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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상의 심각한 국내 소비 침체 속에서 소주·라면·립스틱·콘돔·자전거 등의 판매가 유독 늘었다고 한다. 하나같이 불황을 예감하는 지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말 이 상품들은 불황에 더 강한 것일까? 그렇다면 모두가 불황으로 울고 있을 때, 이들만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속설 1] "불황엔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립스틱이 잘 팔린다?"

불황엔 치마가 짧아진다고 한다. 정말일까? 영화 <고고70> 중에서
 불황엔 치마가 짧아진다고 한다. 정말일까? 영화 <고고70> 중에서
ⓒ 보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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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계에는 오랜 속설이 있다. '불황기일수록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립스틱 판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통계 없이 주로 유통업계 종사자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그야말로 '속설'이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기가 나쁘면 여성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질 것이고, 자연스레 저렴한 비용으로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해주는 립스틱과 미니스커트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황기엔 천 값을 아끼기 위해 치마가 짧아진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영하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미니스커트가 잘 팔릴 리 없고, 실제 매출도 늘지 않았다는 게 백화점 관계자의 전언이다. 게다가 미니스커트가 불경기보다는 호경기에 탄생했다는 점에서 이 속설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립스틱은 어떨까? 경기불황일 때 저가임에도 소비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품이 잘 판매되는 현상을 두고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여성들이 전체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대신 립스틱처럼 작고 저렴한 제품으로 자신을 과시할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특히 빨간색 계통의 립스틱 하나만으로도 화사한 얼굴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한 색상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화장품 업계에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올해 11% 정도 성장한 것을 비롯해 립스틱 등 전체 화장품 시장은 최근 몇 년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인 건 사실이다. 화장품은 필수소비재이기 때문에 다른 산업에 비해 불황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화장품 업체인 (주)아모레퍼시픽 MI팀의 한 관계자는 "불황이기 때문에 립스틱이 더 많이 팔리는 것은 아니다"며 "IMF 외환위기 당시인 97~98년 다른 산업이 마이너스 성장 할 때 우리는 0.5% 성장했다. 불황이어서가 아니라, 트랜드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에 힘입은 탓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립스틱 색깔에 대해서도 "계절과 트랜드의 영향을 받는 것이지, 경기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남성정장 매출이 줄면 불황"이라는 속설은 맞는 듯 하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10월1일부터 11월 11일 현재까지 이 백화점에서 팔린 신사 정장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가량 감소했고, 신세계백화점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신사복 매출이 8.9%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뉴코아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백화점으로 가던 손님이 아울렛으로 많이 온다. 8~9%정도 매출이 상승했다"며 "여성 패션 잡화나 아동복 매출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갑이 가벼워진 주부들이 옷을 살 때 아이 옷을 가장 먼저 사고 남편 옷은 우선 순위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속설 2] "불황엔 소주·라면·담배를 주목하라?"

불황을 상징하는 대표 상품 '라면'.
▲ 라면 불황을 상징하는 대표 상품 '라면'.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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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함께 불황의 지표로 단골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먹을거리다. 특히 오랫동안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소주는 불황 속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대표 상품이다. 진로 참이슬의 경우 지난해 9월 누계 대비 올해 8.1% 증가한 4313만9000상자를 판매해 국민주로서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불황엔 소주 판매량이 늘어난다'는 속설은 있지만, '불황에 맥주가 잘 팔린다'는 속설은 없었다. 그러나 GS25의 10월 맥주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4%나 증가했다. 경기 불황이 본격화 되면서 술집 대신 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라면 판매량도 증가했다. 국내 대표 편의점 업체인 훼미리마트가 10월 한 달동안 전국 매장의 라면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컵라면과 봉지라면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37.8%, 27.9% 증가했다.

굿모닝신한증권은 지난 20일 음식료업종이 경기에 대한 민감도가 낮은 산업이라며 타 업종에 비해 불황기에 투자 매력이 높다고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 불황기에 판매량이 늘어나는 소주와 라면, 담배를 3대 주목할 종목으로 꼽았다. 이들 상품은 97년 외환위기 와 2003년 카드사태 당시에도 소비가 늘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작 라면 업계에서는 라면이 '불황 식품'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다. (주)농심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라면 매출양이 늘기는 했지만, 불황이어서 뜨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70~80년대에는 못 살아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라면을 먹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층이 많지 않다. 지금은 라면이 간편식 개념으로 바뀌어서, 시간이 없을 때, 혹은 입맛이 없을 때 먹는다. 불황이어서 라면이 잘 나가는 게 아니라 꾸준히 소비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불황일 때 다른 상품이 안 팔리니까, 상대적인 개념으로 라면을 보는 것 같다"며 "컵라면의 경우도 여름보다 추운 겨울에 더 많이 팔리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간장 매출이 급증한 것을 두고 "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하는 가정이 늘었기 때문"이라며 불황의 지표로 삼으려고 하지만, 이 역시 신빙성은 떨어진다.

