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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여대 앞 골목.
 늦은 밤, 여대 앞 골목.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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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앞 골목, 밤이 되면 가로등만 홀로 어두운 길을 밝힌다. 골목을 걷는 여대생의 구두 소리만 그 정적을 깬다.

여대 앞에 혼자 사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음습한 지하방에서 성큼성큼 등장해 여대 앞 어두운 골목을 서성인다.

그 남자의 티셔츠는 항상 목이 늘어나 있으며, 트레이닝복 바지는 무릎 부분이 솟아 있다. 한 손엔 담배, 다른 손엔 라면이나 떡볶이 1인분이 담긴 검은 봉지가 들려 있다. 오늘 따라 경찰차가 골목을 자주 지나다닌다. 그 남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든다.

잘못한 게 없다고? 정말 그럴까? 오늘 그 남자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 '이웃 사람'들이 점점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바로 나, '반지하의 제왕'이다.

조용하다!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여대 앞은 '유토피아'

여대 앞 거리. 항상 활기가 넘친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여대 앞 거리. 항상 활기가 넘친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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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또각 또각'

다시 여대 앞 골목길, 하이힐 소리가 경쾌하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즐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구두 소리가 빨라진다. 소리가 더 경쾌해졌다. 나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진다.

경쾌한 하이힐 소리의 주인공은 전공서적을 한 손에 쥔 여대생이다. 그녀는 뒤를 힐끗 본다.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1초도 안 돼 시선을 정면 상방 15˚로 고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신속하게 골목을 벗어난다.

여대 앞에 사는 나에겐 이런 일이 적잖이 일어난다. 난, 그저 집이 여대 앞이고, 집에 들어가는 것일 뿐인데, 그저 존재만으로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여대 앞 원룸촌만 노리는 남성 범죄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 거시적 이유겠지만. 곰과 흡사한 내 덩치와 당장 산적 알바를 시작해도 충분할 정도로 시커먼 눈썹도 한 몫 한다. 혹자는 말한다. "넌 밤에 보면 눈썹밖에 안 보여."

이런 민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고, 난 여대 앞에 이사 올 때 정말 행복했다. 남중·남고에 '복역'했으며, 대학까지 남성 비율이 높은 '남대'를 다녔기에, 여대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대 앞은 일단 조용해서 좋았다. 남대 앞 고시원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할 때를 생각하면 이곳은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남대 앞은 술 마시고 추태부리는 학생들이 많다. "우웩~"하며 쏟아내는 소리는 주 5회 정도 들을 수 있었고, 혈기 왕성한 이들의 폭력 현장은 주 1회 정도 목격할 수 있었다. 쏟는 소리엔 나도 덩달아 쏠리게 된다.

싸울 땐 파이터의 친구들이 어찌나 말리던지,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이 말이 딱 여기 적용된다. 그냥 한 번 호방하게 붙으면 끝날 걸, 말리는 녀석들 때문에 싸움이 더 길어지고, 소음은 쭉 이어진다.

"지금 이러면 안 되잖아, OO야! 정신 차려, 우리 친구잖아." 이렇게 말리면 파이터들은 괜히 승부욕만 높아진다. 신체 접촉을 못하니, 심한 욕설만 주고받는다. 그리고 10분~20분 지속된다. 정말 시끄럽다. 한 번은 새벽 3시에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참다 못 해, "야! 말리지 마! 그냥 빨리 싸우고 끝내라"고 외치기도 했다(다행히 고시원은 4층이었다).

1000원짜리 우동도 별미다. 해장에 그만이다.
 1000원짜리 우동도 별미다. 해장에 그만이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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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여대생들은 참 조용하다. 술 먹고 싸우길 하나, 구토할 정도로 많이 먹길 하나? 절간이라 해도 손색없다.

게다가 여대 앞엔 맛있고 싼 음식이 정말 많다. 남대 앞에도 물론 싼 음식은 많지만, 분명 맛이 좋은 건 아니다. 그저 양이 많을 뿐이다. 반면, 여대 앞 먹을거리는 종류도 다양하고, 값도 싼데다가, 맛까지 있다. 주말엔 혼자 외식도 한다. 3300원짜리 돈가스는 수프부터 아이스크림까지 풀코스로 즐길 수 있고, 바가지뻥튀기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넣어주는 '뻥 아이스'는 500원이면 먹을 수 있다.

'쪽' 소리가 반지하를 메우면, 내 마음은...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나의 여대 앞 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웃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반지하의 가장 큰 취약점은 소음이다. 길거리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 다 들린다. 물론 이게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바로 연인들의 싸움 소리. 듣다보면 정말 재밌다. 운이 좋다면 이들의 연애사를 전부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잔혹한 소음이다. 여대 앞 원룸촌엔 유독 여대생의 남자친구가 자주 등장한다. 여자친구를 안전히 집까지 데려다 주려는 모양이다. 인적 드문 골목이라 위험하고, 나 같은 놈이 등장하면 지켜줄 사람도 필요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데려다 주는 것까진 좋다. 근데 집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 앞에서 항상 '끈적끈적한 버퍼링'이 시작된다.

