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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립대 글쓰기본부에서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담당했던 라성일 씨. 라 씨는 “글을 쓰는 목적은 현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글쓰기 가치는 바로 공동체 이익에 기여하는 사회적 선의 실현에 있다"고 강조했다.
▲ "글쓰기 목적은 사회문제 해결" 뉴욕 주립대 글쓰기본부에서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담당했던 라성일 씨. 라 씨는 “글을 쓰는 목적은 현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글쓰기 가치는 바로 공동체 이익에 기여하는 사회적 선의 실현에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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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목적은 현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글쓰기 가치는 바로 공동체 이익에 기여하는 사회적 선을 실현하는 일에 있다는 말입니다. 필자는 그가 지금 맞이한 현실 상황에서 글감을 찾겠지만 글쓰는 행위 자체는 궁극적으로 공동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로 사회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겠다는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글쓰기 철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문 선진국인 미국 대학에는 글쓰기본부(Writing Center)와 ‘글쓰기학과(작문·수사학과)’가 있다. 국내 대학과는 달리 미국 대학은 글쓰기본부와 글쓰기학과를 따로 둘 정도로 작문 교육을 중요시한다. 모든 학문의 성패가 논리를 정연하게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욕 주립대 작문·수사학과(Composition and Rhetorical Studies)에서 영어 문체학(Stylistics)을 전공한 라성일씨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미국 글쓰기교육 전문가다. 라씨는 뉴욕 주립대 글쓰기본부에서 학부·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지도하다 현재는 한국의 글쓰기 관련 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하면서 글쓰기 이론을 전파하고 있다.

2003년에는 미국 글쓰기본부 연합체에서 ‘대학 학제 간 글쓰기 수업(Writing Across the Curriculum:WAC) 부문’의 글쓰기 도우미에게 수여하는 편집자상(Editor of the Year)을 받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학생이 이런 상을 받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작문·수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글쓰기본부나 교육 대학원에서 주당 약 9시간 학부나 대학원생들의 보고서와 논문 작성을 지도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미대 대학원 교수 요청으로 19세기 영국 미술사 관련 학술지 창간 작업을 돕고 국제 학술지 편집, 공학 관련 영어 학술지(IEEE 등) 편집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라성일씨가 미국으로 글쓰기 유학을 떠난 것은 지난 2002년. 부모 지원없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겠다고 결심한 라 씨는 매년 입학원서와 장학금 신청서를 미국 각 대학교에 보냈으나, 외국인 학생에게 학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학교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유학 준비에 4년이나 걸렸다. 결국 장마처럼 지리한 세월을 기다리던 중 이미 두 차례나 지원했던 뉴욕 주립대에 마지막으로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라씨가 지원했던 작문학과는 3~5쪽 분량의 학업계획서를 요구했다. 라씨는 이와 별도로 27장 분량의 논문 형식 글을 작성해 우편으로 보냈다. 비원어민의 영어 작문이 원어민의 시선이라는 심리적 실체와 마주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 교정 대상으로 변모하는지를 설명하는 논문이었다. 여성 누드화의 제작과 소비 과정에서 어떻게 남성의 시선이 여성 육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한 영국 출신 미술 평론가 존 버거를 인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존 버거는 독특한 시각과 문체, 글의 구조로 라씨가 경탄해 마지 않는 학자다.

미국 보스톤 근교 UMASS대학교 글쓰기본부(Writing Center)에서 글쓰기 도우미(오른쪽)가 중국 유학생이 쓴 글을 1대1로 검토해 주는 장면.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는 교내에 글쓰기본부나 의사소통본부를 두어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한다.
▲ "이렇게 고쳐 보면 어떨까요?" 미국 보스톤 근교 UMASS대학교 글쓰기본부(Writing Center)에서 글쓰기 도우미(오른쪽)가 중국 유학생이 쓴 글을 1대1로 검토해 주는 장면.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는 교내에 글쓰기본부나 의사소통본부를 두어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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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가 조금 지나지 않아 당시 뉴욕주립대 작문학과에서 작가와 문체를 강의하던 영문학과 학과장에게서 입학을 허가한다는 꿈 같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도 기뻐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죠. 뉴욕주립대 글쓰기본부에서 근무하는 강의 조교로 지원하지 않겠냐는 제안도 함께 들어왔죠. 두 학기 글쓰기 강사 교육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학비와 생활비를 면제받는 최고의 조건이었습니다.”

