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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는 제주, 울산, 광주 등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채 진행됐다. 이들은 침구사 양성을 통해서 국민들이 침구 시술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 뜸자리잡기 "줄을 서시오" 3월 23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는 제주, 울산, 광주 등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채 진행됐다. 이들은 침구사 양성을 통해서 국민들이 침구 시술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 정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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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진(長蛇陣).

어제(23일) 오전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가 열리고 있던 잠실을 방문했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에서 행사가 열리는 실내체육관에 이르는 연도를 다양한 연령의 남녀 시민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진료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넘치면서 체육관 관람석까지 올라가 경기를 관전하듯 앉아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고, 구당 김남수 회장이 잠시 행사장 밖으로 나오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와 함성을 보내기도 했다.   

뜸사랑은 체육관 바닥에 약 200개의 병상을 설치했다. 이후 300여 명의 뜸요법사가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주, 울산, 광주 등 전국에서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뇌종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와서 구당 김남수 선생의 손길이라도 한 번 받아보고 싶다고 무조건 매달리는 젊은 부부도 눈에 띄었다.

김남수 회장은 장사진을 이룬 채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에게 "헌법재판관, 복지부장관, 한의사협회 관계자 등에게 직접 참관하고 검증해줄 것을 공개 요청했다"면서 "그분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춘천 등에서 국민과 직접 만나는 이런 행사를 계속 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명의' 허준은 뜸과 침을 놓을 줄 몰랐다

침구사제도 부활시켜 건강보험 적자해결
양방의술 한방의술 통합하면 최고의술
외국은 침구사 양성, 한국은 침구사 말살
환자진료는 의사의 권리가 아닌 의무

행사장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에 적혀 있던 문구였다. 그 중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허준은 한약의! 허임은 침구의!       

허준은 침구술의 전문가가 아니고, 허임이라는 침뜸의 대가가 조선의 침구의원을 대표한다는 뜻인 듯했다. 현재 한의사가 침구의원이 아니고, 구당 김남수 회장 등 침구사가 침구의원이라는 점을 나타내고자 한 구호였다. 하지만  소설과 드라마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허준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를 바로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앞서 필자는 첫 기사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어느 정사에서도 허준이 침과 뜸을 시술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소신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심야에 어의 허준이 국왕에게 고했던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소신즉부지침법(小臣則不知針法)'이라는 일곱 글자로 기록돼 있듯이, 허준이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소설 동의보감>과 밤거리를 한산하게 만들었던 전설적 TV 드라마 <허준>에서 그려낸 '허구적 인물' 허준은 침과 뜸으로 멋지게 환자를 고쳤다(<소설 동의보감>의 작가는 허준을 아예 '혜민서 침구과에 근무하는 의원'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미암일기> 등의 정사에 기록된 '실제적 인물' 허준은 결코 침과 뜸으로 환자를 치료하지 않았다.

조선의 의료제도는 세종과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상당한 분업화와 전문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허준과 허임이 활약했던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첩약을 전문으로 다루는 의원과 침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침의의 의술 영역이 분명히 구분되었다. 요즘 의약 분업이 철저히 이루어져 있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세종과 성종 연간의 조선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일 정도로 '선진국'이었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현실과 괴리된 상상과 판타지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소설이나 드라마라면 모를까 정사에서도 허준이 침과 뜸으로 환자를 치료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다. 요즘의 의료 기준을 적용해서 비유해 본다면, 그것은 마치 약사가 의사처럼 외과수술까지 멋지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뇌리에까지 깊이 침투해 정설처럼 각인돼 있다는 점이다. 소설과 드라마가 만들어낸 이른바 '허준 신화'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침구 영역를 둘러싼 본질적 의료논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침뜸 놓는 허준의 모습, 허구적 이야기일 뿐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장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 중에는 "허준은 한약의! 허임은 침구의!"라는 문구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백성을 치료했던 조선 최고의 침구 명의 허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질 전망이다.
▲ 침구의 원조는 허임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장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 중에는 "허준은 한약의! 허임은 침구의!"라는 문구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백성을 치료했던 조선 최고의 침구 명의 허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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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허준의 진료 모습부터 살펴보자. 

"전하가 쓰러지셨다!"

선조 40년(1607년) 10월 9일 새벽.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편전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서던 국왕이 기(氣)가 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진 것이다. 제일 먼저 왕세자(광해군)가 달려 왔다. 영의정과 대제학 등 정승급 대신이 겸직하고 있는 내의원의 도제조, 제조, 부제조가 곧이어 입시했고, 춘추관에 배속돼 있던 기사관(記事官) 세 명도 그들을 따라왔다.

왕실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누가 왔을까? 실록에 따르면, 어의 허준을 필두로 조흥남, 이명원 등 의원 세 명이 입시했다. 그리고 내관과 약을 받든 의관들이 침실 밖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존인 국왕이 기가 막혀 쓰러진 위급한 상황에서 침을 놓을 것인지, 뜸을 뜰 것인지, 약물을 처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어의 허준의 몫이었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묘사된 허준이었다면 당장 침과 뜸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는 허준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던 환자를 침과 뜸으로 기사회생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허준은 병자를 봉당에 반듯이 눕히자 침통을 끌러 버선도 없는 병자의 앙상한 발바닥을 자기의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 호침(毫鍼)을 뽑아 병자의 용천(湧泉 : 발바닥의 움푹 팬 중앙)을 취했다. 신과 연결된 곳이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는 급소요 호침은 경락 중에 심한 마비를 다스릴 때 쓰는 침이었다. 병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준은 이어서 폐에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소상(小商 : 왼쪽 엄지손톱 옆)과 어제(魚際 : 왼손 엄지 아래 살점의 가장 두툼한 곳)에도 침을 찔렀다. 이윽고 병자가 숨을 새로 몰아쉬기 시작했다."(이은성, <소설 동의보감> 중권 116쪽)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다. 허준은 침과 뜸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침구는 허준의 전문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작가는 소설 속에서 혈자리 중의 하나를 소상(小商)이라고 적었는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을 소(小)가 아니라 적을 소(少), 다시 말해 소상(少商)이 정확한 표현이다.

