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국의 소설 중에 <우상의 눈물>이라는 중편이 있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가 무대다. 열성적이고 도덕적인 담임선생이 있고 또 그에 걸맞은 우등생들이 있다. 모두 일직선으로 질주한다. 그런데 엇나가는 인물이 있다. 한 해 '꿇은' 학생, 최기표다. 이런 인물을 '악종 인간'이라고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말했다.

'악종 인간' 최기표 때문에 일직선으로 질주하던 이 학급에 위기가 온다. 모든 사건과 사고가 최기표 때문에 벌어진다. 최고의 진학률을 자랑하던 담임선생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담임 선생과 우등생들은 '선의의 악행'을 범한다. 바로 악종 인간 최기표를 '착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여, 최기표의 성적도 조금은 올라가고 착한 일도 하게 된다. 이러한 미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마침내 방송국에서도 최기표와 이 학급을 취재하러 오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최기표는 모든 '착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나간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메모를 남긴 채. '착하게 길들여지는' 과정이 최기표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선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모욕을 줘도 되나?

 지난 7일 K리그 개막전 전남과 FC서울 경기에서 비신사적 행위를 한 이천수가 10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축구협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를 마친뒤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사과한 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지난 7일 K리그 개막전 전남과 FC서울 경기에서 비신사적 행위를 한 이천수가 10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축구협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를 마친뒤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사과한 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이천수가 징계를 받았다.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고 이천수도 징계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k-리그 시즌 개막을 알리는, 전남 홈 경기에서 이천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일단 그는 오프사이드를 범하였고, 이에 깃발을 든 심판을 향해 '감자 주먹'과 '총알 세례' 같은 거친 행동을 하였다. 그 순간, 중계 카메라에 잡힌 그의 입에서는 욕설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에 대하여 한국프로축구연맹은 6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6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기간 동안 광양 홈구장에서 열리는 21일 인천전, 25일 대구전, 그리고 4월 18일 광주전에서 페어플레이기 기수로 사회봉사를 해야 한다. 어느 신문에서는, 아마도 급히 보도하느라고 그랬겠지만, 페어플레이 기수로 '활약'하게 되었다고 썼다.

거두절미, 이것은 아니다. 정말 아니다. 곽영철 상벌위원장은 "선수가 페어플레이 기수로 나서는 것은 세계 최초"라고 말하면서 "이를 통해 새 사람이 되고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더더욱 아니다. 이 징계만큼은 철회해야 한다.

중징계를 내리더라도 그것이 웃음거리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페어플레이기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10분 정도 들고 서있도록 하는 것은 상벌위원장의 말처럼 '세계 최초'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공연한 모욕 주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번 그 장면을 상상해보자. 수많은 관중이 본부석을 중심으로 들어차 있다. 본부석 한복판에는 이른바 VIP들이 축구 관람에 그리 좋지도 않은 검정색 소파에 앉아 있다. 이윽고 장내 아나운서의 진행 안내가 들리고 나면 요란한 음악과 함께, 이천수 선수가 세 명의 유소년들과 함께 페어플레이기를 들고 등장한다. 그 뒤로 양 팀의 베스트 11이 함께 등장한다.

이때, 경기장 본부석 앞은 어떤 광경이 될 것인가. 일동 모두 숙연해지고, 이천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그리고 경기는 시작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문제지만, 일부는 비난 섞인 야유를 하고 디카와 폰카로 찍어대고 '진풍경' 때문에 웃어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밖에 더는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징계가 예컨대 '일벌백계'의 효력을 낳을지도 불분명하다.

아무리 '악동'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벌써 세 차례나 상벌위원회에 불려갔던 '악동'이라고. 또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경기 중에 '감자 주먹'이나 먹이고 욕설을 함으로써 심판과 팬과 축구를 모욕한 선수인데 그라운드에서 퇴출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징계 받아야 마땅하다. 이의를 달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중징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6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600만원이라면 중징계다. 이미 여론 징계도 받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사회 봉사'를 해야 한다면, 다른 방식을 진지하게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문가 상담이나 자기 성찰 프로그램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징계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서있도록 하는 징계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어플레이기를 들고(사실상 주홍글자와 다름없게 된) 수많은 대중 앞에서 서있게 하는 것은 이천수 선수는 물론이고 일반 선수 및 축구 그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공산이 너무나 큰 것이다. 왜 이런 징계가 '세계 최초'일까. 이 지구상의 그 많은 '악동' 선수들에게 차마 이토록 공공연하게 모욕을 주는 징계는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축구는 여러 측면에서 도덕과 철학의 계기를 주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찰적 차원에서 의미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장의 경기에서 선수와 팬과 심판이 도덕의 실천자가 될 수는 없다. 다른 학생들 공부할 때 복도에 나가서 혼자서 계속 서있어야 했던 곤혹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겉으로는 어느 정도 반성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 치욕과 모멸감은 좀처럼 씻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 <우상의 눈물>처럼 모든 이가 선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는데 단 한 명의 '악종 인간' 때문에 뭔가 뒤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이천수는 그릇된 행동으로 심판에게 모욕을 주고 그에 따라 프로축구에 대한 이미지도 실추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중징계를 내리는 것은, 실추된 프로 축구의 이미지를 한 번 더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될 뿐이다.  

주홍글자(페이플레이기)를 들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서있도록 하는 것은 요즘 같은 '미디어 천국' 시대에는 더욱 주의를 요한다.

세 번씩이나 그렇게 서있음으로 하여 이 나라의 지상파, 케이블, 위성 텔레비전과 온갖 유형의 신문과 인터넷 미디어가 그 모습을 열렬히 중계하고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재생산할 것이 틀림없는데, 가히 '인격 살해'에 가까운 파장(징계가 아니라 형벌이 되는)을 거듭 낳을 수도 있다. 다른 진지한 방법은 과연 없을까. 프로축구연맹은 심각하게 재검토하기 바란다.

이천수 중징계 프로축구 감자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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