2002년 가을 학기에 석사 과정으로 입학한 라씨는 논문 지도 교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학위 논문을 8개월 만에 완성하고 1년 만에 졸업했다. 글쓰기 강사들은 매 학기 3학점에 해당하는 글쓰기본부 개설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는 모두 졸업 이수 학점에 반영되므로 조기 졸업이 가능했다. 여기서 라성일 씨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현지 학생들도 매 학기 학습 부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라씨는 유학 준비로 보낸 시간을 만회하려고 낯선 환경에서도 전공 서적과 글쓰기 연구에만 몰두한 끝에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라성일씨가 ‘작문학(Composition Studies)’이라는 전공을 선택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국내 대학에서는 학부 전공이 영문학이었는데, 당시는 번역 열정과 지루함, 문학 비평의 정교함과 산만함, 그리고 흔히 MIT 언어학으로 유명한 노엄 촘스키의 정치적 열정 등에 압도돼 있었어요. 이런 난삽한 주제들을 포기하지도 지속할 수도 없는 정체 지점에서 작문학을 만났죠.”

라씨는 “결국 작문학으로 불안한 영혼이 구원을 받은 셈”이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라성일씨는 “글쓰기 지도방법을 알려면 뉴욕주립대 글쓰기본부 이용 절차를 알아야 한다”면서 미국의 글쓰기 교육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우선 글쓰기가 힘겨운 학생들은 글쓰기본부를 방문하거나 인터넷, 전화로 사전 예약을 한 뒤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약할 때에 전공, 수강과목, 작성 중인 보고서 연구주제, 도움받고 싶은 문제점을 기록한다. 이 때 학생이 작성 중인 보고서를 첨부해야 한다. 이렇게 접수한 자료를 글쓰기본부 직원들이 수시로 확인한다.

그 다음 직원들과 글쓰기 도우미들이 협의하여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 글쓰기 도우미를 배정한다. 이들은 해당 보고서를 미리 읽으면서 구체적인 제안 사항을 작성해 학생에게 조언한다. 글쓰기 도우미들은 글쓰기본부를 찾은 학생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상담과 토론을 하면서 문제점을 함께 해결한다.

라성일씨에 따르면 미국 글쓰기본부는 대학 교육을 보조하는 ‘공간’이나 ‘건물’의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 교육의 정교한 ‘교수 방법론’ 내지는 ‘교육 철학’에 근접하는 개념이다.  20세기 이전 미국 대학의 글쓰기 교육은 별도의 건물이 아닌 대학 내 교실에서 진행했다.  이를 ‘클래스 포맷(Class Format)’이라고 하는데, 주로 철자나 문법 오류를 범한 학생들은 일종의 방과 후 보충 수업에 차출돼 교사․교수와 일대일 상담을 하여 오류를 교정했다. 그런데 이 교수법은 학생 글에 나타난 오류를 단순한 규칙의 준수나 위반으로만 파악하는 획일적인 방법을 쓰는 바람에 실험실 방식(Laboratory Method)으로 통했다. 글쓰기 문제를 마치 어떤 규칙을 적용해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에서 오직 철자나 문장 교정에 집중하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마치 실험실 과학자가 감염 부위 세균을 살균 처리해 그 감염인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다수에게 전하고 그것을 공유하던 시절이었다. 글쓰기본부를 과거에는 라이팅 랩(Writing Lab)이나 라이팅 클리닉(Writing Clinic)으로 불렀던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클래스 포맷’을 갈아치우고 상당 부분 현대 글쓰기본부의 선례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34년 미네소타 주립대와 아이오와 주립대가 독자적인 글쓰기본부 건물을 설립한 것이다. 하지만 대학 건물을 세우는 작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대학이 정교한 작문 교수법을 실행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네소타 주립대 글쓰기본부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담당 교수를 도와 학부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하는 글쓰기도우미 제도를 도입했다. 그 교육 대상도 작문이나 문법상 오류를 자주 범하는 학생(remedial writers)에서 전체 학생으로 확대했다. 무엇보다도 작문의 최종 결과물에 드러나는 문제점에만 치중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작성하는 보고서 진행 상황에 맞춰 과정별로 글쓰기 지도를 했다는 점이다.

