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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호는 스크랩북을 꺼내 펼쳤다. 그때 호텔 직원이 노크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더니, 보드카를 더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동아일보 기사의 신문 스크랩입니다."

그는 연필로 기사들을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1945년 12월 1일 : 해방 후 동아일보 첫 발간.
1945년 12월 16일 : '미· 영· 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 논의.'

"이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논의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외국 신문에서 확인한 바로는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미·소·영·중 4개국 신탁통치를 5년간, 그리고 필요하면 5년 더 연장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4개국 대표가 전권을 행사하고 한국인은 행정관, 고문관의 자격으로 참여시키자는 안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 현저히 유리하고 소련에 불리한 안이며 특히 조선에는 해로운 제안이었습니다. 영국과 중국은 미국과 가까우므로 소련에게 불리한 것이고, 단일 통일 정부 수립의 언급이 전혀 없이 한국인을 정권의 하부 구조에 편입시킨다는 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한편 소련은 이 기간에 조선정부를 수립,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4개국은 단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원조를 하는 등 후견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탁통치 기간도 5년 이내로 못 박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합의는 대체적으로 소련의 제안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소련의 안이 명분에서 앞섰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소련의 속셈은 달랐습니다. 종전 일주일 전에 전쟁에 참여한 소련은 미국에 비해 전승국의 기득권을 주장할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명분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독립운동 세력이 사회주의에 더 많았고 그들의 조직력이 더 강하니 한국에 자율권을 주면 친소 정권을 세우기에 더 유리하다고 본 듯합니다."

임주호는 동아일보의 다음 기사를 가리켰다.

1945년 12월 24일 : '소련이 청진과 원산에 특별 이권 요구'
1945년 12월 25일 : '소련이 대일 참전의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 한다.'

"이 두 보도는 제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외국 신문에도 이런 기사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의 자작 기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기사는 소련에 대한 적대 감정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1945년 12월 26일 : '이승만, 방송에서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하고 있다고 시사'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개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부 장관은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명하나….(후략)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아니,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이 소련이 아니고 미국이라는 이 기사가 오보라는 것입니까?"

장준하가 묻자 이강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오보지요."

임주호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저는 오보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번에는 이강국이 임주호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주호는 말을 이었다.

"이 기사의 출처를 보십시오. 미국의 모 통신사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무엇입니까?"

송진우와 여운형의 암살 배후

장준하의 질문에 임주호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장형은 송진우 선생을 좋게 생각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했던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을 겸손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을 총으로 쏜 세력은 좌익이라고 여기고 계시겠군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단순 이치로는…."

"그럼 여운형을 죽인 것은 우익이라는 단순 이치도 나오겠군요."
"나는 자세히 모르는 일이오."

"송진우는 1945년 12월 28일에 암살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의 얼굴이었습니다. 김성수로는 안 되었지요.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김성수의 이면을 알고 있습니다. 송진우는, '신탁통치는 힘을 가진 자들의 요구이니 현실적 계산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군정과 대화하는 가운데, 평화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암살되었습니다. 다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말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기사는 사실과 다른 왜곡 보도입니다. 이것이 왜곡 보도인지 사장인 송진우가 몰랐을까요?"

이강국과 장준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임주호는 다음 기사를 연필로 가리켰다.

"이 기사는 송진우가 죽은 다음 날 것입니다."

1945년 12월 28일 : '소련의 조선 신탁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 봉화'

"동아일보는 신탁통치가 소련의 주장으로 결정된 것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소련의 제안에 있었던 조선인 임시정부 구성은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임주호는 이강국에게 물었다.

"이 선생님, 최근 북에서도 테러가 많았지요?"
"그렇습니다."

모두가 허망한 몸부림일 뿐…

"공산당수 한준혁이 총에 맞아 죽었고, 46년 3월 1일에는 김일성이 평양역에서 수류탄 공격을 받았고요, 그의 외척 집이 폭파되기도 했지요.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논의된 암살의 배후는 모두 우익입니다. 아니 그들은 우익도 아니지요. 극우 파시스트란 점에서 일본 군부 집단과 닮은꼴입니다.

암살이나 테러를 당한 사람들은 모두 신탁통치에 찬성하거나 반탁 운동에 회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반탁운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단이 되더라도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반공 냉전 세력과 친일 세력이 결탁하여 벌이는 굿판입니다. 여기에 왜 김구가 선봉이 되어 나서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분단이 고착된다면 김구의 임시정부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당시 외국 저널리즘의 보도를 상세히 읽고 분석했습니다. 동아일보와 같은 기사는 외국의 신문 잡지 어느 것에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동아일보의 그 기사는 오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보가 아니라 음모 수준의 창작입니다.

반면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합의해 준 미 국무장관 번즈는, 소련과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렸습니다. 번즈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탄핵하는 세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미군정을 지지하는 냉전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이해가 맞아 떨어진 친일 세력은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자처한 것입니다. 김성수의 동아일보 세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미군정에 우호적인 남한의 신문들입니다. 그들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하려 한다는 기사로 연일 대서특필했습니다.

결국 심각한 은폐와 왜곡과 조작의 진상은 철저히 감춰졌습니다. 다만 최초의 순간에 사건의 진상을 잘못 전달받은 조선 민중과 임시정부는 조급한 독립 열망으로 이승만이 깃발을 올린 반탁 시위에 노도처럼 휩쓸리고 만 것입니다. 

거대한 음모의 먹구름이 한반도의 하늘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명백히 말해서 반탁 운동도 그 일부입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온 날 조선호텔로 맨 먼저 찾아간 사람은 동아일보의 사주와 사장인 김성수와 송진우였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즉각 돈암장을 이승만에게 제공했습니다. 언제나 음모는 점조직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 일련의 테러 세력과 반탁 세력이 직접 내통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천은 하나입니다. 분단은 공룡처럼 힘 센 강대국이 벌이는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려면 철저하고 확실히 해야 하는데 이미 민족의 역량이 결집될 시기를 놓쳐 버렸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김구나 박헌영의 목숨도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우애로써 말씀드립니다. 지금의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시고 새로운 삶을 사시다가 기회를 보아 조국을 위해 다시 일하십시오.

지금은 너무 위험합니다. 비관적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조선은 미구에 분단될 것이며 양쪽은 미· 소에 종속될 것입니다. 현재 북한은 전기와 지하자원밖에 없습니다. 남한은 소비 공업과 식량뿐입니다. 분단되어서는 당분간 자립 경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종속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미국과 소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다 한들 그것은 다 허망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신탁통치, #송진우,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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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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