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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풍류와 멋을 알며 지냈다. 자연이 아무리 험난하고 생활이 고단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만족하며 풍류를 즐겼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고귀한 정신과 삶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 첨단의 기술과 과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삶의 풍요는 과거 선조들보다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다. 선조들은 풍류를 즐기고 현실 생활에 대해 감사 할 줄 알았다. 이에 선조들의 흔적이 자연과 함께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을 찾아본다. 그 첫 번째로 도란도란 모여앉아 가슴 한 켠에 따뜻한 함이 채워져 있는 그리움의 고향,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마을을 지난주 돌아봤다. 이곳은 아직도 전통의 예절과 풍습이 숨쉬고 있는 천혜의 고장이다.
  
경상도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즐겨찾던 삼강나루터 주막이 세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어 관광객들에 사랑을 받고있다.
▲ 삼강주막 경상도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즐겨찾던 삼강나루터 주막이 세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어 관광객들에 사랑을 받고있다.
ⓒ 김석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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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 주막마을은 칠백리 낙동강 물결이 내성천과 금천이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다. 삼강나루 길목을 지켜 앉고 있는 곳이 삼강나루이다. 옛 그 시절 한양으로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과 자연 속에 쉬어가는 장사꾼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리운 곳이다.

어떻게 보면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당시에는 뱃길을 건너려면 이곳에 머물다가 뱃사공을 통해 낙동강을 건너 한양으로 가야 했다. 지금이야 왕복 4차선 다리가 놓여져 있어 쉽게 낙동강을 건널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험난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곳 삼강주막 마을은 지난해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해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따뜻한 정취가 가득한 곳으로 찾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요즘도 평일에는 하루 평균 200~300명,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400~500명이 찾고 있다. 서울, 부산, 충청권 등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오고 있다.

삼강나루터 주막이 500년된 회나무와 함께 세월을 지켜왔지만 나무는 그대로인데 주막은 허물어져 세로이 복원됐다.
▲ 회나무와 삼강주막 삼강나루터 주막이 500년된 회나무와 함께 세월을 지켜왔지만 나무는 그대로인데 주막은 허물어져 세로이 복원됐다.
ⓒ 김석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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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면 선조들이 머물며 지내온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세월의 흐름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초가삼간 집에서 선조들의 생활 모습 그대로 앉아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이곳을 관광지로 만든 이유는 이렇다. 이곳이 낙동강 나루터 옆으로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가 있던 곳이다. 이를 모태삼아 소위 주막거리를 복원한 것이다.

낙동강 삼강에는 1934년까지 보부상과 사공들의 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활발했다. 안동과 예천, 봉화, 영주, 청송, 영양 등 경북 북부지방은 물론 영월 등 강원도 남부지방의 길손과 보부상까지 삼강을 찾았다.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 나 오갈 만큼 분주했다. 밤이 되면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호롱불 아래에서 길과 마을 정보, 상거래 정보를 주고 받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삼강나루의 옛 모습은 1934년 대홍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지난해 지금의 삼강문화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주막 바로 뒤뜰에는 회나무가 있다. 바로 장터다. 소금, 쌀, 잡곡 등의 물물교환이 회나무 아래에서 이뤄졌다. 나루에는 나룻배와 농선이 운행됐다. 나룻배는 길손과 보부상이, 농선은 쌀, 잡곡, 소 등 가축이 단골이었다.

회나무 바로 옆에는 단단한 돌덩어리가 있다. 무게가 120kg이나 된다. '들돌'이다. 나루터에는 짐을 싣고 내리는 인부가 필요한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이 정해졌다. 힘이 장사급은 돼야 배에 짐을 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옛 낙동강 소금배는 삼강이 주 종착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강의 수량이 풍부하면 안동이나 내성천을 거쳐 영주에까지 소금배가 운행했지만 강의 수량이 적었을 때는 안동이나 영주 땅에서 내려온 나룻배가 삼강에 정박 중인 소금배에서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요즘 삼강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막걸리도 한 사발 할 겸 삼강에서 선조들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함일 것이다.

