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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온 '옥탑방 여자(이유하)'와 '반지하 남자(김귀현)'가 있습니다. 푸른 꿈을 품고 서울에 왔지만, 이들의 자취생활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밥 먹는 것부터 빨래하는 것까지, 자취경력 일천한 이들에겐 모든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생생한 자취 이야기를 기사로 만나보세요. 매주 1~2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이 집이 아주 터가 좋아요, 다들 성공해서 나가더라고. 이전에 살았던 아가씨도 결혼해서 나가는 거라니깐."

상냥했다.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다정다감'? 그간 들어왔던 악명높은 '주인님'의 모습과 달랐다.

"이건 뭐 엄마보다 더 심해, 술 먹고 들어오면 막 혼내고…, 시끄럽다고 친구도 못 데려오게 한다니깐."
"주인집 할머니가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없는 사이 자주 들어오시더라고. 얼마나 찝찝하던지…."

상처받은 세입자들이 묘사한 주인님의 모습이다. 많은 세입자들이 주인님과의 불화로 정든 집을 떠나곤 했다.

우리 주인님은 달랐다. 인자한 인상에 다정한 말투. 타지 살면서 외로울 땐 아버지 삼아도 되겠다 싶었다.

단번에 계약했다. 회사에서 퇴근한, 캄캄한 밤이었다. 가격도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 상냥한 주인님에게 끌렸다. "반지하지만 1층 같은 반지하예요"라는 주인님의 말도 믿었다. 입주 후 처음 맞은 아침, 빛이 화장실에만 들어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해가 중천에 떠있다는 정오지만 난 아직 바깥 날씨를 모르겠다. 시계만 '12'를 가리키고 있다. 집안 풍경은 정오나 자정이나 똑같다.

반지하 방에서 '히키코모리' 되다

물 한 방울 쓰지 않아도, 수도세는 정찰가 5000원이다.
 물 한 방울 쓰지 않아도, 수도세는 정찰가 5000원이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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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날 잘 보듬어 주리라 믿었던 주인집 아저씨는 의외로 나에게 별 관심이 없으셨다. 주인님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 애타는 마음으로 주인님을 기다렸지만, 주인님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내 방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주인님은 수도세를 받기위해 찾아오신다. N분의 1이라며 한 달에 5000원씩 받아가신다. 수도세의 개념이 없는 나는 "왜 이리 비싸지?"하면서도 꼬박꼬박 냈다. 뭐 마땅히 반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자취생활 선배인 친구의 아픈 과거까지 생각났다.

"수도세가 좀 비싼 거 같아서 고지서를 보여달라고 하니까, '어른 말 못 믿는 버릇없는 놈'이라며 막 혼을 내시더라고. 그래서 그냥 냈지 뭐."

군소리 없이 냈지만, 괜히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뭔가 복수(?)하고 싶었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물을 마구 썼다. '어차피 많이 써도 두 달에 1만원만 내면 되는데'하며, 물을 물쓰듯 썼다. 이내 어리석은 생각이라 깨닫고 다시 아껴 썼지만 말이다.

수도세 낼 때만 만나는 주인님, 그 모습은 의외로 냉랭했다. 계약 당시의 상냥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수도세, 5000원" 주인님의 말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건, 내가 평일엔 집에 잘 없으니 주말에 주로 찾아오신다는 것이고, 그 시간이 매우 이른 시간이란 것이다. 게다가 우리집은 초인종이 없어서, 문을 쾅쾅 두드려야 한다. 수도세를 내야할 즈음의 주말이면 "쿵쾅 쿵쾅"하는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한 달에 한두 번 뵙는 주인님이 그 때만큼은 정말 미워진다. 아버지 삼는다느니 이런 거 다 취소다.

얼마 전엔 정말 참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굉장히 달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간밤에 케이블 TV에서 <용의주도 미스신>을 봤다. 그 잔상이 남았던지, 꿈에 '한예슬'이 나온 것이다. 만나서 밥도 먹고 데이트도 했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순간, 한예슬과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그 때 들리는 '산통 깨는' 소리, "쿵쾅 쿵쾅!", 아! 이번 달 수도세를 아직 안 냈구나.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문을 가열 차게 두드리시는 주인님부터, 수도세를 부과한 구청 수도과, 한국수자원공사까지.

