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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즉흥성과 탈정형성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연주가들이 만들어낸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 수준과 연주 기량은 빠르게 발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재즈는 '예술'이라는 합당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의 재즈악단인 '킹 앤 카터 재즈 오케스트라.'
 재즈의 즉흥성과 탈정형성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연주가들이 만들어낸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 수준과 연주 기량은 빠르게 발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재즈는 '예술'이라는 합당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의 재즈악단인 '킹 앤 카터 재즈 오케스트라.'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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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 흔히 따라붙는 설명이 있다. '가장 미국적인 음악 형식.' 더 나아가 '가장 미국적인 예술 양식'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사람들이 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금은 미국인들이 나서서 '가장 미국적인 예술'이라고 부르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이 말은 '점잖은' 미국인들에게는 모욕으로 들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즈는 '예술'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의 인식으로는 홍등가나 음침한 댄스홀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춤을 추는 '음란하고 퇴폐적인' 음악일 뿐이었다.

192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시카고>는 당시 재즈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락시(Roxie)는 내연 관계에 있던 한 남성을 살해한 후 체포되지만, 법정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더없이 선량한 여인이었으나, 재즈와 술에 빠지는 바람에 그만…." 그는 결국 무죄로 풀려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해외 파병 미군과 함께 건너간 재즈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이는 '미국적 문화'라기보다는 '미국적 문제'에 가까웠다. 많은 유럽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재즈를 즐기기 시작했지만, 각국 정부는 이 음악의 확산에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시카고>는 재즈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재즈와 술'은 미국을 타락으로 몰아넣는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시카고>는 재즈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재즈와 술'은 미국을 타락으로 몰아넣는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다.
ⓒ The Chicago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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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때문에 수모를 겪은 음악

재즈에 담긴 인종적 함의나 '미국에서 온 음악'이라는 사실도 음악의 '품격'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재즈의 또 다른 문제는 귀보다 몸으로 듣는 음악이라는 데 있었다. 재즈의 원류인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부터 1930~1940년대의 '스윙(Swing)'까지, 재즈는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기 좋은 음악이었다. 물론 혼자 흔들었다면 별 탈 없었을 것이나, 걸핏하면 외간 여자나 외간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류 역사가 입증하듯, 사람들은 무엇이든 교제의 수단과 변명거리로 사용하는 법이다. 돌(보석)이 그랬고, 음식과 술이 그랬으며, 자동차(그 전에는 마차), 공연장(특히 커튼 달린 박스석), 영화관 등 그 어느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재즈가 마련해 준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리하여 재즈는 남녀의 신체를 매개하는 '죄악의 음악'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은 연합군뿐 아니라 재즈와도 싸워야 했다. 괴벨스는 재즈를 '하류 인간의 예술'로 규정하면서 척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독일 치하의 여러 나라에서 재즈가 금지되었으며, 벨기에에서는 '재즈'라는 단어를 간판에 쓰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 수난을 겪었던 음악은 비단 재즈만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베토벤과 바흐 등의 연주가 금지되었고, 공공도서관은 그들의 음반을 폐기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었다. 그 작곡가들이 '독일 국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게 있어 전쟁은 가장 큰 적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정신을 드러내지만, 전쟁은 인간의 삶을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지위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야만의 터에 예술을 위한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연주가 '한미관계=운명' 비유? 선무당 한국 언론

'천박한' 음악으로 비판받던 음악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노예로 팔려와 미국에 재즈 음악을 낳았던 흑인들은 세계대전 중에는 사병으로 파병되어 재즈를 전파했다. 사진은 재즈가 유럽으로 유입되어 토착화한 과정을 기술한 '재즈를 프랑스화하기.'
 '천박한' 음악으로 비판받던 음악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노예로 팔려와 미국에 재즈 음악을 낳았던 흑인들은 세계대전 중에는 사병으로 파병되어 재즈를 전파했다. 사진은 재즈가 유럽으로 유입되어 토착화한 과정을 기술한 '재즈를 프랑스화하기.'
ⓒ Duk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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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제기했던 '국적' 문제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2008년 2월 26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북한의 초청을 받고 평양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다. 이때 연주된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3막 전주곡,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에서>, 거쉰의 <파리의 미국인> 등이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과 음악평론가들은 이 선곡에 담긴 뉴욕필의 (심지어는 미국 정부의) '의도'를 찾기에 부산했다. 이들의 해석을 살피는 것은 평양의 공연 중계를 지켜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해석에 따르면 연주곡들은 '미국적 색채가 짙은 음악'들로서, '명백한 정치적 의도'가 감지되는 '트로이 목마'라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서곡은 '결혼행진곡'에 앞서 연주되는 전주곡으로 결혼이 상징하듯 두 나라의 새로운 출발을 향한 염원을 담았다." (<연합뉴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과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등 미국적 색채가 강했던 평양 공연과는 달리 서울 연주회는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교향곡 5번('운명') 등 모두 베토벤의 작품으로만 구성했다. 평론가들은 "미·북관계가 '신세계'라면 한·미관계는 '운명'에 비유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뉴욕필이 연주하는 이 프로그램들은 '방황하는 미국인'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곡이다. (중략) (드보르작은)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의 민요를 연구해 '신세계에서'라는 자신의 최초이자 마지막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동아일보>)