한편 오늘날 미국 대학의 장점으로 꼽히는 일명 ‘교수 개별 지도(Individual Conference:IC)’ 제도를 처음 도입한 곳도 바로 미네소타 주립대의 ‘라이팅 랩’이다. 이것은 해당 교과목 교수가 직접 글쓰기 과정을 지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해당 교수는 전공 지식만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 학생 스스로 관련 주제를 한 편의 글로 완성할 수 있도록 방과 후에 개인별로 전공 관련 글쓰기를 지도해야 한다. 미네소타 주립대는 이런 방식의 지도를 의무적으로 하게 한 것이다.

“1983년 조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가 시카고 대학에 ‘The Little Red Schoolhouse’라는 명칭으로 본격적인 글쓰기본부 전략을 구상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작업이 바로 미네소타 주립대 ‘라이팅 랩’에서 비롯한 교수 개별 지도(Individual Conference:IC)를 혁신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교수들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존 제도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고 보고 개선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원로 교수들까지 포함하는 글쓰기 인턴(Writing Interns) 제도를 추진했는데, 이는 교수 개별 지도를 진행하는 시카고 대학의 교수들을 상대로 최근의 작문 연구와 작문 교수법 성과를 심도있게 재교육하자는 제안이었죠. 초기 진통에도 불구하고 정작 라이팅 인턴 제도에 참여했던 교수들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이것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의 난해한 글쓰기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호워드 벡커(Howard Becker) 교수도 바로 이 재교육 과정의 참여자이며 수혜자입니다.”

라성일씨에 따르면 하버드대 글쓰기 교육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 미국 대학의 글쓰기본부는 교육 경쟁력을 최고 자부심으로 자처하는 미국 대학들이 1980년대 이후 대학 개혁이라는 거대한 실험 과정에서 최선책으로 선택한 교육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왜 글쓰기 지도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일까. 원론적으로 글쓰기 교육은 왜 중요할까.

“작문 연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러시아 철학자로 비고스키(Lev Vygotsky)를 예로 들어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고와 언어 문제를 파고 들었던 비고스키는 분석(analysis)과 종합(synthesis)이라는 성인의 지적 발달 과정에 접근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꼽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독자와 상호 작용을 하면서 완성하는 사회적 성격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저 단순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70년 중반 미국의 작문 연구는 비고스키 철학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라성일씨는 오늘날 미국 대학의 작문 교육은 "Writing To Learn(WTL)"이라는 용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글쓰기본부 전략이나 대학의 학제 간 글쓰기 과정(Writing Across the Curriculum)은 모두 이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이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전공 과목이나 주제의 깊이 있는 이해와 적용은 오직 해당 주제를 글로 쓰는 과정에서만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필자는 홀로 고독하게 글을 쓰기보다는 전문적인 이해와 기술을 갖춘 글쓰기 협조자(supporter, collaborator)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게 좋다. 그래야 좀더 체계적으로 지식도 습득하고 글쓰기 역량을 갖출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연구 사례가 있지만 하버드대 낸시 서머스 교수가 주도한 ‘신입생 작문교육 연구’가 가장 인상적입니다. 1997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그들이 졸업하던 2001년까지 학부생 약 1,600명이 참여한 이 연구에서 낸시 서머스 교수는 ‘학부생들의 글쓰기와 그들의 학업 능력 간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특히 전체 신입생의 25%인 약 400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글쓰기를 활용하여 해당 전공이나 주제를 더 잘 이해했으며, 전공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수업에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수업 뒤에도 그 과목에 관련한 문제의식이나 새로운 주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됐다고 대답했죠.”