"아~ 정말 아쉽다.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돼?"
"아쉽지만, 자기도 집에 얼른 들어가야지."
"잉잉~ 집에 가기 싫다, 오늘밤은 자기랑 헤어지기 싫은데…."

이런 실랑이는 그나마 애교로 봐준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들의 행위는 정말 참을 수 없다.

"그럼, 이제 집에 갈게. 근데 뭐 잊은 거 없어?"
"호호호~ 쪽!"

'쪽' 소리가 반지하방을 메운다. 내 마음은 '허탈감'이 메운다. 이 모든 것들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뭐 잊은 거'를 찾고 집에 바로 들어가는 녀석은 양반이다. 아주 '독한 놈'이 있다.

"너희 집에서 커피 한 잔만 하고 가면 안 될까?"

꼭 커피만 마시고 가라. 죽는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에게 저지른 '대박 민폐'

그 이름만으로도 설렌다. '여자 대학교'
 그 이름만으로도 설렌다. '여자 대학교'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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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에 산지 1년이 지났다. 이제 '여대 앞 주민' 다 됐다. 앞에 여대생이 가고 있으면 알아서 천천히 가거나 그 자리에 멈춘다. 내 방 앞에서 벌이는 연인들의 행위도 모두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로 보게 됐다.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옆집엔 한 청소년이 있다. 이 친구는 가수를 지망하는 듯 하다. 틈만 나면 노래 연습을 한다. 근데 중요한 건 노래를 그리 잘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항상 고음부분에서 속칭 삑사리가 난다. 처음엔 정말 듣기 싫었는데, 이젠 들을 만하다.

이 청소년이 빅뱅의 <마지막 인사>를 부를 때, "비투더 아투더"하면 내가 "뱅뱅"하며 받아칠 정도다. 요즘엔 오히려 이 청소년이 고맙다. 가요 프로그램을 챙겨보지 않아도 최신곡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이 청소년이 웬일로 흘러간 가요를 불렀다. "난 너를 사랑해"라는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다. 청소년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그는 나의 '최신곡 전도사'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최근에 빅뱅이 이문세의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고 한다. 청소년! 미안하다. 오해해서.

며칠 전이었다. 찬 공기를 마시며 검은 점퍼를 입고 반지하 현관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방 냄새를 중시하는 난 절대 집 안에서 흡연을 하지 않는다.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 냄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몇몇 친구 집에 가면 문을 열자마자, 후각을 잃을 수 있다.

시간은 늦은 밤 10시쯤이었다. 대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윗집에 사는 여성이었다. 사실 1년이나 반지하에 살았지만, 난 이 이웃의 얼굴도 모른다. 그저 발소리와 집에 들어올 때 하는 전화 통화 소리로 20대 정도 여성이구나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에 인사도 하고 이웃끼리 통성명이라도 좀 하고 싶었다. 우린 이웃 아닌가.

준비를 하고 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열리자 난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근데, '안녕하세요'의 "안"도 말하기 전에, 이 이웃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 깜짝이야!"

그리고 순식간에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상심도 했다.

저 대문을 열자, 계단 밑에 내가 있었다. 나라도 놀랐을 거다. 사진을 찍기 위해 조명을 사용했다. 사실 굉장히 어둡다.
 저 대문을 열자, 계단 밑에 내가 있었다. 나라도 놀랐을 거다. 사진을 찍기 위해 조명을 사용했다. 사실 굉장히 어둡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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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생각해보니 이웃이 이해된다. 컴컴한 야밤에 컴컴한 놈이 지하방 앞에서 불쑥 서있으니 놀랄 수밖에…. 정말 얼마나 놀랐을까? 난 이웃에게 '대박 민폐'를 저지르고 말았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난 이웃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아파트 5층에 살던 나는 3층 친구에게 놀러가고 1층 친구도 자주 만났다. 어머니들끼리도 친해서 종종 아파트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했다. 집들이 돌아가며 식사 초대를 하기도 했다.

지금 난, 이웃의 얼굴도 모른다. 이웃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잠재적 위험요소일 뿐이다. 얼마 전에 시골에서 맛있는 호박고구마가 도착했다. 봉지에 몇 개 싸들고 윗집 문을 한 번 두드려 봐야겠다.

"저 반지하 사는 총각인데요, 저 나쁜 놈 아니에요. 이 고구마 맛있는데, 한 번 드셔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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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지하, #이웃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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