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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중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혼을 담는' 슬라이드작업을 25년 간 해왔다.
 그는 민중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혼을 담는' 슬라이드작업을 25년 간 해왔다.
ⓒ 윤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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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찰칵….

그를 떠올리면 슬라이드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강의실 안, '그때 거기'를 보여주는 슬라이드들이 '찰칵 찰칵' 넘어간다. 정적을 깨고 약간 쉰 듯한 음성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춤추는 거리다" 일제강점기에 불린 '감격시대'다. 곧이어 "여기서 노래하는 '환희'와 '희망'이 진정한 '환희'와 '희망'일까요?" 되묻는 그의 질문이 청중의 가슴팍에 날카롭게 꽂힌다.

그는 역사란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이미 '그때 거기' 선배들이 추구하던 실천 속에 담겨 있기에, 역사는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그 '오래된 미래' 속에서 희망을 찾자며 전국 방방곡곡 노동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그. 박준성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다. 그가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는 노동과 투쟁이라는 두 수레바퀴로 굴러왔다.

10년 전 스승, 10년 만의 인터뷰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혔네요. 12분쯤 늦을 것 같습니다."

그는 미안해 했지만, 내게 10여 분의 기다림은 10여 년 만의 만남에 대한 설렘이었다. 그는 내가 대학 시절 유일하게 술자리를 함께했던 교양과목 강사였다. 근현대사, 소위 '데모 좀 나가 본' 학생들이 좋아하는 강의였다. 게다가 그는 집회에 갔다 온 감상을 써 내면 학점에 가산점을 주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의 수업은 강의를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가 넘기는 슬라이드 속엔 지금껏 역사를 이끌어 온 일하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투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가 신길역 플랫폼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모르는 사람도 '역사 선생님' 박준성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천연감물염색을 한 생활한복풍의 상의 때문이다. 어깨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등산 배낭이 걸려 있다. 10여 년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많이 야위었다는 것만 빼놓고. 간암 진단 후 5년여 투병생활의 흔적이 조금 깊어진 주름과 함께 얼핏 비친다.

오늘은 슬라이드를 트는 환등기 대신 두 사람은 넉넉히 앉아 공부할 법한 책상을 들고 있다. 책상이 많이 무거워 보여 "무겁진 않으세요?"라고 물으니 그는 '일없다'는 듯 책상을 들어 보여준다. "암 치료하면서 목공예를 배웠어요. 이거 전통기법으로 만든 책상이에요. 1월에 가구전시회를 했는데 지인에게 선물한다는 걸 이제야 갖고 왔네요." 책상은 달랑 4개의 나무판자로 이루어져 있다. 못 하나 없이 나무 홈을 짜 맞춘 꾸밈없는 모습이다. 얽히고설켜 서로 힘주며 살아가는 소박한 민중의 삶을 닮았다. 또 수수한 박준성 선생의 모습 그대로다.

그 책상을 집이 있는 수지부터 2시간 가까이 들고 왔단다. 왠지 그는 운전면허증이 없을 것 같다. 그래 대뜸 물었다. "운전면허증 없으시죠? 일부러 안 따셨나요?" 그가 건너편 도로를 가리킨다. "네. 저기 자가용 두 대가 차지하는 저 넓은 면적에 기껏해야 대여섯 명 타잖아요. 예전 만원 버스 같으면 150여 명은 탔을 공간이죠. 미안해서요. 또 1970~80년대는 노동자들이 자가용을 많이 안 갖고 있기도 했고요."

평생 기득권을 경계하며 살아온 그에게 운전면허증이 도로 점유와 동격의 의미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그는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자가용 갖는 노동자들도 많아졌고 지방으로 강의 갈 때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쳐 운전면허증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앞으로도 운전면허증을 따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한 운동가였다.

박준성 선생은 걸음마 배우듯 조각칼 쓰는 법부터 배우면서 암세포와 싸워왔다.
 박준성 선생은 걸음마 배우듯 조각칼 쓰는 법부터 배우면서 암세포와 싸워왔다.
ⓒ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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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를 꿈꾼 순박한 시골청년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노동세상> 회의실에 다다랐다. 그와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첫 질문, "원래 역사학과에 갈 생각이셨나요?" 본래 대학 진학은 장래희망보다는 점수에 맞춰 과를 정하지만, 왠지 그는 자기 신념으로 역사학과를 택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시 우리 지역 국립대에 역사학과가 새로 생겼어요. 고3 담임선생님이 신설학과로 가면 나중에 교수 되기 쉽다고 적극 권하셨지요." 공부를 좋아해서 공부하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단다.

