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바리.'

사람들이 흔히 군인이나 예비군을 일컫는 말이다. 한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은 '군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그 아래 오픈 국어사전에는 'zeno12'라는 누리꾼이 "(군바리는) 일본어로 '바라'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바라는 '~들 무리'라는 뜻으로 모든 군인들을 통틀어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어에서 유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군바리'라고 불리는 군인은 천대받는 느낌이 강하다. 우리나라 현대사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 등 총칼을 앞세운 군사독재로 인해 오랫동안 신음했었기 때문일까. '군인'하면 '무자비함' 또는 '무식함'이 떠오르게 된 것은.

사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숭문천무, 崇文賤武)'한 것은 조선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무인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천대받는 계급과 직업이었을까.

조선의 무인은 천대받지 않았다

<조선무사> 겉 그림 '조선을 지킨 무인과 무기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조선무사>.
▲ <조선무사> 겉 그림 '조선을 지킨 무인과 무기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조선무사>.
ⓒ 인물과사상사

관련사진보기

<조선무사>(최형국, 인물과 사상사)는 "조선의 무인은 천대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무인이 천대받았다는 인식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식민지 지배수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표적인 무인으로 꼽힌다. 이성계는 개국 후 가장 먼저 분산된 군권을 단일화하며 개국공신들의 사병(私兵)까지 국가의 공병(公兵)으로 전환하거나 해산시켜버렸다. 군사 쿠데타로 개국한 조선의 초기에 거꾸로 무인들의 정처 없는 방황이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과거에 무과 시험을 도입해 조선 역사에서 양반 즉 문반과 무반이 양대 권력을 이루는 바탕을 마련했다. 이후 연산군은 "국상 중이라도 무예의 일을 폐지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례"라고 했으며, 중종은 "문학과 무예는 모두 권장해야 할 일"이라고 하며 무예의 중요성을 논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예와 무인에 대한 가치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여러 임금들이 강조한 것에서 보듯 조선은 결코 무를 천시한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이 숭문천무의 나라였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그 뿌리째 파괴하고 싶었던 일제에 의해 기획된 일종의 '만들어진 악습'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며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바로 조선은 미개하고 무를 천시하는 국가이며 당쟁만 일삼는 민족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이어 "이는 식민사학을 이루는 주요 쟁점"이라며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식민사관에 의해 비롯된 무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은 대표적으로 <조선사(朝鮮史)>(총 35권, 1938년 완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정립되었다. <조선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역사의 흐름이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사회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정체성론'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편년체의 조선 역사서다… 조선 역사의 약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기술돼 있으며 이후 식민사학의 주요 토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설치 초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소재 대학 출신들이 직원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경성제국대학교가 설립되고 나서는 이 대학 졸업생들이 주로 충당되었다. 이후 해방을 맞이했지만 식민사학의 잔재가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상황에서 여전히 일제 관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이러한 사상의 틀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근현대사에서 군홧발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무인들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식민사관의 폐해, 조선은 미개하고 무를 천시한 국가로 낙인찍다

중악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저자 최형국은 현재 무예24기연구소를 운영하며 무예시범과 연구를 함께 병행하고 있다. 말 그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이유인지, 무와 문을 동시에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식민사관'을 따져 묻는 데서 보듯 냉철하다.

저자 최형국 저자가 직접 마상무예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만으로 문무겸전의 삶이 눈에 선하다.
▲ 저자 최형국 저자가 직접 마상무예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만으로 문무겸전의 삶이 눈에 선하다.
ⓒ 최형국

관련사진보기


<조선무사>는 이름 없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이 잘 몰랐던 조선시대 무인의 삶을 큰 틀에서 조명한다. '무인과 백성, 조선을 지키다' '조선의 병사들' '조선의 특수부대와 비밀병기' '조선을 지킨 무기와 성곽 그리고 전함' 등 4부분으로 나눠 놓은 책장 사이사이에는 조선 역사와 삶의 궤적을 늘 같이 했던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들이 가득 넘쳐난다.

조선시대의 군대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장기에 따라 병과를 지정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에 기록된 병사 선발 요령을 보자.

"첫째, 키가 작은 사람은 방패와 갈라진 창을 잡게 하라. 둘째, 키가 큰 사람은 활과 장창을 잡게 하라. 셋째, 힘이 강한 사람은 깃발을 잡게 하라. 넷째, 용감한 사람은 징과 북을 치게 하라. 다섯째, 힘이 약한 사람은 화병(火兵, 일종의 취사병)의 임무를 준다."