결국 한예슬과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고, 난 허탈한 마음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주인님을 맞이해야 했다. 한예슬의 눈 대신 주인님의 눈을 마주친 순간, 내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알량한 복수심이 또 불타올랐다. 다음 달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김없이 주인님은 문을 두드렸다. 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모드에 돌입했다. 집에 없는 척 했단 얘기다. 한참 문을 두드리시던 주인님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셨다. 물론 다음 번 방문 땐 죄송한 마음에 바로 튀어 나가 수도세를 드렸지만 말이다("그 땐 정말 죄송했어요 주인님").

비데 해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수도세 말고도 주인님의 방문 목적은 또 있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겠지만 가끔 '정화조 청소 비용'을 받으러 오신다. 뭐 쉬운 말로 풀어 쓰면 'X 푸는 비용'을 받아가신다는 말이다.

초보 자취생이라 '이런 것도 돈을 따로 내야 하나' 의심이 들었다. 근데 뭘 어쩌겠나. 내라면 내야지. 사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적게 싸지도 않았다. 막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푸는 비용은 1만원, 미련없이 냈다.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회사에 '룰루랄라 비데'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엔 여자 화장실에만 설치돼서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지만, 사장님의 거침없는 배려로 남자 화장실에도 이내 설치되었다. 

회사에 설치된 비데. 비데를 알게 된 후, 난 다시 태어났다.
 회사에 설치된 비데. 비데를 알게 된 후, 난 다시 태어났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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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반으로 나누자면 '비데를 모르던 날들'과 '비데를 알게 된 날들'로 구분하고 싶다. '컬쳐 쇼크'이자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엉덩이에서 춤추는 따스한 물줄기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그간 수십 장 필요했던 휴지는 그저 한 장이면 충분했다. 가끔 일이 안 풀린다 싶을 땐 '마사지'가 모든 시름을 날려주었다. 

비데가 회사에 들어오자 우리집에 있는 변기가 굉장히 못나 보였다. "니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니"라며 괜한 투정부리기 일쑤였다.

회사에서 모든 관련 '업무'를 해결했다. 집에서 신호가 오면? 참았다. 매일 아침,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아찔한 쾌락'을 위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퇴근 무렵 신호가 올 것 같으면 퇴근을 미뤘다.

집에서 해결하는 횟수는 급격히 줄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면 많이 사용한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쿵쾅 쿵쾅"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을 열었다.

"정화조 청소했거든, 1만원."

역시나 주인님은 간결했다. 1만원을 요구했다. 근데 난, 갑자기 억울해졌다. 난 배 아픈 거 참아가면서 회사에서 해결한 사람이다. 근데 1만원이나 내야 한다니. 정말 억울하고 서러웠다.

"주인님, 전 만원어치 안 쌌거든요."

이 말을 과연 했을까 안 했을까? '정답은 다음 주에 공개 합니다'라고 해도 기다릴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으니 바로 공개하겠다.

안 했다. 내가 어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겠는가.

'난 '세입자'일 뿐이고, 지금 지갑에서 1만원 꺼내고 있고, 단지 X을 만원어치 안 쌌을 뿐이고!'

부쩍 무뚝뚝해지신 주인님. 돈 받으러 오실 때만 뵙는 주인님이지만, 그래도 난 우리 주인님이 좋다. 다른 악명 높으신 주인님에 비하면 천사다. 돈만 제때 내면 아무 트러블 없이 지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반지하에 잔류해 '반지하의 제왕'으로 남을 것인가, 떠나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볼 것인가, 결전의 시간이 왔다.

"이집에 들어오면 다 성공해서 나간다"더니 난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펀드도 반 토막 났고, 그다지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반지하 세입자 성공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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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지하, #수도세, #정화조, #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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