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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광장 남쪽에는 첸먼(前门)이 있다. 황궁 앞을 지키고 선 이 문의 이름은 정양먼(正阳门)이다. 원나라 이래 궁궐 앞, 황궁의 입구인 톈안먼과 정양먼 사이는 행정기관이 있었고 정양먼을 넘어서는 상가 거리가 있었다.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정양먼부터 서민들의 놀이터이던 톈챠오(天桥)까지 큰 대로가 있는데 이를 쳰먼다제(大街)라 한다. 5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리가 오랜 공사를 끝내고 올림픽을 맞아 새롭게 개장했다. 천지가 개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확 바뀐 것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무질서하고 온갖 지저분한 도로였는데 공사 중 장막을 걷어낸 후 찾아갔으니 정말 감개무량하다고 하겠다.

정양먼(쳰먼)과 꽃과 하늘, 멀리 옛 베이징 기차역이 살짝 보인다
 정양먼(쳰먼)과 꽃과 하늘, 멀리 옛 베이징 기차역이 살짝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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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챠오 양쪽으로 옛날 기차와 기찻길이 있다
 정양챠오 양쪽으로 옛날 기차와 기찻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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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을 맞아 새로 단장한 쳰먼다제 거리 본문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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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과 15일 두 번 찾아갔는데 정말 외관 하나는 멋지게 변했다. 이곳이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출발지이니 방송 카메라에서 그림 하나는 제대로 잡힐 것 같다. 다만 거리는 조성됐지만 가게들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아 좀 썰렁한 면이 없지 않다. 정양먼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정양챠오(正阳桥) 패방이 높다랗게 서 있는데 그 모습이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정양먼을 등지고 왼쪽에는 지금은 기차박물관으로 바뀐 옛 베이징 기차역이 있다. 당당처(铛铛车)라 부르는 열차 두 대가 정양챠오 좌우에 각각 철길을 따라 서 있기도 하다. 오른쪽으로 약간 걸어가면 라오서차관(老舍茶馆)이 있다.

올림픽을 맞아 라오베이징 이벤트로 2펀에 다완차 한잔씩 선사하는 쳰먼 라오서차관 앞 모습
 올림픽을 맞아 라오베이징 이벤트로 2펀에 다완차 한잔씩 선사하는 쳰먼 라오서차관 앞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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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서차관의 다완차 본문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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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차관을 갔더니 올림픽을 맞이해 특별 이벤트를 하고 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봤더니 광둥(广东)에서 온 아가씨 몇 명이 다완차(大碗茶)를 마시고 있다. 다완차는 큰 사발그릇에 차를 따라 마시는 것으로 청나라 말기와 민국 초기에 첸먼 거리에서 유행하던 풍습이기도 하다. 2펀(分)으로 차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를 재현한 행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1펀은 1위엔의 10분의 1인 1쟈오(角)의 10분의 1이니 우리 돈으로 1원 50전 정도일 것이니 3원이면 사발에 따라주는 뜨거운 차를 마실 수 있다. 사람들이 1펀의 동전이나 지전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차 값을 받는 아가씨는 '수이볜(随便)', 즉 마음대로 아무 돈이나 통 안에 넣으라고 한다. 올림픽 한가운데에서 '라오얼펀(老二分)'의 가치를 상기해주는 뜨거운 행사가 아닐까 싶다.

정양챠오를 지나니 차 없는 보행거리가 넓게 펼쳐 있다. 길 왼쪽으로 베이징카오야(烤鸭)의 대명사처럼 군림하는 췐쥐더(全聚德)도 완전 탈바꿈했다. 전에는 도로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세계적 유명인사를 비롯 많은 관광객들에게 오리고기를 선사했는데 이제는 당당히 대로 앞으로 나와 있다. 1864년에 개업했으니 백 년이 훌쩍 넘는다. 식당 하나로 시작해 13개의 점포와 4개의 브랜드를 운영하며 주식시장에 상장될 정도로 기업화됐다.