조선의 최고부대인 '장용영(壯勇營)'과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구성된 '착호군(捉虎軍)' 이야기에서는 무엇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저자의 근심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장용영은 국왕 친위부대로서 정조의 민생개혁 의지를 뒷받침한 최강의 군사조직이다. 당시 국정을 좌우하던 노론 세력에 맞서기 위해 정조는 힘을 길러야 했다. 1785년 7월 정조는 훈련도감의 최정예 무사들을 뽑아 장용위라는 국왕 경호부대를 창설한다. 처음 30명에서 50명으로 늘어난 부대는 2년 뒤 200명으로 확대돼 장용청으로 바뀐다. 1788년 정조는 기존 오군영을 감싸던 척신들의 불만을 뒤로하고 드디어 단독 군영인 장용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했던 장용영은 결국,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정조를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역사 이야기에 가정법을 쓰는 게 부질없는 일이지만, 정조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고 안정적으로 순조가 즉위했다면 장용영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더 나아가 이후 나약한 조선 역사 또한 다른 국면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잡으라는 호랑이는 안 잡고 백성을 잡았던 조선의 착호군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호랑이를 전문으로 잡는 특수부대인 착호군은 한번 출동하면 호랑이를 잡을 때까지 며칠 동안 추적하면서 이동했다. 착호군이 도착한 마을에서는 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야 했다. 이 때문에 착호군은 호랑이 잡는 군사가 아니라 백성 잡는 군사라는 말까지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공권력은 원성을 듣게 마련이다.

한편 호랑이 사냥이 빌미가 돼 광해군이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역사 해석은 흥미롭다. 당시 병력 이동은 반드시 병조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얻고 발병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호환(虎患)의 경우 담당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예외적으로 먼저 호랑이를 사냥하고 보고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임지로 떠나는 이귀에게 호랑이를 사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귀는 광해군을 꾀어 도의 경계를 넘어 호랑이를 추적할 수 있는 특별 권한까지 얻어냈는데 누가 알았으랴. 호랑이를 잡기 위한 특별 군사 작전권을 쥔 이귀로부터 시작한 반란이 이중로, 이괄, 이흥립 등에 의해  결국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며 광해군을 사냥하게 됐을 줄을.

저자는 역사 인식에 있어서 "문과 무는 새의 양 날개나 수레의 두 바퀴 같아서 무의 역사는 곧 국가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사학을 전공한 무예인'으로서 살아가는 저자의 삶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당부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 흐름은 어찌 보면 문의 역사, 혹은 문인들의 역사로 조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나 무인을 몰라서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반쪽밖에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무와 무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어 그들이 역사의 한축을 담당한 당당한 주체로 자리 매김 된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더욱 강건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조선은 늘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만은 아니었다."

저자 최형국은 누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저서로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기사를 묶어 펴 낸 <친절한 조선사>(2007, 미루나무)가 있고, <조선시대 군사 신호체계 연구>, <조선후기 기병 마상무예의 전술적 특성> 등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푸진 삶이 좋다며 가난한 풍물패 상쇠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던 필자는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장으로 찬란했던 조선무예를 치열하게 수련하고 있으며, 역사의 진실을 찾아 온몸을 던져 연구하고 있다. 죽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늘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찾기 위해 궁구하는 그는 필시 이 시대 문과 무예를 아우르는 젊은 괴짜실학자임에 분명하다.

"…… 지독하게 수련했습니다. 작다는 이유로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지리산 능선을 배낭 메고 죽기 직전까지 달리고 달리며, 체육관 바닥에 땀이 고이도록 , 대밭의 대나무가 남아나지 않도록, 진검 들고 치고, 베고, 찌르며, 발차기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 푸지게 굿을 쳤습니다. 꽹과리 수십 개를 깨뜨리며, 장단에 녹아 들어가며, 한삼자락이 땀에 질펀해지도록 탈춤 추며… 그리고 지금 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치열했던 그의 자화상처럼, 지금도 그는 일분일초 치열하게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캐내는 데 푹 빠져있으며, 아울러 동시대인과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며 한걸음씩 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 http://muye24ki.com

덧붙이는 글 | <조선무사> 최형국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330쪽. 12,000원



조선무사 - 조선을 지킨 무인과 무기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 이야기

최형국 지음, 인물과사상사(200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래오래 비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느니 피가 우는대로 살아볼 생각이다"(<혼불> 3권 중 '강태'의 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