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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9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의 개최지로 최근 선정되어 이목을 끌게 된 피츠버그라는 도시에서 1년째 살고 있습니다.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한때 심한 경기침체로 쇠락했던 피츠버그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거듭나고 있다고 개최지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두 편의 기사에 걸쳐 피츠버그의 굴곡 많은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두 명의 거부들이 한 도시와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지를, 또 한편으로는 평범한 시민들이 자본과 자본의 도구가 된 지방정부에 맞서 어떻게 힘겨운 투쟁을 벌여 왔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근대 피츠버그의 역사엔 한국의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피츠버그는 제가 살아본 미국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삶의 질이 희생되는 급속한 산업화와 사회적 격변을 겪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피츠버그의 역사와 한국 산업화는 닮은꼴

 

피츠버그의 역사엔 처음부터 극단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보유한 대부호들이 있었는가 하면 동시에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는 수많은 민중이 같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정치권력은 극소수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서민들의 저항도 거세었습니다. 유리, 제철 등 특정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가는 다시 급속도로 쇠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수많은 민중 위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군림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피츠버그의 역사는 악덕자본주의가 한 도시와 그 시민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착취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우선 피츠버그라는 도시의 특징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미국에서 60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구는 32만 5천여 명입니다. 피츠버그 인구는 계속 줄어드는 중입니다(1950년에는 67만 7천명에 육박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와 더불어 대기 오염이 가장 심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학교가 있는 오클랜드와 시내 중심가 쪽을 보면 거의 매일 스모그가 끼어 있습니다. 피츠버그엔 언덕이 많고 큰 강들이 있어서 교량이 723개나 된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피츠버그는 살기가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강가에 있는 도심지도 아름답고, 주택 가격도 다른 대도시에 비해 저렴하며, 공공 도서관이 여럿 있고, 우리 강아지가 무척 좋아하는 널찍하고 아름다운 공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산과 언덕이 많은 도시라서 경관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산업화 초기] 상위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도시

 

이제 피츠버그의 산업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피츠버그라는 도시는 상위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도시였다는 것을 잔존하는 여러 증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500대 기업(Fortune 500)의 본사가 가장 많은 도시들 중 피츠버그는 공동 8위를 차지했습니다. <익스팬션> 잡지는 2006년에 "기업 확장에 가장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진 미국 내 대도시 지역 10곳" 중의 하나로 피츠버그를 꼽았습니다. 동시에 정부가 지정한 빈곤선 이하에 처한 사람들이 도시 전체 인구의 20.4%나 됩니다.

 

미국사람 아무나 붙들고 피츠버그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제철산업'이라고 대답합니다. 철강 산업이 없었다면 아마 피츠버그는 작고 별 특징 없는 도시로 남았을 것입니다. 남북전쟁(1860년대) 이후 피츠버그는 석탄과 삼림 자원이 풍부하고 큰 강이 바로 옆에 있어 에너지 비용과 운송비가 저렴했던 덕분에 세계 최대의 철강 산업단지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피츠버그도 원래 산업화 초기(186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에는 한두 명의 악덕 재벌이 제철산업을 장악하지 않았고, 고숙련 노동자들이 생산량과 시간을 자체적으로 조절하는 수많은 조그만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베서머(Bessemer) 공정'이 발명되고 철강제조의 신기술이 나오기 전까지는 직원의 숫자가 200명 이하인 이런 소규모 공장들이 대세였습니다. 각 공장이 따로 독립적으로 움직였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랜 세월 동안 도제로 일하며 기술을 익힌 숙련공들이 완전히 공장을 통제했습니다. 다시 말해, 원료비는 아주 저렴했고 숙련공들은 높은 임금을 받으며 큰 권력을 누렸습니다.