미국 보스톤 부르클라인 고등학교의 한 학생이 영어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글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 글은 육필로 쓴 초고이고, 왼쪽은 담당 교사의 첨삭지도를 받은 뒤에 컴퓨터 워드로 고쳐 쓴 글이다.
▲ "제 글 어때요?" 미국 보스톤 부르클라인 고등학교의 한 학생이 영어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글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 글은 육필로 쓴 초고이고, 왼쪽은 담당 교사의 첨삭지도를 받은 뒤에 컴퓨터 워드로 고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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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글쓰기 과제가 없이 단지 시험으로만 평가하는 수업보다는 글쓰기 과제까지 준 어려운 과목일수록 수업 만족도가 더 크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은 2001년 신입생을 시작으로 그들이 졸업하는 2005년까지 제2기 연구를 마무리한 바 있다.

라성일 씨와 면접 취재(인터뷰)를 하면서 미국의 앞서가는 글쓰기 교육 과정을 접한 기자는 단기적인 입시 위주로 유행하는 국내 논술 교육 현실이 떠올랐다. 다음은 라성일 씨에게 들어본 미국 대학의 글쓰기 교육 현황.

- 미국 뉴욕주립대 글쓰기본부는 어떻게 운영하는가?
"뉴욕 주립대에는 작문학과와 독서학과가 대학원 과정에 개설되어 있다. 두 학과는 글쓰기본부 운영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두 학과와 글쓰기본부는 주로 학부생들의 글쓰기를 전담한다. 글쓰기본부 소속 직원들과 교사 교육은 물론 각 학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교육도 작문학과와 독서학과가 주도한다. 매년 대학 도서관과 각 단과 건물에는 특정 장르(학위 논문에서 학술 논문은 물론, 기말 보고서 작성 등)의 글쓰기 특강 일정을 ‘워크 숍’이나 ‘세미나’란 제목으로 공지한다. 글 형식 외에 다양한 주제의 독서, 작문 특강을 개설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서 난관(‘The Writer's Block’)에 부딪히는 원인과 해결방법, 문학 글쓰기 특강, 과학 글쓰기와 문체, 글의 교정 전략, 전공별 참고문헌 작성법 및 외국인 신입생들을 위한 영어 학술문서 특강 등을 공개강의 형식으로 제공한다. 이는 대부분 글쓰기본부 직원이나 교사들이 진행한다. 이런 공개강의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자기 글을 미리 제출한 뒤 전문가 평가도 받을 수도 있다.

한편 복잡한 글쓰기 과제를 요구하는 일부 전공 수업에는 해당 교수 외에 전공 관련 대학원생들과 별도의 글쓰기 도우미들이 투입된다. 교수는 강의만 하고 대학원생 3~4명이 방과 후 전공 내용을 확인한다. 글쓰기 관련 문제는 해당 수업을 보조하는 글쓰기 도우미들이 진도나 과제별로 검토한다."

- 대학원에서는 어떻게 글쓰기 지도를 하나.
"뉴욕주립대 대학원 글쓰기 과정은 이 두 학과 외에 각 단과대학 및 전공 그룹별로 독자적인 교과과정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공학대학, 조형․예술대학과 같은 단과대학 차원은 물론 다양한 학과를 아우르는 전공 그룹별로 글쓰기 조언과 상담을 한다.

대학원의 경우 ‘라이팅 프로페셔널즈(Writing Professionals)’라는 독특한 직급이 있다. 이들은 주로 전공 분야의 석사나 박사 학위 소지자로 관련 전공 대학원생들의 학기말 논문이나 국제 학술지 작성 및 전략을 지도하는 글쓰기본부 직원들이다. 주로 정식 채용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경우 일종의 시간 강사(part-time lecturer)로 자원하기도 한다. 해박한 전공 지식 못지 않게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인정받아 채용됐기에 본격적인 국제 학술지나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들이다. 하버드나 MIT가 바로 이 전문 글쓰기 강사들의 채용에 가장 열의를 보여왔다."

