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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 가운데 간이역이 많이 있지요. 아련한 추억을 더듬으며 옛 모습을 찾아 떠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차역은 나한테도 어릴 적 기억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고모님 댁에 오고 갈 때면, 늘 기차를 타고 다녔지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보따리 하나씩 들고 기차역 맞이방(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생각이 나네요. 그땐 저마다 우리처럼 보따리를 든 이들이 무척 붐볐지요. 지금은 지난날처럼 시골 간이역엔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아 어쩌면 쓸쓸하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를 정겨움이 묻어나는 곳이지요.

 

구미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예쁜 간이역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멀지 않다고는 해도 자전거로 50km 남짓 달려가야만 닿는 곳이지요. 올 적 갈 적 모두 100km는 각오하고 가야 합니다. 경북 군위군에 있는 화본역을 목표로 달려갑니다. 이곳은 아주 남다른 볼거리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증기 기관차에 물 대주던 급수탑이 남아있는 화본역

 

구미에서 장천면 오로저수지를 끼고 고갯길을 올라가서 산길을 타고 화본역을 찾아갑니다. 군위에서 우보, 영천까지 가는 길엔 갓길이 매우 좁은데다가 생각 밖으로 지나는 차가 많기 때문에 위험한 찻길을 피해 거의 둑길을 따라 갑니다. 차츰 금빛으로 물드는 들판을 수 없이 지나며, 정겨운 고향처럼 아늑하고 한적한 길을 따라 가을풍경을 보는 재미로 가다 보면, 어느새 우보에서 화본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지요. 거기서도 한 8km쯤 더 달리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중앙선 기찻길을 만납니다.

 

"저기다! 자기야 저기 좀 봐! 저게 급수탑이다."

"맞네. 이제 다 왔나 보다. 가만 이쯤에서 사진 한 장 찍어야겠다. 저 멀리 보이는 급수탑이 참 남다르네."

 

신나게 발판을 밟으며 달려온 길에서 잠깐 멈춰 서서 저 멀리 껑충 높이 솟아오른 급수탑을 바라보면서 기찻길 사진을 찍어봅니다. 맞아요. 우리가 찾아가는 화본역에는 그 옛날 일제강점기 때에 세워진 급수탑이 있는 곳이랍니다. 지난날, 증기 기관차에 물을 대주던 급수탑이지요. 멀찍이 서서 기찻길을 따라 눈을 드니, 키가 엄청나게 큰 급수탑이 보입니다. 멀리서 보는 풍경인데도 꽤 멋스러웠지요.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1리, 마을에 들어서자 좁은 찻길 양쪽으로 지붕이 낮은 몇몇 건물이 들어서있고, 여느 시골마을처럼 푸근한 곳이었답니다. '역전 상회'라는 낡은 간판이 자연스레 우리가 찾아갈 곳을 알려줍니다.

 

화본역은 매우 소박한 곳이에요. 지난 2006년 12월에 지붕을 고치고 새 단장을 했다는데, 현대식 건물이긴 하지만 마치 동화 속에서나 봤음직한 그런 건물이었어요. 너른 마당으로 들어서니, 이 작은 간이역에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걸 보고 조금 놀랐어요. 하지만, 금세 궁금함이 풀렸지요. 마당 안에다가 자기들이 타고 온 차를 대놓고는 내렸는데, 저마다 DSLR 사진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거든요.

 

"아, 이 사람들도 여기에 사진을 찍으러 왔나 보다."

"그러게, 어느 사진 동호회에서 모두 출사 나왔나 보네."

 

기차역 옆문으로 들어가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니, 역에서 일을 보는 직원 한 사람이 나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 옷차림을 보고는 자전거를 타고 왔냐며 구미에서 예까지 왔다고 매우 놀라는 눈치였어요.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찻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분들도 알고 보니, '구미사진 디카동호회' 사람들이더군요. 아마도 사진 동호회에서는 이 화본역이 벌써 꽤나 이름난 듯했어요.

 

"아니, 무슨 일인지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저렇게 와서 사진을 찍고 간단 말이야."

 

또 다른 직원 한분이 플랫폼으로 다가가며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십니다. 아마도 이쪽에서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화본역이 톡톡히 '유명세'를 치르는 듯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매우 키 큰 급수탑이 기찻길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으니 사진 찍는 이들한테는 그만큼 좋은 사진감도 없겠지요?

 

도대체 저 급수탑에서 기차에 어떻게 물을 대줬을까?