문화거리로 새로 단장한 첸먼다제에서 본 정양챠오와 정양먼(쳰먼)
 문화거리로 새로 단장한 첸먼다제에서 본 정양챠오와 정양먼(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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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은 두이추(都一处)라는 식당이 있다. 아직 가게들이 채 자리를 잡지 못한 가운데 식당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너도 나도 무슨 일인가 하며 모여든다. 만두라 부르는 바오즈(包子)의 일종인 샤오마이(烧麦)를 먹으려는 것이다. 기원이 청나라 건륭(乾隆)제 때인 1738년이니 쳰먼에 와서 맛보는 것 자체가 기념이 된다.

산시(山西)의 진상(晋商)이 개업한 이 식당을 지나다가 길게 줄을 선 백성들을 따라 그 맛을 보고 입이 닳도록 칭찬한 후 친필 편액을 하사한 건륭제 때문에 유명해졌다. 가게 옆에 평복을 하고 붓을 든 황제 조각상이 이곳을 더욱 명불허전으로 만들고 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맛도 보지 못하고 돌아서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황제가 웃으며 바라보는 듯하다.

만두가게 두이추 앞 조각상, 붓을 든 건륭황제가 직접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만두가게 두이추 앞 조각상, 붓을 든 건륭황제가 직접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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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장식하고 곳곳에 벽화를 그려 옛 풍취를 한껏 살렸지만 후통 골목으로 통하는 길을 다 막았다. 두이추 맞은 편으로 다스랄(大栅栏) 거리만 열어둔 채 말이다.

다스랄은 베이징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상권으로 백 년이 넘는 가게들이 수두룩하다. 오래된 전통을 지닌 상품을 라오즈하오(老字号)라는 브랜드를 붙이고 있다. 전국 유명거리마다 '백년라오즈하오'가 넘칠 정도로 많다. 특히 2006년에는 '중화(中华)라오즈하오궁청(工程)'을 진행해 방송으로 대대적인 홍보까지 했다.

라오즈하오 칭호를 받으려면 최소한 50년 이상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전통의 계승과 문화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각 성이나 도시마다 대표적인 라오즈하오가 있고 전국적으로 수백 개가 된다. 하지만 일반가게나 식당들도 스스로 라오즈하오인양 간판을 내걸기도 하는데 이런 것을 다 합하면 수만 개가 될지도 모른다.

다스랄 거리가 올림픽으로 들끓고 있다. 채 열 보가 되지 않는 거리를 꽉 메운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힐 정도다. 입구 왼편에 한 사람은 모자를 들고 또 한 사람은 앉아서 신발 수선을 하는 조각상이 있는데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모자를 든 조각상은 마쥐위엔(马聚源) 점포이고 앉아있는 조각상은 부잉자이(步瀛斋)이다.

마쥐위엔은 1817년에 개업한 모자가게이고 부잉자이는 1858년에 개업한 신발가게다. 지금은 하나로 합병이 돼 한 곳에 함께 있지만 그 브랜드와 역사는 여전히 살아있다. 청나라 고관대작들은 모자에 공작 깃처럼 생긴 붉은 화링(花翎)을 꽂고 다녔는데 바로 마쥐위엔이 만든 홍잉마오(红缨帽)였다.

다스랄 거리에 있는 중화라오즈하오인 마쥐위엔과 부잉자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다스랄 거리에 있는 중화라오즈하오인 마쥐위엔과 부잉자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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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잉자이 역시 당시 왕족이나 귀족 및 고관들이 신던 헝겊신이나 가죽신을 주로 만들었는데 정밀한 수공으로 자수를 놓은 귀한 상품이라 해 '몐화러우(棉花篓)'라 불렸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가게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당시 모습을 잘 살린 그림이 예쁘게 걸려 있는데 당시의 분위기와 명성을 알아 볼 수 있다.