- 뉴욕주립대 글쓰기본부에서는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나?
"학생 자신의 문제점은 학생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보고서에 나타난 문제점을 글쓰기 도우미가 직접 구체적인 용어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 글쓰기 도우미가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보면서 서로 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암시법을 사용해야만 한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스스로 찾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글쓰기 교육 본부. 하버드대의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은 'Expository Writing Program(논증적 글쓰기)'으로 부른다. 하버드대는 이 기관과는 별로 글쓰기 본부(Writing Program)를 두고 있다.
▲ 하버드대 글쓰기교육 본부 미국 하버드대의 글쓰기 교육 본부. 하버드대의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은 'Expository Writing Program(논증적 글쓰기)'으로 부른다. 하버드대는 이 기관과는 별로 글쓰기 본부(Writing Program)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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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같은 지도 과정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달라.
"영문과 학생 논문의 서론 첫 문장이 ‘The purpose of this analysis is to…’라고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목적 진술문(purpose statement)이 서론 초두에 나오는 구성은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기 쉽다. 이 경우 글쓰기 도우미는 학생의 서론 구성과 대비하는 다른 학부생의 유사 논문이나 혹은 글쓰기본부에 비치한 기존 논문을 보여주며 서론 내의 서로 다른 목적 진술문 위치에 주목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글의 결론부에서 다시 진술하는 목적 진술문은 왜 서론과 달리 결론의 첫 문장으로 등장하는지, 그리고 왜 시제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를 달리 표현하는지를 ‘설득(persuasion)’ 차원에서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서론의 목적 진술문 위치는 전공마다 다를 수 있고, 동일 분야에서도 그 위치를 달리할 수 있다. 이는 논문 형식상 특정 진술문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반면, 필자는 자신의 목적에 비춰 바로 그 특정 진술문의 위치를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의도적인 개입(intervention) 현상이라고 한다. 곧 필자는 규칙에 근거해서만 글을 쓸 수는 없다. 그 규칙에 적응하면서도 글의 목적이나 독자 성격에 따라서 늘 수사학적인 선택(rhetorical choices)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쓰기 도우미는 목적 진술문으로 서론을 시작하지 말라는 ‘규범적(prescriptive)’ 지시 대신, 일종의 발견법(heuristics)을 통해 학생과 상담하면서 글을 교정한다. 마찬가지로 해당 학생은 목적 진술문 위치가 왜 서론과 결론에서 서로 다른지를 수사적 차원에서 고민할 수 있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 논문이나 관련 자료를 직접 찾아 확인하면서 점차 능동적인(자기 주도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발견법으로서 글쓰기 지도는 한계가 뚜렷하다. 교사와 학생이 협력하면서 해당 문제를 우회적으로 진단하고 이를 수정하는 작업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요하기 마련이다."

-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도 많았을텐데.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 대학의 글쓰기본부 연합체는 지난 20년에 걸쳐 실로 다양하고 구체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그 한 예로 글쓰기 도우미는 본격적으로 상담하기 전에 학생 글을 그가 작성한 문제 요소에 비춰 꼼꼼히 읽어나가며 문제 원인을 확인하고 이를 다시 질문으로 재작성해 돌려보낸다. 글쓰기본부에서 상담하기 전 학생은 글쓰기 도우미가 제시한 해당 질문을 주의 깊게 읽고 답변을 준비한 상황에서 글쓰기 도우미를 만난다. 그 다음 해당 질문지를 토대로 대화와 토론을 하면서 상담한다. 이런 질문지 사용법은 상담 시간 제약을 극복하는 데 유리하다. 그밖에도 상담과 교정 전략이 다양하게 있다."

- 뉴욕주립대 글쓰기본부 글쓰기 도우미를 하면서 느꼈던 보람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첫 학기에 미술사와 미술 전시학을 전공하는 일본 대학원생들 논문을 검토하면서 이들과 글쓰기본부에서 상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당시 만났던 일본인 학생들이 작성한 영어 문장은 그 자체로는 매우 정확하고 유창했지만 정작 단락 연결방식이나 글 전체의 일관성은 상당히 위축돼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요일마다 미대 전시관에서 별도로 만나 함께 보고서 수정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이 대학원생들이 이 사실을 담당 미대 대학원 과목의 어느 교수에게 알렸다.