삼강마을은 1300리 낙동강 물길이 내성천과 금천을 만나 어우러진 곳이라 해서 삼강이라 불리어졌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 이곳 삼강나루터를 꼭 거쳐갔으며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이 모두 이 곳으로 모여 삼강주막은 봇짐장수, 방울장수로 붐볐다 한다.

1970년대에 도로가 발달하면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주막과 주모는 기억에 멀어져 갔지만 주모는 2005년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70년간 주막을 지켰다. 마지막 주모였던 것이다.

새롭게 복원된 삼강주막의 사진이 그역사를 말하고있다.
▲ 복원된 주막에 걸려있는 사진 새롭게 복원된 삼강주막의 사진이 그역사를 말하고있다.
ⓒ 김석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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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였던 유옥년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주막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경상북도가 그 문화·역사적인 가치를 인정하여 2005년에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하였으며, 2007년에 1억 5000만원의 예산으로 허물어지던 스레이트 지붕 대신 짚단을 얹은 초가지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이와 함께 보부상 및 사공숙소를 복원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가 생활하던 주막이다. 완전 해체 복원을 했는데 당시 쓰던 목재 등을 가능한 사용해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이곳 주막을 보면 가치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툇마루에다 부엌, 다락 등 작지막 아기자기한 주막이 감탄을 짓게 한다. 부엌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는데 이는 어디서든지 쉽게 술상을 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부엌 벽에는 당시 주모가 술 손님들에게 외상을 주던 장부가 새겨져 있다. 흙 벽돌에 선을 그어 외상값을 표시했는데 이곳에는 일반 손님과 뱃사공 등으로 나눠 표시했다. 벽이 모자라 집 벽에도 표시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을  하면서 당시 벽에 그어진 외상값 표시를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복원, 눈길을 끈다.

이 주막 바로 옆 수령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보호수 제11-27-12-23호)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노인들의 얘기로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낙동강의 범람으로 이 나무 중간, 구멍이 뚫린 곳까지 물이 차올랐다는 증언이 있다.

또 다른 나무에 관한 얘기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돈을 번다 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좋아 잠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 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지난해 삼강마을 복원을 하면서 단순히 주막만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당시 보부상숙소와 사공숙소 등도 함께 만들었다. 넓은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옛날 그대로 막걸리 5000냥, 지짐이 3000냥, 두부 2000냥, 주모 한상주이소는 1만2000냥 으로 표시돼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한다. 가족과 함께, 아니면 친구과 함께, 연인과 함께 편안하게 이곳을 찾아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만 하다. 시대를 초월해 당시 모습이 잠시나마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 낙동강을 배로 건너야 했는데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지금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217번지 삼강마을 정재윤(58)이장은 이곳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그럴 것이 이곳은 100여 년 전 선조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주막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 이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문화관광해설사, 녹색농촌체험마을 추진위원장도 맡고 있다. 고향이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취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라는 표현이다.

정 이장은 "주민들과 행정기관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 있던 것을 자산으로 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옛 정취를 살려 관광자원화 했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고귀한 문화자산을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널리 알리고 느껴보도록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지난해 복원을 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으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노력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강조 했다.

정 이장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흐뭇해 하고 있다"며 "과거의 모습을 통해 지금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이장은 "이곳이 고향으로 귀중한 자산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며 "새로운 시각, 새로운 생각은 과거를 오늘에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곳 삼강마을을 조성하는데 어려움도 많았으나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의식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며 더 변화된 삼강 마을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 이장은 대학시절을 외지에서 보내다가 20여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오는 9월 처음으로 주민과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삼강주막축제를 계획하고 있는 정 이장은 오늘도 바쁘게 곳곳을 누비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없습



태그:#선비의고장 예천, #삼강나루터, #삼강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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