 

공장주들은 숙련공이 없으면 공장을 닫아야 할 판이었기 때문에 숙련공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도 없었고,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공장은 여지없이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과거의 이 숙련노동자들을 '공장의 귀족'이라고 부릅니다. 이 '노동 귀족'은 어떤 기계로도 대체될 수 없는 기술을 지녔고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만의 기술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도제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그러므로 생산에 중요한 기술과 지식도 숙련 노동자들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당시 숙련 노동자들은 아주 강력한 노조가 있어서 비숙련공의 3배내지 10배나 되는 임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귀족 노동자'들은 피츠버그의 정치, 시 행정부, 공장의 생산 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피츠버그의 인구는 7만 8천 명에서 23만 5천명으로 급증했습니다. 동시에 환경오염은 심해졌고 쓰레기처리 시설은 날로 증가하는 쓰레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기계화의 결과] 무너진 노동자의 삶

 

그러면 이렇게 막강하던 노동계급이 어떻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기술이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도로 정교한 온갖 기계들이 발명되어 숙련공이 필요 없게 되었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장기적으로 인건비를 지출하는 것보다 기계를 사들이는 것이 공장주로서는 더욱 경제적이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기계는 말대꾸를 하거나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공휴일에는 쉬겠다고 주장하지 않았기에 부리기가 쉬웠습니다.

 

'베서머 제강법'은 '귀족 노동자'들을 몰아낸 신기술 중의 하나로서 피츠버그에는 1875년에 도입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1875년까지는 고도로 숙련된 기능공들이 액화한 쇳물의 온도를 측정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간을 정확하게 조절하여 며칠을 거쳐 소량의 강철을 제작했기 때문에 모든 생산 과정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베서머 공정은 거대한 솥에 뜨거운 쇳물을 만든 후 순식간에 쏟아서 공기를 주입하여 강철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생산시간을 단축하면서 생산량은 급증하게 된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는 고도의 숙련공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공장의 생산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기계의 용량에 좌우되었고 생산 일정과 노동 시간표도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공장 설비의 가열속도, 냉각속도 등 기계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기계들은 원래부터 인간의 기술이 별로 중요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기계가 사람의 기능을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실종되었고 기계와 설비를 소유하는 사람이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시간과 생산과정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도구는 사람의 능력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지만 현대의 노동자들은 기계에 순응하고 기계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사람을 통제하고, 기계 소유자가 기계를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까지는 피츠버그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저임금 비숙련공으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에다 거대한 야심과 욕심을 지닌, 기회주의적이고 무자비한 자본가들이 출현하여 극심한 빈부격차를 창출해냈습니다. 그 결과 빈번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고, 자본가들은 살인적인 폭력을 휘둘러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자기들의 권력과 재산을 지켰습니다.

 

[홈스테드 전투] 악덕 기업주 앤드루 카네기와 프릭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신기술의 도입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베서머 공정과 평로(平爐)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비용을 줄였습니다. 카네기는 또한 노동자들을 훨씬 더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카네기는 갑부로, 도서관을 많이 지은 사람으로, 또는 철강업자로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다음의 일화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카네기는 피츠버그 제철 노동자들의 임금을 25% 삭감했으며 노동조합과 협상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들이 회사운영이나 공장관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때 카네기의 부하 직원이었던 헨리 프릭(Henry Frick)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친구이자 '홈스테드'라는 동네에 있는 카네기 제철공장의 공동 소유주였습니다.

 

카네기와 프릭은 공장주가 임금이든 노동조건이든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프릭은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새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1892년 7월, 프릭은 사설경비업체인 '핀커튼 폴리스'를 고용했습니다. 용병들을 총으로 무장시켜 공장과 새로 고용할 비노조 노동자들을 경호하게 한 것입니다.

