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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열기가 이글거렸던 지난 7월 14일,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후문 앞. 한 시각장애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1급 시각장애인 김병식(64)씨의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헌혈의 집. 그가 235번째 헌혈을 하는 날이다. 더운 날씨에 땀이 흘렀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예순을 훌쩍 넘은 시각장애인이 이처럼 꾸준히 헌혈을 하며 생명을 나누게 된 이유가 뭘까?

 

사연의 실타래는 30년 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살배기 셋째 아들을 데리고 저수지로 빨래를 하러갔던 아내는 물가에서 놀던 아이가 물에 빠지자 구하려 물에 들어갔다가 그만 아이와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났다.

 

청천벽력같은 충격에 김씨는 삶의 모든 것을 술에 빠뜨린 채 서너 해를 폐인이 되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너무 힘든 세월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벼랑 끝에서 김씨는 시력마저 점차 잃었다.

 

절망 끝에서 잡은 실낱같은 희망인 남은 두 아이를 위해 김씨를 일으켜 준 것은 종교였다.

방황의 끝무렵,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잠시 다녔을 때 신앙생활에서 받았던 위로가 떠올랐다. 성당에 다니면서 정신적으로 바로 서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점자도 익혔다. 테이프를 들으며 점자를 공부한 지 6개월 만에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고, 성당 내 장애인 기도 모임 '선심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성당 앞에 헌혈차가 와서 서 있었다. 그는 바로 헌혈차에 올랐다. 1988년, 그의 첫 번째 헌혈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헌혈은 20여 년을 이어져오고 있다.

1급 시각장애인인 김씨에게 골목 깊숙이 들어앉은 헌혈의 집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집에서 가까웠던 광천동 헌혈의 집이 없어진 터라 헌혈을 하려면 꽤 먼 거리의 조선대 후문까지 와야 한다. 지금은 헌혈의 집 위치를 꿰뚫고 있어서 꽤 능숙하게 찾곤 하지만, 초기에는 봉사자와 함께 헌혈의 집을 찾기 위해 주변에 물어가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헌혈정년인 65세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은 64세의 김병식씨. 헌혈을 하려면 그의 건강도 중요할 것 같은데, 특별한 건강관리 비법이 있을까?

 

"그럼요. 헌혈도 내가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건강하지 못하면 헌혈도 거부당하거든요. 2주전에 헌혈할 때 검사했던 혈액 검사 결과가 집에 도착했는데, 깨끗하다고 해서 오늘 헌혈하러 왔지요."

 

헌혈왕인 그 역시 몇 차례나 헌혈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 피에 필요한 성분들이 충분하지 못하다며 헌혈할 수 없다고 했단다. 네다섯 번을 방문해서야 겨우 헌혈을 할 수 있었는데, 잘 먹고 잘 쉬며 몸의 상태를 좋게 유지해야만 헌혈도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깨달은 셈이다.

 

전혈은 2개월에 한 번 가능하고, 성분헌혈(혈장)은 2주마다 가능하다. 그의 경우 전혈로 57~58회 정도 헌혈했고, 성분헌혈은 170여 회. 자주할 수 있다고 해서 성분헌혈이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전혈(320cc)에 비해 혈장(500cc)은 더 많은 양을 뽑고 과정도 복잡하기 때문에 헌혈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헌혈은 이제 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남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희망이 되었다.

 

"병원에 가보면, 수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요. 간이 망가진 사람도 있고, 백혈병 환자도 있고…. 헌혈을 하면 기운 빠진다고들 하는데 그것도 밥 한 끼 먹으면 바로 회복되는 정도니까. 건강한 사람들이 헌혈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무엇인가 남기고 가야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 중이라는 김병식 씨. 그는 이미 헌혈을 통해 세상에 많은 생명을 남긴 것이 아닐까. '헌혈정년'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김씨는 또 어떤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시각장애인을 위한 격월간 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8월호 게재
한국점자도서관 기획홍보팀 기자로 취재한 내용입니다.


태그:#시각장애, #헌혈, #김병식, #한국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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