당시 이들을 지도하던 담당 교수가 개인적으로 나를 자신의 연구실에 초청한 적이 있다. 현재는 캐나다 요크(York) 대학 교수로 일하는 데이비드 라셈(David Latham)이라는 영문학  교수다. 그의 제의로 ‘라파엘 전파 연구(The Journal of Pre-Raphaelite Studies)’라는 신생 학술지 편집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이 학술지 편집장이었다. 이 분야의 유명한 교수나 연구가들이 정기적으로 학술 논문을 투고했는데, 이 와중에 미국 해체 비평의 거장인 힐리스 밀러(Hillis Miller)는 물론 영국 미술사의 대가들(W. Fredeman이나 J. Kestner) 논문 일부를 직접 편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조심스럽다보니 일방적으로 논문 수정을 지시하기보다는 이들의 논문 일부 문장이나 단락을 내가 수정하고 이들에게 원문과 수정안을 다시 보내 허락을 구하는 방식으로 했다.  이 중 일부 교수들은 왜 그렇게 수정했는지를 다시 묻는 메일을 보내면서 그 근거나 수정 기준을 요구했는데 당시 내 전공 수업인 문체 연구의 사례를 들어 수정 원칙을 설명했다. 일부 교수들은 장난삼아 “문체학을 배우면 자신도 소설가가 될 수 있냐”고 질문하면서도 결국 내 수정안을 전부 수용했다. 비록 논문 전체가 아닌 일부에 해당하지만 권위자들의 틈에 끼어서도 결국 편집자로서 내 목소리를 반영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 미국 글쓰기교육을 깊이 있게 학문적으로 연구한 교수들로 누구를 꼽을 수 있나?
"앞서 언급한 하버드대의 낸시 서머스(Nancy Sommers) 교수를 들 수 있다. 서머스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쓰면서 ‘유능한 필자들은 작문 교재에서 소개하는 획일적인 작문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서머스는 바로 그 차이를 분석하기 위해 필자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험적으로 분석했다. 결국 서머스의 박사 학위 논문은 유능한 필자와 초보 필자의 작문 과정을 비교한 것인데, 초보 필자가 문장 수준에서 글을 고쳐나가는 반면 유능한 필자는 독자의 개념, 필자의 의도 및 구성과 같은 상위 차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평가하는 교사는 학생의 완성된 글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진행하는 과정에 개입해 글쓴이의 의도, 글의 구성과 같은 복잡한 지적 개념들을 어떻게 적용하여 글을 쓰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보스톤 하버드대학교 지하철역 인근 서점에 있는 글쓰기 서적 코너.
 미국 보스톤 하버드대학교 지하철역 인근 서점에 있는 글쓰기 서적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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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학자는 없나.
"낸시 서머스와 유사한 연구를 진행한 학자로 린다 플라워(L. Flower)를 들 수 있다. 작문 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둘 다 일치하지만 린다 플라워의 경우 카네기 멜론 대학의 인지 심리학자인 잔 헤이즈(J. Hayes)와 공동 연구로 좀더 정교한 작문 모델을 제안했다. 글쓰기란 자신이 생각하고 아는 바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란 기존 통념을 비판하면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지식을 문제 삼게 하고, 기존 지식을 재구성하게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명료한 사고에서 명료한 글이 나오지만, 이것 못지 않게 명료하게 글을 쓰는 과정에서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역설의 가능성을 주장한 것이다. 바로 글쓰기를 하면서 필자 지식이나 의식을 재구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심리학적인 연구는 다분히 미국 문화의 일부로서, 그들의 필요성에 부합하는 연구 결과이지, 비원어민의 현실을 고려한 포괄적인 연구의 성과물은 아니다. 2006년 미시건 대학에서 은퇴한 잔 스웨일즈(J. Swales)는 이런 미국적 현실과 마주하는 비원어민의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고민했던 학자다. 비원어민이 고민하는 글쓰기 문제는 주로 구성(organization)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구성 전략이야말로 문화권마다 독특하게 발전해 온 사고 방식에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흔히 장르 연구로 통칭하는 그의 연구는 글쓰기의 심리적 과정과 정교한 세부 전략을 마련한 낸시 서머스나 린다 플라워의 성과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탠포드 대학 글쓰기본부 소장인 안드레아 런스포드(Andrea Lunsford)를 들 수 있다. 동료 연구가들과 함께 서구 수사학의 전통에서 미국의 작문 역사를 검토했던 안드레아 런스포드는 흔히 글쓰기의 철학을 대변하는 작문 철학자다."