다스랄에는 '머리에는 마쥐위엔를 쓰고, 발로는 네이롄셩을 밟고, 몸에는 바다샹을 두른다(头顶马聚源,脚踩内联升,身穿八大祥)'는 말이 있다. 그만큼 수공예 신발은 부잉자이보다 네이롄셩을 더 높게 평가한다는 말이다.

맹자의 후손이 개업한 중화라오즈하오 비단가게 루이푸샹
 맹자의 후손이 개업한 중화라오즈하오 비단가게 루이푸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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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롄셩은 청나라 함풍(咸丰)제 1853년에 개업했는데 가게 이름의 '내(内)'는 궁궐 안을 뜻하며 '연승(联升)'은 조정의 신발(朝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의 현판은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궈모뤄(郭沫若)가 직접 손으로 쓴 글자체이기도 하다.

바다샹(八大祥)은 모두 '상(祥)'자가 들어가는 8곳의 비단 포목점을 말하는데 산둥 성의 맹자 후손인 맹락천(孟洛川)은 고서에서 '파랑강충이(青蚨)의 피를 돈에 묻히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뜻의 청부환전(青蚨还钱)을 상호에 써서 1893년 다스랄에 루이푸샹(瑞蚨祥)을 열었고 지금까지 명백을 이어오고 있다.

원래 1862년 지난(济南)에서 처음 문을 연 가게인데 톈진을 거쳐 베이징에 분점을 낸 것이다. 또 하나의 바다샹인 쳰샹이(谦祥益)는 해방 이후 성격이 바뀐 채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루이푸샹이 진정한 바다샹으로 유일하게 명성을 잇고 있다.

옛날 분위기 물씬 풍기는 1층 현관을 지나 비단 파는 곳으로 가니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 에어컨이 풍성해 이리저리 알록달록한 비단 옷을 보면서 돌아보는 것도 좋다. 비단이 이렇게 예쁜 줄 미처 몰랐을 정도다.

다스랄에는 그 밖에도 1669년에 문 연 약국 퉁런탕(同仁堂), 1908년에 만든 찻집 장이위엔(张一元)도 한번 가 볼 만하고 1858년 톈진에서 문을 연 만두 브랜드인 거우부리(狗不理) 식당도 이곳에 하나 있다.

거우부리 만두가게 앞에 있는 서태후와 위안스카이 조각상
 거우부리 만두가게 앞에 있는 서태후와 위안스카이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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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우부리는 당시 군벌이던 위안스카이(袁世凯)가 톈진에서 이 만두를 구해 서태후에게 바쳤는데 "그 어떤 음식도 거우부리의 맛에 미치지 않는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서태후의 동상이 이곳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태후 옆에서 만두를 들고 콧수염을 기르고 청나라 복장을 한 위안스카이 표정이 다소 코믹하다.

1905년에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军山)>을 상영한 다관러우(大观楼)는 지금도 영화관으로 성황을 이루는데 입구 옆에 영화 제작자 임경태(任庆泰)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 최초의 영화(정군산) 제작자 임경태 조각상이 있는 다스랄 다관러우 앞 거리
 중국 최초의 영화(정군산) 제작자 임경태 조각상이 있는 다스랄 다관러우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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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랄은 '다자란(大栅栏, da zha lan)'의 베이징 방언 발음이다. 'da shi lan'에 얼화를 섞어 다스랄이 된 것이다. 한자나 중국어 안다고 "대책란 어떻게 가요?"라거나 "다자란전머저우(大栅栏怎么走?)"라며 찾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수도 있다. 그만큼 베이징다운 멋과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었는데 올림픽으로 왁자지껄하고 웅성거리니 정말 숨쉴 구멍조차 없이 복잡하다. 라오베이징다운 멋을 찾으려면 다스랄 사이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더 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베이징 다스랄 문화 및 상업거리 서쪽 입구
 베이징 다스랄 문화 및 상업거리 서쪽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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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이징, #다스랄, #중화라오즈하오, #쳰먼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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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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