1974년, 교수를 꿈꾸던 청년 박준성은 그렇게 역사학과에 입학한다. 이끌어주는 선배도 없는 신설학과에 간 순진한 시골청년은 생각한다. 교수가 되려면 서울대 대학원에 가야 하고, 그곳에 가려면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1학년 때부터 대학생활 절반은 도서관에서 보냈다.

나머지 절반을 보낸 곳은 술집이다.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보장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긴급조치 9호 시대. 어떠한 저항도 봉쇄된 상황에서 역사학과 학생이 갖는 특유의 사명감을 쏟아낼 데는 막걸리 사발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속엔 훌륭한 역사학자가 돼서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생활야학을 하며 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피부로 느꼈다. 맨바닥에 사과상자를 뒤집어 놓고 책상 삼아 가르치고 배우던 그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단다.

강단을 버리고 거리에 서다

민에 대한 연민만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지금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과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건 천지 차이이기 때문. 대학 교수의 환상을 깨준 한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양심 있는 교수로만 남았을 확률이 높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던 그는 방위 제대 후 바로 조교 임용을 앞둔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였던 당시, 국립대 조교는 공무원 신분에다가 석사학위만 따면 바로 전임 교수가 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게 대학 교수로 가는 길에 막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인생사 좋은 일엔 꼭 장애물이 있기 마련. 방위 제대를 얼마 안 남기고 출신 대학에 인사를 갔다가 후배들로부터 복사된 논문 한 편을 건네받는다. 바로 그가 쓴 학부 졸업논문이 잘못 쓴 토씨까지 고쳐지지 않은 채 학술논문집에 지도교수 이름으로 올라 있었던 것. 이에 그의 후배들이 '논문 도용 교수 물러가라!'고 들고 일어났다. 이럴 때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법. 그는 '배은망덕한 놈' 소리를 들으며 모교를 떠나야 했다. 그 뒤 교수집단의 허위의식에 환멸을 느낀 그는 '강단 안 교수'가 아닌 '거리 위 역사 선생님'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월간 <작은책>에 연재 중인 '추억 따라 역사 따라'에서 당시 '가지 않는 길'을 이렇게 회상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감한다. 세상살이가 잘 풀릴 때도 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더럽게 꼬일 때도 있다.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일이 살아 갈 방향을 휘저어 예정에 없던 엉뚱한 길을 걷게 만들기도 한다. 엇박자가 났다고 생각하는 길이 제대로 살아온 길일 수도 있다. 슬픔은 슬픔으로 위로받듯이 과거의 고통은 현실의 어려움을 버티게 하는 면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노동자가 있는 곳이 나의 강의실

한창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네, 오후는 졸린 시간이니까 아침 10시에 하는 걸로 하죠." 지방에서 하는 교육인 듯한데 그는 오후보다 오전을 택한다. "투쟁사업장이에요.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인데 원래 내일 하기로 했다가 모레 하면 두 명 더 들을 수 있다고 해서요." 제 몸의 고단함보다 교육 듣는 이들의 상황이 우선인, 천상 교육자다.

"사실은 처음부터 노동자교육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이게 웬일인가. 25년간 노동자교육을 해온 그로부터 나온 뜻밖의 얘기다. 1981년 5월 27일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었던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면서 도서관 6층에서 떨어졌다. 그때 그는 다른 대학원생들과 함께 도서관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다리가 후들거려 현관 기둥을 끌어안았다. 울부짖으며 몰려드는 학생들 위로 사과탄이 날아들고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를 김태훈 학생의 몸을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덮었다. 학생들을 쫓아내고 김태훈을 낚아채가는 전경들을 보면서 그는 "이런 놈의 세상, 공부하면 뭐하나.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운동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공부 말고 할 일을 물었다. 선배들은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면서 그에게 농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근현대사를 써오라고 요구했다. 농민들의 피눈물을 모아 거둔 돈이라면서 작업비도 줬다. 그런데 아무리 쉽게 쓰려고 해도 쉽게 쓸 수가 없었다. 농민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농민의 말투에 익숙하진 않았던 것. 그는 선배에게 "도저히 못 쓰겠습니다. 강의를 좀 하면서 경험을 쌓아 농민들의 말투와 정서에 익숙해지면 써 보겠습니다"고 했다.

