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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안재홍, 그는 건준 부위원장을 하다 건준의 좌익 성향에 반발하여 탈퇴한 우익 인사였다. 그는 일찍이 임시정부의 모태였던 동제사 출신이었다. 그는 식민지 시절 세 차례나 투옥된 경험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는 등 세속적 성취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8자 수염을 한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비서 한 명과 수행원 둘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장준하는 그를 2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응접실 왼쪽 소파에 몸을 붙이고 앉아 좀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었다. 그는 말할 적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는데, 그것은 그의 습관인 것 같았다.

장준하는 그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 민족 진영과 계급 진영의 대립으로 나라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럽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혼란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격화시키고 있습니다. 혼란 수습을 위해 임시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임시정부에는 법통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시바삐 집정해야 합니다.”

김구는 차분히 안재홍의 말을 경청하더니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임정 각료들, 그리고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겠소. 다만 총 단결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소.”

허헌과 함께 나타난 이강국

마지막으로 허헌, 그는 인민공화국 국무총리를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식민지 시절 민족 변호사의 명성을 얻은 독립운동가였다. 3·1운동 대표 33인의 불기소 이유서를 올려 이름을 얻은 그는 신간회를 주도했고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다 투옥되면서 변호사 일제에 의해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은 일부였고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라고 알고 있었다. 훗날 그는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한다.

허헌은 단정한 복장에 용의주도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장준하는 그를 수행하고 온 인물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고, 장형. 나 이강국이오.”

동경 숭문학사에서 강의할 때 장준하의 신랄한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주었던 이강국이었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여기 계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오겠소? 지금이라도 알아보시는 것이 다행이지요.”

장준하는 그가 임주호를 극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런 장준하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가 임주호의 소식을 물었다.

“임주호 군은 지금 무엇 하는지요?”
“얼마 전 한 번 만났습니다. 엄청나게 독서를 하고 있더군요.”
“역시 그다운 삶이오.”

김구가 응접실로 들어와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었다.

허헌은 인민공화국의 조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민공화국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전국적 조직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장준하는 허헌의 말을 번호를 매겨 순서대로 요약했다.

1.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렸으나 너무 늦어져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인민공화국을 조직했습니다.
2.이 조직은 전국 대표 55인이 중심인 비교적 탄탄한 조직입니다.
3.그러니 김구 선생께서 들어오셔서 지도해 주시면 저는 백지 상태에서 받들겠습니다.

김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임정 요인들이 전부 귀국한 것도 아니니 앞으로 잘 생각해 봅시다.”

허헌과 이강국은 일어났다. 장준하는 이강국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임주호 군이 한 번 같이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 때 꼭 다시 만납시다.”

그 이후로도 장준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임시정부가 독립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미국의 태도는 임정과 김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신탁 통치 찬반을 놓고 좌우익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김구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허헌의 인민공화국이 삼각 대립의 각을 갈수록 첨예화하고 있었다.

새로이 태동하는 냉전 질서, 아무도 알지 못하다

와중에 송진우와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송은 우익 인사였고 여는 중도에서 약간 좌로 기운 듯해 보이는 인사였다. 누가 왜 그들을 죽였을까? 장준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정치에서 발을 빼고 못했던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강국이건 장준하건, 그들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박헌영이나 김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속성과 방법론에 어두웠고, 새로이 태동하고 있는 냉전 질서에는 아예 생각조차 미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순수한 열정과 실천력을 지니고 있는 지도자였을 따름이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만난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등은‘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른바 카이로선언이었다. 이어 그들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다시 만난다. 사실 세 나라 중에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가장 적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말했다.

“전후 한국은 외국군이 주둔하지 않는 가운데 신탁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최소 20년 내지 30년은 받아야 그 나라는 독립국가가 될 능력이 생길 겁니다.”
“신탁통치는 짧을수록 좋지요.”

루스벨트가 이렇게도 한국에 대해 무지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인사들의 불성실이나 무능력에도 그 책임이 있는 것이었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은 한국을 그 나라의 지도층에게 알리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중국의 장개석은 말할 것도 없이 스탈린도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을 빨리 받아내고 싶었던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조속히 연합군에 가담해 대일전에 임해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스탈린은 러일전쟁으로 제정러시아가 입은 피해를 전부 회복함은 물론 일본에 상응하는 손해를 추가로 주고 싶었다. 그래서 홋카이도 분할 점령을 인정해 달라고 말했다. 루스벨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참전하겠다고 지연작전을 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영토를 본토 4개 섬으로 제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확인했다. 그러나 웬 일인지 루수벨트의 후임인 트루먼 역시 한국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게다가 그는 만주 관동군 소탕에 미국 군인의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본토에서 항복한다고 해도 관동군은 저항할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큰 힘을 한 번 보여주면 과거야 어떻든 무조건 복종하게 되는 일본인들의 특수한 속성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에게 빨리 참전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얼마 후 트루먼은 홋카이도를 넘겨주면서까지 소련의 참전을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원자폭탄이 완성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탈린은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자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칫하면 전승국의 이권을 하나도 챙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대일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사실 해방 정국에서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기울였던 통일 조국의 독립 달성은 이 시점에서부터 빗나가고 있었다. 트루먼은 홋카이도 대신 소련을 달래면서 관동군의 무장해제도 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에게 ‘한반도 38선 이북의 군대 점령을 용인한다.’는 방침을 8·15 직전에 통고했던 것이다.

이는 이른바 분할 점령 방침이 확정된 것을 의미한다. 소련은 즉각 북한에 군대를 보냈고, 미국 극동 사령관 맥아더는 9월 2일에 38선 분할 점령을 공식으로 발표한다. 아무튼 이것은 미국이 일찍이 카스라 테프트 밀약으로 한반도를 일본에 넘긴 이래, 이번에는 한반도의 절반을 소련에게 넘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만큼 미국은 한국인을 우습게 안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분단을 최종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분단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분단이 아니라 독식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가급적 연말까지 끝내기 위해 연재 원고 분량이 다소 많을 수도 있습니다.



태그:#루스벨트, #스탈린, #38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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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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