급부상하고 있던 거대한 대중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데 큰 축을 담당했다.

200년 전 민중들은 마치 요즘 독자들이 신문 시사만화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일 <카리카튀르>에 과연 어떤 만평이 실릴까' 매일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당시는 혁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는 '낭만주의의 시대'였고 도미에는 이런 혁명의 역동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만화는 대중의 탄생, 그리고 이성·계몽 등 근대적 가치가 풍미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힘입어 마침내 '풍자만화'로서, 독립된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로츠] 현실을 고발한 '아침5시까지!'

호가스와 도미에로 출발한 '풍자만화'는 20세기에도 이어졌다. 20세기 정치를 가장 신랄하게 풍자한 화가는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 1893~1959, 독일)였다. 그는 "나에게는 이른바 위대한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무용하다. 호가스나 도미에와 같은 사상적인 그림만이 나의 흥미를 끈다"고 말하며 예리한 풍자화에 대해서만 미술로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자신을 진실주의자라고 불렀다.

"진실주의자는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게 한다. 내가 유화나 판화를 그린 것은 이의 신청을 하기 위해서이고 나의 작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세계가 추악하고 병들었으며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로츠의 이 말은 마치 "인간은 그 시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며 화가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 그 역사 자체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미에의 말을 상기시킨다. 

1921년 그로츠는 캐리커처 화집 <지배 계급의 얼굴>을 간행했다. 그중의 하나인 <아침 5시까지!>는 화면을 상하 둘로 나누어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와 그들의 행동을 대비시키는 장치를 통해, 추악한 독일의 현실을 고발하는 그로츠 캐리커처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게오르게 그로츠 <아침 5시까지!>, 1921
 게오르게 그로츠 <아침 5시까지!>, 1921
ⓒ 그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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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화면에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것은 캐리커처의 전통적 수법이나, 하나의 화면을 둘로 나누어 상이한 장면을 그린 것은 그로츠가 처음이었다. 이는 당시 유행한 영화의 몽타주 수법과 같은 정도로 강렬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림 윗부분 4분의 1은 '아침 5시까지' 공장에 가야하는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그 밑에는 '아침 5시까지' 계속된 자본가들의 호사스런 술잔치의 모습이 그려졌다. 노동자들은 왜소하고 허약하나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남녀는 모두 비대하고 완고한 정복욕의 전형으로 그려졌다.

시가를 피우며 고급술을 마시고 여자를 애무하며,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마셔 구토까지 한다. 그들의 주변은 사치품으로 넘친다. 노동자들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그로츠는 속물적인 자본가 사회의 이기주의·독점욕·금전욕·야만성·폭음과 폭식 등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츠의 그림은 비판의 충격성과 파괴성이 대단했다. 비판하고자 하는 상대의 추악함을 격파하는 힘은 그 어떤 캐리커처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긴장감이 너무나 극대화되어서인지 보는 이를 웃어넘기게 하는 여유는 거의 없다. 만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만큼, 유머의 감칠맛과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멋을 동반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풍자이기 때문이다.

풍자만화의 계보를 잇는 누리꾼들

 이라크 전쟁 당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을 패러디한 누리꾼의 포스터.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쟁’과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 마치 클론처럼 똑같다.
 이라크 전쟁 당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을 패러디한 누리꾼의 포스터.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쟁’과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 마치 클론처럼 똑같다.
ⓒ 카피레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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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로츠에게 부족했던 웃음과 여유를 현재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현재, 풍자만화가로서의 계보를 잇고 있는 이는 누리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인터넷 어디를 클릭해 보아도 포토샵을 이용한 엽기 발랄한 패러디와 만평이 넘치고 있다. 마치 전 국민이 시사만화가가 될 것 같이 보일 정도다. 그림에 담긴 촌철살인의 풍자와 위트는 실제로 만평가의 뺨을 칠 정도다.

시사만화의 아버지인 호가스·도미에·그로츠가 지금 인터넷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면 이들을 보며 많이 뿌듯해할 것 같다. 도미에는 말했다.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질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면서 고뇌에 허덕이는 인간의 압박된 정신에, 별안간 나타난 통풍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기지 넘치는 아이디어로 권력을 향해 비수를 꽂는 지금의 누리꾼만큼, 도미에의 말에 잘 부합되는 활동을 하는 이가 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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