그렇게 강의를 수소문하던 그는 1984년 8월, 부천 YMCA에서 첫 강의를 한다.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 겉으론 청년강좌라 했지만 사실은 노동교실이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했던 그 첫 강의 다음달엔 대학 강의도 시작했다. 거리 위 역사 선생님과 대학 안 비정규직 강사 생활이 동시에 열린 것이다. 그는 지배자가 아닌 낮은 곳 사람들의 역사를 가르칠 곳이라면 파업현장이든 대학 강의실이든 가리지 않았다.

슬라이드에 역사를 담다

박준성 선생은 찰칵찰칵 슬라이드를 넘기며 '그때 거기' 속 노동자들의 역사를 전하면서 '지금 여기'를 돌아보게 한다.
 박준성 선생은 찰칵찰칵 슬라이드를 넘기며 '그때 거기' 속 노동자들의 역사를 전하면서 '지금 여기'를 돌아보게 한다.
ⓒ 윤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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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그는 '민중사학 건설'에 뜻을 모은 연구자들과 함께 구로역사연구소(구로연)를 세웠다. '역사적 실천'을 강조하며 실천의 현장에 있길 자처했던 구로연은 많은 현장 강의를 진행했다. 1년에 100여 회의 강의 중 50~60회는 그의 몫이었다. 거의 1주일에 한 번 꼴이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던 1990년대 초, 역사를 의심할 뿐 흥미까지 잃고 떠나는 대중을 예전과 같은 방식만으로 불러 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역사에 흥미를 갖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근현대노래 80년사'라는 다큐멘터리 노래극을 봤다. '바로 이거다! 슬라이드로 근현대사 주요 장면을 보여주면서 강의 중간 중간에 테이프로 노래를 들려주거나 직접 부르면서 교육을 하면 되겠구나' 했다. 그렇게 해서 <슬라이드와 노래로 보는 근현대사> 강의가 만들어졌다. 그 강의가 업그레이드된 것이 바로 '박준성' 하면 떠오르는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다.

그는 슬라이드를 만드는 과정을 '혼을 담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카메라로 현장이나 자료를 찍고 현상을 한다. 다시 슬라이드 필름을 한 장 한 장 자른 뒤, 형광판에 놓고 일일이 확인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추린 필름을 마운트를 씌워 다시 형광판에 올려놓고 보면서 넣다 뺐다를 반복해 순서를 정한다. 그렇게 온 정성을 담아 슬라이드 200~300장의 순서를 정하면서 교육을 준비한다. "초창기에는 노동조합에서 미리 사진을 받았어요.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투쟁 슬라이드를 보여준 뒤, 마지막에 그 교육을 듣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깃발을 보여 줬죠. 우리들의 투쟁이 역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지금도 그는 교육을 준비하면서 슬라이드의 순서를 바꾸는 작업을 계속한다.

강의 역사만 25년이니 1년에 50회씩만 쳐도 1200회가 넘는 교육을 했다. 그 교육 과정에서 만났을 수만 명의 노동자들. 나처럼 그 강의를 들으면서 감동받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특별히 감동받은 어떤 사연이 있다기보다는 강의 듣는 사람들이 눈빛으로 이야기하죠. 또 그들이 보여주는 눈물과 웃음이 있잖아요." 그는 눈물과 웃음은 연대의 윤활유이자 접착제라고 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내 아픔처럼 생각해서 눈물 흘리며 돕고, 남의 즐거움을 내 기쁨처럼 느끼면서 웃음으로 나누는 것이 연대의 힘이자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모습 아니겠냐고.

산은 또 다른 해방구

박준성 선생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 산처럼 꿋꿋하게' 노동자교육활동가로 25년을 살아왔다.
 박준성 선생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 산처럼 꿋꿋하게' 노동자교육활동가로 25년을 살아왔다.
ⓒ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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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산'이고, 꿈이고 희망이고 해방입니다."

