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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혜의 이상한 심리

인사동에서 차를 마신 후 얼마 되지 않아 뜻밖에도 나민혜가 김문수의 집을 찾아왔다. 그녀는 돈암동 상춘원에서 가족 모임이 있어 왔다가 들렀다고 했다.

김문수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집을 찾아오신 겁니까?”
“지난번에 말씀하셨잖아요.”

차를 마실 때 그들은 사는 동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민혜와 조순호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지점인 북촌에 산다고 했다. 그들의 동네는 유서 깊은 고급 주택가였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그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았다고 했다.

“김 선생님은 어디 사시는데요?”조순호가 물었을 때 김문수는, “아리랑고개 마루 옆 돌산에서 가장 으리으리하고 좋은 집의 바로 위 조그만 집에서 월세로 삽니다.”라고 대답했었다. 그때 대화는 주로 나민혜와 김문수가 나눴다. 조순호는 가만히 듣는 편이었는데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주 생글거렸다.

김문수는 나민혜의 그림 얘기를 꺼냈다.
“저는 나체는 많이 보았지만 나체 그림은 오늘 처음 봤습니다.”
나민혜가 좀 망설이더니 물었다.
“나체를 많이 봤다고요?”

김문수는 신념에 찬 어조로 그러나 짧게 대답했다.
“네.”
“.......?.”
“큭!”소리를 낸 것은 조순호였다.
“다른 사람 건 못 봤고 제 걸 봤다는 뜻입니다.”
두 여자는 웃었다. 조순호가 나민혜보다 세 배 정도는 길게 웃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나눌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서양미술과 서양음악과 서양문학 등을 화제로 삼았다. 나민혜는 서양화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녀평등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녀는 연애지상주의적인 가치관을 뚜렷이 지니고 있었다.

나민혜와 조순호는 둘 다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세 사람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김문수는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서 귀가했다. 그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제 삼촌에게도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리랑고개를 오를 때에는 이미 환한 보름달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조순호의 얼굴을 흐뭇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랬는데 김문수를 찾아온 것은 뜻밖에도 나민혜였다.

“조순호 씨는 안녕하신가요?”
“명동에 휘가로라는 멋진 다방이 새로 생겼는데 거기 가지 않으시겠어요?”
“다방요?”
“주로 예술인들이 모여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들으며 담소하는 곳이어요.”
“사실은 오늘 저녁에 제 삼촌이 시골에서 오십니다. 그러니 명동은 다음에 갔으면 합니다. 그 때 조순호 씨도 오면 더욱 좋겠고요.”

정릉 산책

명동에 못 가는 대신 두 사람은 정릉에 산책을 가기로 했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되는 곳이었다.

정릉은 한적하고 쓸쓸했다. 가을 느낌이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조락해 있었다. 하지만 김문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나민혜는 우수수 잎들이 질 때마다 작은 탄성 같은 것을 내곤 했다. 그녀에게는 감상적인 면이 있었다.

“무덤의 임자처럼 분위기도 쓸쓸하군요.”

나민혜는 그윽한 눈길로 김문수를 보더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릉에 묻혀 있는 신덕왕후는 비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성계의 계비였는데 그녀에게는 방석과 방번 두 아들이 있었다. 이성계는 방석을 총애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전처소생의 이방원을 경시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방원은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을 죽여 버린 것이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었다.

정릉(貞陵)은 원래 도성 안의 정동에 있었다. 정확히 말해 정릉이 정동에 들어 간 게 아니고 정릉이 있었기에 정동(貞洞)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즉위 5년 만에 서모의 묘를 도성 밖으로 옮겨 버렸다. 도성 안에 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눈치 빠른 대신들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으로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으로 옮긴 겁니다.”

이방원은 정릉을 장식했던 석재를 청계천 광통교 복구공사에 쓰도록 했고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에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그때 옮기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서울 도심에 아름다운 능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김문수는 정말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뒤에 있는 숲에서는 수천 개도 넘는 잎새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민혜는 물끄러미 김문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김문수에 대한 나민혜와 조순호의 느낌은 아주 달랐다. 나민혜는 처음 김문수를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출신의 유학생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나민혜는 시골 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소 비굴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돼먹지 않은 오기밖에는 없는 남자들이었다. 대체로 고학생인 그들이 세련된 예절이나 서구적 교양을 갖추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친구 조순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민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민혜는 김문수가 인사동에 가서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의외로 조순호가 김문수의 제안을 반기는 것 같았다. 평소 그런 류의 제안에 오히려 조순호는 단 한 번도 응해 본 적이 없었다. 조순호는 나민혜가 보기에 괜찮은 남자들의 제안에도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쉬웠던 적도 있는 나민혜였다.

나민혜의 컴플렉스

조순호가 남자들의 그런 제안을 거절할 때에 나민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조순호는 남자들의 제안을 나민혜처럼 매정하거나 불쾌한 기색으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조순호는 언제나 그런 남자들을 무심하고 무연히 대했다. 그녀는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아주 담담하고도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제안을 물리치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순호가 처음으로 낯선 남자의 회동 제안에 흥미를 보인 것이었다. 사실 나민혜로서는 김문수 같은 남자와 차 한 잔 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혹평한 김문수가 그렇게 못난 남자는 아닐 거라는 느낌을 갖고는 있었다. 그래서 딱히 갈 데도 없는 터에 차 한 잔 사게 할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다만 조순호가 보나마나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자기가 먼저 거절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나민혜는 많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고 이목구비가 예뻤다. 게다가 그녀는 미술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 당시 조선에서 몇 안 되는 여류 화가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와 재능에 부합하는 정도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조순호의 집안과는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그녀는 조순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조순호를 볼 때만은 이유 없이 자신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나민혜는 자신의 외모가 조순호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순호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민혜는 이유 없이 조순호에게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나민혜의 외모를 조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반반하다’거나 ‘말짱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나민혜가 조순호에게 알 수 없는 외모 콤플렉스를 갖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조순호에게는 나민혜로서는 가질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외모뿐이 아니었다. 나민혜는 조순호에게 무안을 당할 때가 더러 있었다. 학벌이나 집안이 좋은 남자를 칭찬할 때라든지, 아니면 서구형으로 생긴 어떤 남자의 외모를 말했을 때라든지, 심지어는 이광수 같은 작가의 소설에 감동 받았다는 말을 했을 때였다. 그녀는 번번이 조순호에게서 어떤 낭패감 같은 것을 맛보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조순호는,“그러니?”라고 말하며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그렇구나.”정도가 조순호의 반응이었다.

조순호는 나민혜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민혜의 말을 반박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나민혜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다시 말해 조순호가 나민혜에게 의도적으로 무안을 주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민혜 스스로 무안을 느꼈을 따름이었다.

그런 조순호였다. 나민혜는 조순호가 호감을 갖는 김문수에게 부쩍 관심이 갔다. 조순호가 호감을 갖는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김문수는 나민혜에게 아주 큰 의미를 갖는 남자로 부각되어 버렸다. 사실 김문수는 나름대로 내면의 매력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민혜는 왜 조순호가 김문수에게 호감을 갖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김문수에 대한 나민혜의 욕구는 날로 강해지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 싶은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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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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