[속설 3] "자전거·콘돔이 잘 팔리면 불황이다?"

요즘 자전거가 뜨고 있다. 삼천리자전거는 이 달 들어 주가가 두 배로 뛰었다.
 요즘 자전거가 뜨고 있다. 삼천리자전거는 이 달 들어 주가가 두 배로 뛰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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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 외에도 여러가지 속설을 동원한 불황의 지표는 많다. 특히 최근 코스닥 시장에서 자전거가 바람몰이를 하며 질주하고 있다. 삼천리자전거는 이달 들어 주가가 두 배로 뛰었다. 삼천리자전거는 외환위기 당시에도 470원대(1998년 12월)의 주가가 2000년 4월 4000원대까지 10배 가까이 치솟은 바 있다.

"불황엔 자전거가 더 잘 팔린다"는 속설이 만들어진 셈이다. 실제 삼천리자전거의 3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8% 늘었다. 경기 침체의 여파로 영업이익이 급감하는 다른 기업들과는 대조적이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콘돔 판매가 증가한다"는 속설이 실제 매출로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 17일 GS리테일에 따르면 전국 3300여개 'GS25' 매장에서 월별 콘돔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경기가 급속하게 냉각되기 시작한 8월부터 콘돔 판매량이 전년대비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1월부터 7월까지 콘돔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5.2% 증가했지만 8월부터 판매가 급증, 11월까지 평균 16.7% 늘었다. 일각에서는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부부들이 출산계획을 늦춰 콘돔의 사용량이 증가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속설 4] "속설에 관심이 고조되는 것 자체가 불황의 시작이다!"

불황의 지표가 되는 속설은 '가벼워진 지갑과 불안한 심리 상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불황기에는 지금 돈이 없고, 또 앞으로 없어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절약형 소비 행태가 보여질 수 밖에 없다"면서 "또 하나는 과거의 추억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한 소비 행태가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경기침체 속에 '1000원' 마케팅이 인기를 누리는 것이나, 새것처럼 수리해 주는 리폼(Reform),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 재생용품을 재충전하는 리필(Refill) 등 이른바 3R 산업에 사람이 몰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불황의 시름을 술로 달래려는 서민들이 늘어나면서 숙취해소제가 덩달아 인기를 얻기도 했다. 온라인쇼핑몰 원어데이가 9월 1일 선보인 숙취해소제는 하루 5600개가 팔렸고,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의 밤을 줄여주는 숙면도우미는 이달 12일 하루 동안 6200개가 팔렸다.

"불황이나 사회적 위기 때 맵고 자극적인 맛이 유행한다"는 속설도 유명하다. 실제 우울하거나 기운이 없을 때 섭취한 매운맛은 엔도르핀(진통효과를 내는 체내 물질)을 분비시켜 '즐거운 통증'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외환위기 때나 카드사태 때 매운맛 음식점이 유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불황으로 생긴 근심과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채 희망을 잃은 서민들이 '대박' 환상에 집착하면서 로또, 카지노, 경마 등 사행성 업체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불황에 도박이 흥한다"는 속설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이동훈 연구원은 "불황기에 어떤 상품의 매출이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불황에 강한 상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며 "원자재가격이 상승해서 전체 매출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통계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속설은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통계적인 착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불황에 카드 매출이 늘어난다"는 속설은 언뜻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지난 3/4분기 카드 매출량이 급격히 늘었다. 이유가 뭘까? 이동훈 연구원은 "사람들이 수중에 현금이 없으니까 작은 지출에도 카드를 쓰게 되는 것"이라며 "불황에 카드 매출이 늘었다는 말의 진의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이어 "자전거의 판매량이 급증한 것은 이번 불황과는 상관없이 건강이나 고유가 문제 때문"이라며 "지금부터 불황이라고 보면, 앞으로 추워질 것이기 때문에 자전거 판매량이 계속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콘돔 판매량이 늘어난 것에 대해서도 "저출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녀 양육비에 대한 시스템 부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일 뿐, 일시적인 불황과는 크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호황' 때는 속설이 없다. 불황 때는 '어떤 식으로 이 난국을 돌파 해볼까'하는 심리 때문에 사람들이 속설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 속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는, 그 자체가 이미 불황이 시작되고 있다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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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불황 속설, #자전거, #콘돔, #라면, #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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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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