뉴욕필의 평양 연주는 '미국적 색채를 담은 정치적 코드'지만, 같은 교향악단이 서울에서 연주한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한미관계는 운명이라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만일 드보르작이나 베토벤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 곡들을 연주한 로린 마젤까지도) 머리를 긁어댔을 것이다.

뉴욕필이 북한과 '새로운 출발'을 말하고 싶었다면 왜 <결혼행진곡>을 쓰지 않고 '그에 앞서 연주되는' 서곡을 골랐을까? '한미관계의 운명'을 뜻한다는 베토벤 5번 교향곡의 해석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운명교향곡>이라는 이름은 (베토벤이 죽고 나서 한참 뒤) 일본이 붙인 것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한두 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도 이 교향곡을 '운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드보르작은 뉴욕필의 의뢰를 받고 <신세계에서>를 작곡했지만, 이 곡은 어떠한 '미국적 색채'도 담고 있지 않다. 이 곡이 '아메리칸 인디언과 흑인의 민요'를 담고 있다는 주장은 오래 전 미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드보르작은 이 친절한 해석에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음악은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다"

뉴욕필의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와 음악 이론가를 겸했던 그는 음악에 특정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뉴욕필의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와 음악 이론가를 겸했던 그는 음악에 특정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 DG/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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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뉴욕필을 지휘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에게도 <신세계에서>의 '미국적 특성'은 "신세계"라는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는 뉴욕필의 연주로 <신세계에서>의 한 소절을 들려주고 나서는 이렇게 묻는다.

"이 곡이 여러분들에게는 '신세계'처럼 들립니까? 이것은 '신세계에서'라는 이름이 붙은 교향곡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이름을 붙인 데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번스타인은 악장을 부분별로 쪼개어 들려주며 설명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교향곡에 '미국적 특성'은 없습니다. <신세계에서>가 '미국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음악이 그만큼이나 '체코적,' '독일적,' '프랑스적,' '아프리카적,' '중국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뉴욕필의 평양 공연 '의미'를 치밀하게 분석한 기사들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은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교향곡에 앞서 오페라 서곡을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라든지, <신세계에서>와 <파리의 미국인> 모두 뉴욕필이 초연을 맡아 인연이 깊은 곡들이라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음악이 의미를 담을 수 있는가'라는 소위 '음악 의미론(Music Semantics)'의 문제는 언제나 논란거리였다. 이 분야를 선도하는 이론가였던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음악은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일 뿐입니다(Music is never about anything; music just is)." 음악에 담긴 '의도'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흔히 해석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결과를 낳는다.

흑인 노예의 아픔을 토양 삼아 자라난 재즈

퍼드 모튼(Ferd Morton)은 재즈를 악보로 옮긴 첫 음악가였다. 사진은 1905년에 발간된 그의 악보집 <젤리 롤 블루스>.
 퍼드 모튼(Ferd Morton)은 재즈를 악보로 옮긴 첫 음악가였다. 사진은 1905년에 발간된 그의 악보집 <젤리 롤 블루스>.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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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재즈의 '미국적'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음악이 '의미'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번스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재즈가 '미국적 색채'를 담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된다. 그보다는 이 음악에 독특한 음악적 특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건설적일 것이다.

재즈의 음악적 특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다수가 동의하는 한 가지 특성이 있다. 바로 '즉흥성(improvisation)'이다. 재즈 음악은 항상 달라진다. 같은 작곡자의 곡을 같은 연주자가 연주하는 경우도 매번 다른 음악을 듣게 된다. 물론 어떤 음악이든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미세한 변화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재즈처럼 연주자가 곡을 원하는 대로 늘리거나 줄이고, 갑자기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고전 음악에도 드물게 '루바토(Rubato)'처럼 박자를 연주자 자율에 맡기는 장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목적으로 고안된 형식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재즈의 즉흥성은 탈형식에 가까울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안된 음악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재즈가 즉흥성과 탈형식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된 이유는 초기의 재즈 연주자들이 악보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노예들은 17세기부터 존재했으나, 19세기 말에 대거 루이지애나로 실려 온 아프리카인들은 독특한 문화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노예들은 혹독한 노동과 학대 속에서 곡조를 붙인 한탄이나 노동요로 마음을 달래곤 했으며, 이렇게 형성된 삶 속의 음악은 곧 유럽의 악기와 결합했다. 이들은 악기를 눈대중으로 배웠지만,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다.

