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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독서회를 다시 해보고 싶었는데...

이강국과 헤어진 임주호는 장준하를 만나러 갔다. 장준하는 후암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잡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준하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금이었다.

"장형 오늘 이강국 선생을 만나고 왔소."
"아니, 그 이가 아직도 남한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건강이 많이 상해 있더군요."
"참, 임형 대단합니다."

"무엇이 대단하다는 거요?"
"위험한 줄 알면서도 만난 것 말이오."

"장형 같으면 옛 친구가 어려워 만나자는데 회피할 수 있단 말이오?"

장준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도 옛 친구가 어려워 만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모두를 한 자리에 초대하여 만나겠다는 희망을 이제 버렸습니다. 이강국, 나윤숙, 장준하, 그리고 내 누나 임수경과 나윤숙의 후배 김수임까지 모두 모여 옛날식 독서회를 해보고 싶었는데…."

임주호는 쓸쓸히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지갑에서 수표를 꺼냈다.

"장형, 이것은 장형이 만드는 잡지 평생 구독료를 미리 내는 것이니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장준하는 수표의 금액을 보고 놀랐다.

"임형, 이 돈이면 임형은 잡지의 발행인이 되어야 하는 수준입니다."
"잘 알잖소. 나는 수학 공부를 하고 싶어요."

"임형 식사나 같이 하고 가요."
"중국집에 가서 내가 배갈 먹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임주호는 배갈 세 병을 혼자 비웠다.

이강국, 김수임에게 구원을 청하다

한편 이강국의 북행은 번번이 차질이 빚어졌다. 북에서 보냈다는 사람은 이강국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이강국은 김수임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듣기만 하세요. 절대 홍릉으로는 가지 마시고 하루만 잘 견딘 후에 내일 오전 11시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김수임은 지하 파티장에 있는 골방을 청소했다. 그녀는 방에 이불을 갖다 놓고 불을 넣었다. 다음 날 이강국은 핏기 없는 얼굴로 그녀의 집 대문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강국을 지하 골방으로 안내했다.

신문에서는 이강국의 행방을 놓고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지하에 숨었다는 신문도 있었고 산을 타고 벌써 북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기사도 있었다. 김수임은 세끼 밥과 신문과 책을 골방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내려가 이강국의 약을 챙겼다. 그녀는 파티장의 전축을 옮겨와 음악을 틀어주기도 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이강국의 병세는 몰라보게 호전되었다.

"아무래도 남한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 혼자라도 먼저 보내드려야겠군요. 군정이 완전히 철수하면 다시 오시기로 하고 먼저 가세요."

김수임은 눈물로 붉어진 눈자위를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강국은 말없이 그녀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김수임의 발상은 대담했다. 그녀는 남한에서 아무런 검문이나 의심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미군정 차량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베어드의 관용차를 타고 다녀봐서 안 사실이었다.

김수임은 베어드에게 말했다.

"개성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이 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서울에서 의사 한 분을 모시고 다녀와야 할까 봐요."

김수임은 그 순간 정말로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어디가 편찮으시대?"
"폐에 물이 차셨대요."

"폐라면 우리 군의관이 전공인데 당장 보내 주겠소."
"아니에요. 한국 노인네가 미국 의사를 보면 무서워 말도 잘 못하세요."

베어드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세브란스 의사 한 분에게 부탁해 놓았어요."

베어드는 기꺼이 차와 운전병을 내 주었다. 그는 함께 못 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총을 이별 선물로 주세요

다음 날 베어드의 관용 세단에 앉은 이강국은 의사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진찰용 가방이 놓여 있었다. 운전병 맥도날드는 김수임 어머니의 병을 걱정하면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군정청의 관용차는 평온히 서울을 벗어났다. 문산을 지나자 엠원총을 멘 미군들이 많이 보였다. 미군 병사들은 차의 번호판을 보고는 경례를 붙였다. 검문소에서 맥도날드가 차창을 내리고 헌병에게 뭐라고 말하면 차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점심 때쯤 되어 개성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개성 북쪽의 산골 마을로 들어섰다. 그곳은 38선과 아주 가까운 지점이었다.

북한 공식석상에 이강국이 나타나자 미군정 정보부와 수도경찰청은 난감했다. 이강국의 이름은 그들이 체포해 놓은 거물급 김삼용과 이주하보다 훨씬 더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강국이 유유히 삼팔선을 넘어 탈출에 성공했으니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강국의 탈출은 남한에서 도움을 주는 세력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1년 내에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

이강국이 김수임에게 남긴 말이었다.

"선생님 총을 이별의 선물로 주세요."

이강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권총을 꺼내 김수임에게 주었다.

"안 오시면 이 총으로 죽을 거예요."

김수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나윤숙이 베어드를 만난 것은 이강국이 탈출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녀는 자기의 심증을 베어드에게 내비쳤다. 그것은 이강국의 탈출에 김수임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었다. 베어드는 나윤숙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두 달쯤 후 베어드는 나윤숙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밀담을 나눴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앞으로 두 번 연재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태그:#이강국, #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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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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