 

수천 명의 노조원들이 공장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7월 5일 새벽, 수백 명의 용역 경비원들은 거룻배를 타고 기습적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접근하지 말라는 표시로 공포를 쏘았지만 용역경비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상륙하려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돌과 병을 던졌고, 몸싸움이 총싸움으로 확대되면서 경비원 4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노동자 수십 명도 총에 맞아 그중 2명이 사망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대포를 쏘려다 실패하고, 거룻배에 휘발유를 적신 천에 불을 붙여 던졌으나 역시 소용이 없었고, 기차 한 칸을 잡동사니로 채운 후 불을 붙여 배를 향해 밀어붙이기도 했으나 기차는 배에 닿기 전에 멈추어서 전소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용역 경비원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 노동자들은 그들을 마음껏 걷어차고 때리면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홈스테드 전투 이후 카네기와 프릭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용병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방식에 아무런 문제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고 다시 공장문을 닫고 노조원들을 쫓아낸 후 비노조원들을 새로 데려오는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했습니다. 결국 노조는 와해되었고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실직했으며, 공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절반으로 삭감된 임금을 받았습니다.

 

프릭은 홈스테드 전투 이후 미국역사상 최대의 공공의 적이라고 알려질 만큼 미움을 받았고 한 번은 사무실에서 기습을 당해 총탄을 여러 발 맞고 칼에 되풀이해서 찔리기도 했으나 1919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사상 최악의 최고경영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프릭이 남긴 한 가지 업적은 강아지들이 목줄 없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개운동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넓고 아름다운 프릭 공원입니다.

 

 

[스위스와 맞먹는 부] 카네기가 국가라면 세계 38번째 부자나라

 

카네기와 프릭을 비롯한 악덕 자본가들은 피츠버그와 그 주민들을 오로지 제철 산업과 자기들의 부를 증가시키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피츠버그의 제철 산업은 미국 최대의 부를 생산한 동시에 수백만 명의 주민들을 서서히 병들게 한 환경오염을 초래했습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1880년에 23만 5천명에서 1920년에는 58만 8500명),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급증하여 노동시장이 공급과잉이 된 상황에서 노조가 붕괴되어 임금은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졌습니다. 2008년의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카네기는 3092억 달러($309.2 billion)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했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홍콩, 루마니아, 노르웨이 또는 이스라엘의 국민 총생산보다도 많습니다. 카네기가 하나의 국가라면 현재 스위스 바로 밑에 세계에서 38번째로 부유한 나라일 것입니다.

 

앤드루 멜론(Andrew Mellon)은 피츠버그의 또 하나의 악덕자본가로서 프릭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의 자산은 1957억 달러($195.7 billion)에 달했고, 헨리 프릭은 겨우(!) 15억 달러를 보유했습니다. (쯧쯧... 불쌍하네요.)

 

그럼 나머지 23만4997명의 피츠버그 시민들을 어땠을까요? 대부분 노동자들은 하루에 10시간, 일주일에 6일 일하며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제철공장 노동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20살에 제철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면 일곱 명 중 한 명은 50살이 되기 전에 산업재해로 죽었고 세 명 중 한 명은 지체부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여느 산업도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은 위생이 엉망인 빈민굴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1900년에 비숙련 노동자 가족의 영아사망률은 30%에서 40% 사이였다고 합니다.

 

[뚜껑 열린 지옥] 환경오염이 건강을 돕는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피츠버그의 주된 연료는 유연탄이었습니다. 산업체, 기차, 가정집 등 온갖 시설에서 증기 보일러며 용광로며 화덕이며 난로까지 매달 오염물질을 100톤씩 쏟아냈습니다. 제철공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오염물질이 나와서 자연의 정화능력이 완전히 정지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10년까지 피츠버그는 "영구적인 매연의 담요"로 덮여서 반세기 이상을 그런 상태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피츠버그는 "뚜껑 열린 지옥"이란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었습니다.

 

물론 카네기, 프릭, 멜론 같은 부호들은 주로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지만 피츠버그의 노동자들은 꼼짝없이 오염된 도시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악덕 자본가들은 환경오염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오염이 어떻게 아무 문제가 아니냐고요?

 

1868년에 <월간 애틀랜틱>(Atlantic Monthly)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를 봅시다.