 

우리도 저들처럼 기찻길을 넘나들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거의 20미터쯤 되는 저 높은 급수탑을 배경으로 넣고 기찻길과 둘레 풍경을 함께 구도를 잡아 보니, 사진 찍는 맛(?)도 퍽이나 남다르더군요. 게다가 급수탑은 그것만으로도 멋진 사진감이었어요. 담쟁이 넝쿨이 급수탑을 휘감아 돌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어요. 겨울이라면 잎이 모두 떨어지고 마른 줄기만이 쓸쓸하게 급수탑을 감싸고 있겠지요? 그 나름대로 멋질 듯 하더군요.

 

"이야, 신기하다. 급수탑이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다. 저기에서 어떻게 기차에 물을 대준단 말이지?"

"그러게. 나중에 한 번 물어보자. 그건 그렇고 저기 안에 한 번 들어가 보자."

"저기? 들어가는 길이 없는데? 어쩌지?"

"가만, 저기 있다. 저 틈새로 들어가면 되겠다."

"엥? 저길 어떻게 들어가? 저렇게 좁은데?"

 

'개구멍'이라고 해야 하나요?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쳐진 기찻길 밖으로 아주 좁은 구멍이 하나 나 있었어요. 우리가 들어가려면 허리를 잔뜩 숙이고 가야만 했어요. 게다가 커다란 거미가 칭칭 거미줄을 쳐 놓았지요.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겠고, 어떻게든 안에 가보고 싶었어요. 거미한테는 참말로 미안했지만, 거미줄을 몇 가닥만 끊어서 한쪽으로 치우고 몸을 숙여 기다시피 하여 들어갔지요.(거미야, 애써 지은 집을 망가뜨려 미안하구나.) 가까스로 안에 들어 가보니, 잡풀은 꽤 자라 있었지만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이더군요.

 

급수탑 안에는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게 녹슨 깡통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원통으로 된 둥근 급수탑에 조그만 창을 여러 개 내놓아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퍽 남다른 모습이었어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쇠로 된 기다란 파이프 두 개가 공중에 매달려 있고, 누렇게 빛바랜 끈이 주렁주렁 서로 얽혀 있었어요. 급수탑 높이는 한 20m쯤 되는데, 아마도 꼭대기에 매달린 저 파이프가 물을 끌어올리고 물을 대주는 구실을 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봐도 참 신기하더군요.

 


기차나 사람한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급수탑

 

그리고 벽에는 누군가가 여러 가지 낙서를 해놨는데, 마을 아이들이 장난삼아 휘갈긴 듯한 것도 있었고, 또 하나 아주 남다른 글귀가 아주 또렷하게 보였어요. 바로 '석탄 정돈', '석탄 절약'이란 글씨였지요. (이 사진은 며칠 앞서 엄지뉴스 '낙서 공모'에도 보냈습니다.(☞엄지뉴스 보기)

 

이 글씨를 보는 순간, 그 옛날 이 급수탑에 물을 채우고 대주려고 석탄이 쓰였나보다 하는 걸 알겠더군요. 나중에 역무원한테 들은 얘기로는 급수탑 곁으로 작은 시내가 흘렀고 그 물을 끌어 모아 담아놓는 '저수조'가 있었답니다. 그 물을 다시 급수탑으로 끌어올려 맨 꼭대기까지 채운 뒤에 밸브를 열기만 하면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으로 증기기관차에 물을 바로 대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지난날에는 그 곁에 보일러실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로 목욕도 하고, 여기서 쓰고 남은 석탄을 가져다가 집에서 때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그다지 보잘 것 없고 손님도 많지 않은 간이역이지만, 이렇게 큰 급수탑이 있는 화본역은 그 옛날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곳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급수탑 안을 구경하고 다시 '개구멍'으로 나와서 올려다보니, 무척 우러러 보입니다.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고 그저 쓸쓸하게 서서 담쟁이 넝쿨한테 제 온몸을 내어주고 있다지만, 그 옛날 이 마을 사람들과 이곳을 거쳐 다니는 증기기관차한테는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한참 동안 고개 들어 올려다봤습니다. 아마도 이 키 큰 급수탑에서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쓰다버린 석탄을 주워 보태 쓰던 마을 사람들한테도 퍽이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겠지요?

 

 

덧붙이는 글 | 우리가 찾아갔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이야기 들려주신 화본역 권태윤 님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뒷 이야기, 자전거 길 안내와 더욱 많은 사진은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http://www.eyepoem.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태그:#화본역, #급수탑, #간이역, #자전거, #증기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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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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