재즈는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노예들의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들의 고난을 담은 낮은 곡조의 슬픈 노래는 '블루스'로 발전했으며, 이는 유럽의 악기와 결합해 재즈 음악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1780년에 그려진 흑인 노예의 모습.
 재즈는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노예들의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들의 고난을 담은 낮은 곡조의 슬픈 노래는 '블루스'로 발전했으며, 이는 유럽의 악기와 결합해 재즈 음악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1780년에 그려진 흑인 노예의 모습.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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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재즈 음악은 루이지애나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결합하며 성장했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미국에서 가장 활발한 국제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이 가지고 온 문화적 감수성은 카리브 음악이나 프랑스 문화 등과 결합하며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1910년대경 '고전 재즈'로 불리는 '딕시랜드(Dixieland)'로 체계화되었다.    

이들은 가혹한 인종 차별 속에서도 배움의 기회를 넓혀갔고, 이와 함께 탁월한 연주자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실을 반영하듯, 2차 세계대전 후 1940년대 중반에 재즈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춤 위주의 '스윙'이 사그라지고 뛰어난 연주 기교가 중심이 된 '비밥(Bebop)'이 탄생한 것이다.

복잡한 음을 빠르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다시 절묘하게 시작되는 패턴이 반복되는 '비밥'은 재즈를 '예술'의 영역으로 올려놓았다. 이 새로운 음악적 전통을 토대로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 뉴욕을 중심으로 새로운 재즈 음악이 탄생한다. 좀 더 가볍고 변화 폭이 작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쿨 재즈(Cool Jazz)'가 그것이다.

'가장 미국적 음악' 뒤에 가려진 '가장 미국적 미국인들'

1960년대에 이르러 재즈는 여러 나라의 음악과 결합되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진은 '스탄 게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재즈 음악가 스탠리 가예츠키의 베스트 음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유행했던 '보사노바(Bossa Nova)'를 이끌었던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이다.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삼바와 결합된 재즈 음악을 일컫는다.
 1960년대에 이르러 재즈는 여러 나라의 음악과 결합되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진은 '스탄 게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재즈 음악가 스탠리 가예츠키의 베스트 음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유행했던 '보사노바(Bossa Nova)'를 이끌었던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이다.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삼바와 결합된 재즈 음악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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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역사를 훑어보면 1960년대 이후부터 기록이 희미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재즈의 위기'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 '위기설'이 타당해 보인다. '텔레비전의 황금기'인 1950년대를 거치며 음반을 사는 이들이 줄었고, 새로운 이미지 시대에 걸맞은 엘비스와 비틀즈 등 젊은 스타들의 '로큰롤'이 재즈의 인기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재즈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름의 발전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브라질, 쿠바 등의 라틴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까지 재즈가 확대됨으로써 국가별로 새로운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프리재즈(Free Jazz)'나 '퓨전(Fusion)' 등의 명칭은 이처럼 다양하게 분화되어 체계화하기 어렵게 된 재즈의 지위를 보여준다.

오늘날 재즈는 미국에서 침묵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공간을 채우는 소리가 되었다. 록음악이나 고전음악에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조차 재즈에는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재즈는 어느새 '취향을 타지 않는 음악'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이 사실에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나,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이것은 그리 '당연한' 사실이 아니었다. 

재즈는 '가장 미국적인 음악'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재즈 속에 수많은 아픔과 고통의 목소리가 녹아있다는 사실이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것이다.

재즈를 '가장 미국적인 예술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적어도 그 음악을 가능케 했던 '가장 미국적인 예술가'들과 '가장 미국적인 미국인'들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과거뿐 아니라 이 순간까지도.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음악가 중 한 명인 루이 암스트롱(1901~1971). 독특한 목소리와 탁월한 트럼펫 연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통 합주로 연주되던 재즈에 독주의 새로운 전통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음악가 중 한 명인 루이 암스트롱(1901~1971). 독특한 목소리와 탁월한 트럼펫 연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통 합주로 연주되던 재즈에 독주의 새로운 전통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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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재즈, #뉴욕필, #평양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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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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