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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도 단정 수립 기도를...

이강국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민족의 분단을 막는 일을 자기의 소명으로 알고 있었다.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하던 그는 미 군정청의 수배를 받게 되자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 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정 수립 기도는 남한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소련의 지시를 받아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강국은 남로당의 간부였다. 김일성의 북로당은 노동법 전문가이고 외국어에 능통한 그에게 외무국장의 직책을 맡겼다.

이강국은 북로당의 단정 수립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그는 북로당의 여러 정책에 문제를 제기했다. 김일성의 부하들은 그에게 부르주아의 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에서 미군정에 소련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처럼 북로당에는 미국을 배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다가 그는 당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직위 해제되었다. 당은 그에게 3개월 동안 감옥에서 자아비판을 하라고 명령했다. 김일성은 감옥에서 나온 그를 다시 남한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로당 재건의 책임을 맡겼다. 박헌영의 남로당은 이미 미군정과 이승만의 탄압으로 궤멸 상태에 있었다.

"나는 남조선 정부와 미군 정보기관에서 현상금을 걸고 수배한 사람이야. 내가 수임이를 함부로 만나게 되면 수임이까지 프락치로 몰리게 되어 있어. 그래도 한 번 수임이를 보고 싶었어. 딱 한 번만 보려고 했던 거지. 이제 수임이를 보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알았으니 됐어."

이강국은 피곤한 듯 발을 뻗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열 번을 쳤는지 열한 번을 쳤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강국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이제 일어나지."
"이 밤에 어딜요?"
"바래다주마. 오늘 이후로 우리는 만나면 안 돼."

김수임은 왈칵 눈물이 솟았다.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베어드와 살림을 차린 것은 제가 정말 원했던 일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결혼 수속을 한 것도 아니고요."
"그럼 무엇이지?"

"윤숙 언니의 집요한 설득에 그만 넘어갔어요. 북으로 간 이강국은 절대 돌아올 리가 없다고 했어요."

나윤숙의 이름을 들은 이강국의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다.

"옛날 독서회 추억이 있어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려 했는데, 나윤숙이는 요즘 해도 너무 하더군."

갑자기 이강국의 입에서 험한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년은 일제의 갈보에서 미제의 갈보로 변신했어."

김수임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잠시 흐느끼다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선생님, 갈보는 저예요."

이강국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제의 갈보는 저라구요. 하지만 선생님만 떠나지 않는다면 저는 모든 것 다 포기할 수도 있어요."
"수임이는 절대 갈보가 아니야. 너는 천성이 착한 여자지."

김수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국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오늘은 호텔에 가서 함께 지내자."

두 사람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수임은 차가운 홍릉 골짜기의 공기를 쐬며 눈과 볼에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이강국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번민이나 가책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강국뿐임을 다시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들도 구구절절이 옳다고 느꼈다.

"수임아,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어서는 안 돼. 일본에 당한 설움도 가시지 않은 터에 이제 민족이 갈라진다면 그것은 식민지 못지않은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지금 미· 소 강대국은 우리 동족끼리 원수가 되기를 강요하고 있어. 우리는 투쟁으로 이를 물리칠 수밖에 없어. 한쪽 정부라도 빨리 만들어 권력을 쥐려는 이승만과 김일성은 민족에게 천추의 죄를 짓는 것임을 알아야 해."

갈대 같은 김수임, 그녀의 번뇌와 선택이 시사하는 것

그날 밤 이강국의 말은 모두 정당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런 이강국을 사랑하는 자신의 행동에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문제는 이강국이 떠나자마자 그녀의 마음에 가책과 동요가 생긴다는 데에 있었다. 이강국과 헤어진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윤숙을 찾아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나윤숙의 집에서 함께 점심을 지어 먹었다.

"너 베어드와 무슨 일이 생긴 거니?"

나윤숙이 김수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베어드는 일본에 출장 갔다고 했잖아."

나윤숙은 김수임의 국그릇을 밥그릇의 오른쪽으로 옮겨 놓아주었다.

"사실은 언니…."

나윤숙은 고개를 번쩍 쳐들어 다시 김수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강국 선생이 왔어."

나윤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강국은 지금 남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원하는 바는 뭐니?"
"모든 것 포기하고 이강국 선생을 따라가고 싶어."

"수임아 냉정해야 해. 지금 베어드를 버릴 수는 없잖아.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도리라는 것도 있는 거야. 게다가 이강국 선생은 신의를 일단 버린 사람이야. 사랑한다면 너를 그렇게 오래 혼자 놓아 둘 수는 없는 거지. 너의 잘못은 없어. 그 사람이 너무 늦게 온 거야."

나윤숙은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김수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김수임도 눈물을 닦으며 나윤숙의 말에 동의했다. 나윤숙은 군정청에 전화를 걸어 베어드의 운전병을 불렀다. 김수임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베어드는 예쁜 선물 꾸러미들을 들고 집에 왔다.

"수임, 성탄을 혼자 지내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이렇게 금방 돌아와 주셨잖아요."

베어드는 맥아더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여자 시계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고른 선물이오."

베어드는 음반을 꺼내더니 전축 옆으로 갔다. 음반에서는 빙크로스비의 노래가 울려 나왔다. 굵고도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베어드는 "이번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찬송가를 같이 듣고 싶소"하며 판을 찾아 바꿔 놓았다. 전축에서는 김수임이 어려서부터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울려나왔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네/ 나 홀로 다시 방황할 리 전혀 없으니/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7,8회 더 연재된 후 막을 내립니다.



태그:#김수임, #단정수립,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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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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