- 미국에서도 연방정부의 교육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경우가 많나.
"정책 결정자의 속단에 집단으로 저항하는 목소리는 미국 교육 현장에 늘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2005년 미국 SAT 출제 기관인 대학위원회(College Board)의 독단에 맞서 미국 영어교사 협회와 하버드, MIT 등 주요 대학이 강경하게 맞선 것이다.

2005년에 대학위원회는 예비 대학생들의 작문 능력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입학 전형에 반영할 수 있도록 SAT에 엣세이(Essay Writing)라는 새로운 시험 유형을 포함했다. 그 구성과 형식은 현행 TOEFL 시험의 일부인 TWE(Test of the Written English)와 매우 유사하다. 일방적으로 수험생들이 주제문을 받으면, 제한된 시간(25분)에 약 5개 정도 단락을 만들면서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한 편의 글을 서론-본론-결론 형태로 작성하도록 돼 있다. 당시 대학위원회는 이 작문 시험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언론에 홍보했다.

그런데 그 발표를 하자 미국 학부모들과 영어 교사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결국 한 달이 채 안 돼 전미 영어교사 협회는 당시 스탠포드대 교육학과 교수인 아네타 볼(Arnetha Ball)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여기에 저명한 작문 교육의 대가(L. Christense, R. Haswell 등)들과 중․고등학교의 작문 교사들이 가세해 대학위원회 발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반박 성명문을 제출했다. 전미 영어 교사 협의회는 대학위원회가 새로운 작문 시험을 추가한 사실을 두고, 이는 미국 교육 개혁의 노력을 100년 전 수준으로 후퇴시키자는 제안이라며, 각 대학의 입학 관리 위원회가 해당 시험 결과를 입학 사정에 반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전미 영어교사 협회가 이 시험 도입 취지를 반박하고, 미국 글쓰기 교육을 대변하는 하버드와 MIT의 수장들이 이 논쟁에 적극 가담하면서 파장은 더욱 증폭됐다. MIT에서 과학과 글쓰기를 강의하며 MIT 글쓰기본부 설립을 주도했던 페렐만(Perelman) 교수는 뉴욕 타임즈 논평에서 대학위원회가 추가한 엣세이는 결국 고등학생들로 하여금 조잡한 작문 습관에 길들게 할 뿐이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하버드 대학의 학부 글쓰기 과정을 총괄하는 낸시 서머스는 대학위원회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이런 시험을 추가하는 것이 교육자나 정책 결정자로서는 너무 ‘염치없는(wretched)’ 발상이라고 몰아붙였다. 이와 더불어 일선 교사들의 비난과 학부모들의 냉소도 연일 나왔다. 그런데도 대학위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후 새로 추가한 작문시험 문제점은 전문가만이 아닌 일선 교사들의 논평까지 덧붙여 다양한 언론 매체에 상세히 소개되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의 글을 검토하는 시간이 불과 2분에서 5분으로 제한되며 이도 단 한번 읽어서 점수를 주게 돼 있고, 글에 반영된 사실 관계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으며 5개의 단락을 중심으로 소주제문-뒷받침문장들(Topic Sentence-Supporting Details) 방식으로 가급적 길게 쓰면 쓸수록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대학위원회는 결국 SAT에 작문 시험을 추가한 NEW SAT 시험을 강행했다. 하지만 2007년 미국 교육 통계 본부에 의하면 극소수 대학만이 이 시험 성적의 결과를 전형에 반영하고 있다."


태그:#미국 글쓰기, #논술, #작문, #글쓰기센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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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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