 

"유연탄에서 나오는 연기는 말라리아 병을 없애주며 시력을 향상시킨다 (....) 연기는 축복이다 (....) 생명에 위협이 되는 대기 중의 유해물질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 '축복'이 심하게 높았던 폐렴 발병률(1900년대 피츠버그의 사망원인 1위)이나 결핵 발병률과 어떻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이 기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매연이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궤변이 어떻게 통했는지 어이가 없으시다면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녹색개발'이라고 선전되는 환경파괴 정책 캠페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힌트: '대'자로 시작해서 '운하'로 끝나는 사업, 아니 요즘은 이름이 바뀌었다지요? '4대강'으로 시작해서 '살리기'로 끝나는 프로젝트 말씀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피츠버그 시민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치명적인 환경오염을 방관만 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람들은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 도시를 통째로 소유하다시피 한 대부호들 앞에서 시민들의 크고 작은 항쟁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시 정부와 법원은 항상 자본가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변화는 너무도 고통스럽게 천천히 찾아왔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이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는 심한 인종차별로 인종 간 갈등이 많았고, 이민자들이 출신민족별로 문화와 언어가 달라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약삭빠르게 이용해서 다른 집단을 서로 적대시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막장, 피츠버그와 서울

 

제가 피츠버그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용산 철거민들이 철거용역에게 구타당하고 불에 타죽었고, 택배운송 노동자 박종태씨가 수수료 건당 30원 인상을 요구하다 해고되어 최후의 항거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 얼마 전에는 한국타이어에서 다섯 번째로 노동자 돌연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모순의 근원은, 대다수의 민중에게 산업화와 개발의 짐을 일방적으로 지우고 극소수를 외설스러울 만큼 부자로 만드는, 빈부격차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빈부격차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인권도 환경도 윤리도 이윤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츠버그의 악덕 자본가들도 제철 산업이 더 이상 큰 이윤을 내지 못하게 되자 공장을 닫아버리고 수많은 실직자들과 파괴된 도시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훌훌 떠났습니다.

 

산업 발전 과정은 나라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개발은 똑같은 목적으로 행하여지고, 흔히 비슷한 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개발의 동기는 언제나 한 사회의 소수 특정 집단을 위해 철저히 이윤을 창출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피츠버그와 서울은 비슷합니다. 두 도시가 모두 전체 시민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기업 주인들의 이윤을 위해 개발되고 팽창했습니다. 피츠버그는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고 환경오염을 방치했고 서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츠버그에도 부자들이 살던 고급 주택가와 나머지 시민들이 살던 작고 더러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빈민촌이 있었듯이 서울에도 부촌과 달동네가 있었습니다. 피츠버그의 공장들이 저임금으로 이민자들을 착취했듯이 서울에서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3D'직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피츠버그에도 물론 여러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환경만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도 줄고 공해도 줄었고 최근 와서는 환경에 대한 인식도 나아졌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피츠버그의 지역사회운동과 문화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참고한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S. J. Kleinberg, The shadow of the Mills: Working Class families in Pittsburgh. 1989.
Joe. Tarr, ed., Devastation and Renewal: An environmental history of Pittsburgh and its region. 2003.
Francis G. Couvares, The Remaking of Pittsburgh: Class and Culure in an Industrializing City, 1877-1919. 1984.
H.W. Brands, The Reckless Decade: America in the 1890s. 2002.
http://en.wikipedia.org/wiki/Henry_Clay_Frick
http://www.city-data.com/us-cities/The-Northeast/Pittsburgh-Population-Profile.html (population)
http://www.pittsburgh.net/ (general info)
http://www.reuters.com/article/topNews/idUSN3056265920080501 (pollution story, Pitts surpasses LA)
http://www.gasp-pgh.org/photo-gallery/pittsburgh-the-smoky-city/ (pollution pix)
http://www.ninemilerun.org/watershed/greenspaces/SlagPark/index.htm(call the numbers at the bottom to request permission of pix)


태그:#피츠버그,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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