그는 투병 과정을 '그동안 좋아하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끊고 천천히 기억 속에 묻어 두었다가 과거를 뒤적여 그리워하면서 차츰차츰 새로운 것들과 익숙해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 되는 더 많은 것들과 새로운 것들을 인사시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 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인 '역사와 산'은 1994년 7월, 그가 주축이 되어 구로역사연구소에서 만든 산악회이다.

어떤 명강의도 실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앎의 충만함을 대신해주지 못하는 법. 그는 느낄 수 있는 역사교육 방식으로 슬라이드 외 역사기행, 특히 산행을 택했다. 사실은 그가 좋아서 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동네 뒷산을 놀이터 삼아 오르내리던 그에게 '산'은 휴식이자 친구였고, 국민의 귀와 입을 막아버리는 정권에 대한 분풀이장이었다. 더구나 그 해방의 기쁨을 여럿이 함께 느낀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은 봉건지배체제에 맞서 세상을 뒤흔들며 일어섰던 농민군이 됐다가 어떤 날은 진정한 '해방'을 이루기 위해 투쟁한 빨치산이 되어 내장산, 지리산 등을 올랐다. 그렇게 <역사와 산>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 산처럼 꿋꿋하게'라는 슬로건대로 15년 동안 한 달도 빼놓지 않고 매달 산을 올라 지금껏 182회의 등산이란 역사를 만들어냈다.

물론 어려운 적도 많았다. 남들 집회하고 싸울 때 눈 질끈 감고 산에 가면서 눈치도 보고 욕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산에서 좋았던 것처럼 저 아래 세상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산을 내려가면 또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기에 남의 눈 개의치 않고 지금껏 왔다.

병마를 딛고 다시 노동자 곁으로

이제 정말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묻자. 죽음이 삶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암을 어떻게 이겨냈냐고. 아니 이겨가고 있냐고. 이건 단순히 아프지 않은 이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은 아니다. 지난해 내 아버지도 폐암수술을 받았다. 내가 임신 중이라고 수술 바로 전 주까지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아버지. 엄마가 해준 이야기가 아직도 가슴 저릿하게 남아 있다. 병을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의연히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엄마와 밥을 먹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셨다고 한다. 한참이 지나도 안 와서 엄마가 화장실에 갔더니 소리 죽여 울고 계셨다고.

그는 2003년 12월 간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암세포는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3번의 색전술과 24차례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색전술 시술을 받은 다음날의 투병일기에 그 고통이 그려져 있다. "밤 10시 반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어나 날이 밝도록 끊어질 듯한 배를 움켜쥐고 변기를 부여잡고 쓴물까지 토해냈습니다…."

하지만 암환자들을 괴롭히는 건 이런 육체적 아픔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다. "전이까지 된 간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이 25%쯤 된다고 해요. 높이 잡아 50%인데, 기분 좋은 날은 사는 50%에 들어갈 것 같고 안 좋은 날은 죽는 절반에 들어갈 것 같죠." 극과 극을 오가는 마음의 상태, 그는 주기적으로 우울증 같은 게 찾아왔다고 했다.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의 힘이 컸죠. 레지던트가 다녀갔다고 쓰면 막 '힘내라'는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려요. 갱도가 무너져도 인터넷만 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밖과 연결되는 끈이 있다는 거잖아요"라면서 그 끈을 통해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사람들이 주는 힘도 있었지만 그 역시 죽기살기로 노력했다. 눈을 뜨면 먼저 '아 오늘도 살았구나' 감사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자리에 누운 채로 체조를 하고 밥을 먹는다. 10가지 이상 섞은 현미 잡곡밥에 채소와 나물 반찬을 30분간 죽이 되듯 씹어 먹는다. 강의는 중단했지만 바람 쐰다는 핑계로 더러 역사기행 안내를 했다. 그때도 버너 코펠을 갖고 가서 따로 끓여 먹을 정도로 음식을 가렸다. 또 '걷는 것이 사는 길'이라 믿으며 매일 한 시간 반씩 걷기를 거르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철저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역사를 믿고 희망을 가져라'라고 얘기했던 자신이 바로 앞에 닥친 역경 앞에 쓰러진다면 거짓을 강의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래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다' 믿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2006년 5월 30일 노동자 교육에 복귀했다. 암 선고를 받고 꼬박 2년 반이 흐른 뒤였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올 때까지 / 우리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동지들이여 / 외로워 마 서러워 마 우리가 있다 / 그대 향한 깃발 들고 나 여기 서 있다

그는 이날의 투병일기에서 그동안 부르고 싶어도 못 불렀던 노래, '동지여 내가 있다'를 부르다가 자꾸 눈물이 나와 끝까지 못 부르겠다고 썼다. '내참, 이래 가지고 강의는 어떻게 하려고. 눈물 좀 흘리며 강의한들 어떠랴.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며 살아온 시간도 있었는데….' 그 시간을 견뎌 그는 노동자들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고맙다"는 아내, 김명희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격려를 지짓대 삼아 암을 이겨내고 다시 노동자교육에 돌아왔다.
 그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고맙다"는 아내, 김명희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격려를 지짓대 삼아 암을 이겨내고 다시 노동자교육에 돌아왔다.
ⓒ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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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해방의 길, 가족도 함께

그가 돌아오는 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결혼하면서 사람들은 갖은 입에 발린 약속들을 다 한다는데, 그는 결혼 전 아내에게 "세상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일은 없다"고 했단다. 참 독하다.

간혹 주례를 볼 때도 백기완 선생님의 주례사를 인용해 "이 땅의 팔팔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어찌하여 결혼을 하면 훌륭한 남편과 착한 아내로만 전락하려고 하느냐!"고 한다. 가정이라는 달팽이 껍질 속에 똬리 틀고 안주하려는 노동자들의 가족이기주의를 꼬집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단다. "이제는 내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들과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봐요. 내가 하는 일이 값지고 보람 있다고 느낄 때 다른 이들도 내 모습을 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느낄 테니까요. 의무와 사명감만으로 하는 운동은 자기 파괴예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죠."

스스로 흥에 겨워 걸어온 길, 아이들도 그 모습이 좋았나 보다. 대학교 1학년이 된 그의 큰딸 인해는 벌써부터 아빠가 붙여준 이름, '인간해방'을 실천하는 길을 찾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일 때, 공권력 투입으로 인해 예정된 교육을 못 했다. 대신 인해는 그 작은 몸뚱이로 '아저씨들'을 지킨다며 쌍용차 공장 앞에서 하룻밤을 지새다가 왔단다. 부전여전이다.

한 번의 행동이 필요해

그는 지난해 숲 해설가 전문가 과정을 마쳤다.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항암치료에 좋다고 해서 배웠던 목공예가 계기였다. 걸음마 배우듯 나무에 조각칼 자국을 하나하나 내다 보니 나무의 옹이와 결이 눈에 들어왔다. 옹이와 결이 심한 나무가 조각할 때 다듬기에 따라 상처와 굴곡이 더 아름답게 살아남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 나무의 근원은 무엇일까. 또 자연을 인간의 필요와 자본의 이윤추구 도구로만 보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나무와 풀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었다. 물론 이런 동기들의 바탕엔 생태적 감수성을 몸에 익히겠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깔려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진보주의자가 되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리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눈으로, 생존과 생태라는 거울에 현실과 미래를 비춰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주의자의 길이 참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강의의 마지막에 이 말을 쓰는가 보다.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번 행동함만 같지 못하다. 새 세상은 언제나 한번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덧.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를 정리하는데 '너무 훌륭한 거 아냐?'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 삶을 따르다간 내 가랑이가 째질 것 같았다. 그래 메일로 물었다. "선생님은 흔들리신 적이 없으십니까?"라고. 그의 대답을 듣고 좀 마음이 놓였다.

"제가 역사 연구자이면서 노동자 교육을 해왔습니다. 다른 연구자들처럼 저도 논문도 많이 쓰고 책도 여러 권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할 때 흔들리곤 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절에 위험이 코앞에 다가올 때는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 한때는 인터넷에서 글을 쓸 때 꼬릿말이 '끊임없이 흔들린다'였어요."

그는 팽이나 자전거 바퀴가 흔들리면서 돌아야 쓰러지지 않고, 나침반의 자침도 흔들려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서 그런 흔들림이 자신을 돌아보고 추스르는 힘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흔들렸기에 더 현장과 '관계'를 맺고 '천사불여일행' 해왔다고.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선 그는 지금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그가 바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해방 공동체'도 그만큼 더 빨리 다가올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9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태그:#박준성, #노동자역사이야기,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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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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