'일침 이구 삼약'이란 원칙을 지키지 않은 허준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침 이구 삼약(一鍼 二灸 三藥).

동양의학에서 질병을 치료할 때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원칙이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제일 먼저 침을 사용하고, 그 다음에 뜸을 시행하고, 마지막으로 약을 처방하는 진료의 순서를 말한다. 여기서 잠시 허임의 생애와 침의들의 역사를 추적한 신간 <조선 침뜸이 으뜸이라>(허임기념사업회 발간)를 읽어보자.

"(일침 이구 삼약의 원칙은) 침이 급성적이고 돌발적인 질환에 효과가 좋다면 뜸은 만성적인 질병에 허약증이 있을 때 많이 응용된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일침기사회생(一鍼起死回生) 이구만병능치(二灸萬病能治)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69쪽)  

그런데 허준은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쓰러지기 20일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국왕을 진료했던 침의들이 붕어하는 이듬해 2월 1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조는 1607년 3월 21일부터 26일까지, 8월 29일부터 9월 19일까지 연속해서 침을 맞은 바 있다.(동의대 대학원 석사논문 <조선시대 명종, 선조, 광해군의 질병에 대한 연구> 68쪽)

물론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는' 이 사실에 주목했던 역사학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하지만 의학적 시각으로 보자면 1607년 10월 9일 궁궐 안에서 뭔가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참고로 선조와 영의정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小北)은 서자인 광해군(1570~1623년)을 왕세자에서 끌어내리고 갓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1606~1614년)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임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며 백성의 마음을 얻었던 38세의 광해군, 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정인홍과 이이첨의 대북(大北) 세력과 미묘한 정치적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기사의 본령이 아니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선조와 허준, 둘에게 동시에 닥친 위기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가 열린 잠실실내체육관은 침뜸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일반 국민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 퇴행성 질환과 만성 질환에 시달려온 많은 어르신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진료 현장을 찾았다.
▲ "맘껏 침뜸 치료 받았으면..." 뜸사랑 대국민 뜸자리 잡기 행사가 열린 잠실실내체육관은 침뜸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일반 국민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 퇴행성 질환과 만성 질환에 시달려온 많은 어르신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진료 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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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날 어의 허준은 일침과 이구를 생략하고 삼약을 처방했다. 실록에는 허준이 올린 약물 목록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청심원(淸心元), 소합원(蘇合元), 강즙(薑汁), 죽력(竹瀝), 계자황(鷄子黃), 구미청심원(九味淸心元), 조협말(皂莢末), 진미음(陳米飮).

이와 관련해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에서 "강한 약제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 교수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잠시 후 밝혀질 것이다.

강한 약제 처방으로 기후가 조금 안정된 선조는 "이 어찌된 일인가, 어찌된 일인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날 오후부터 다시 선조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국왕이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자 허준은 다시 약물을 처방했다. 실록의 기록을 직접 보면 다음과 같다.

"상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자 청심원, 소합원, 죽력, 강즙, 계자황 등 약을 번갈아 올렸는데, 오래도록 호흡이 가라 앉지 않고 가래도 성하여 이진탕(二陳湯)에 천남성(天南星), 방풍(防風), 맥문동(麥門冬), 박하(薄荷)를 가미하여 1복을 달여 올렸는데 반쯤 진어한 후에야 가래가 조금 가라앉았다."

1604년 9월 23일 선조의 편두통 발작 당시 탁월한 치료 효과를 보았던 허임 등의 침구 진료가 배제된 채 과도할 정도로 약물 투여가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첩약으로 일단 고비는 넘겼으나 선조가 쓰러진 뒤 사간원과 사헌부 등에서 어의 허준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허준이 "독한 약"(사간 송석경)과 "찬 약"(대사간 유간)을 많이 써서 국왕의 건강을 악화시켰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국왕의 병이 워낙 위중한 상태라 어의에 대한 탄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선조는 허준의 약제 처방에 대해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록은 그해 12월 3일 선조의 전교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탕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다(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고 하는가. 의관(醫官) 중에 허준(許浚)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이러한 뜻을 알고서 처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허준이 뛰어난 의술을 지닌 좋은 의원이긴 하지만 약물을 과용하고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던 중 해가 바뀌면서 선조와 허준에게 동시에 위기가 왔다. 아니 허준에게 그것은 재기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허준, 침구 아닌 첩약으로 승부했던 의원

선조 37년 (1604년) 9월23일 허준은 왕이 침을 맞는 것에 동의하면서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 한다"고 말하며,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는 허임의 이야기를 전한다.
▲ 허준 아뢰기를 "소신은 침놓는 법을 모릅니다" 선조 37년 (1604년) 9월23일 허준은 왕이 침을 맞는 것에 동의하면서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 한다"고 말하며,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는 허임의 이야기를 전한다.
ⓒ 허임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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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가 또 쓰러지셨다!"

1608년 2월 1일 선조가 다시 쓰러졌다. 하지만 어의 허준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했다. 아니 선조의 운명이 이미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허준은 이번에도 일침과 이구를 생략하고 삼약을 처방했다. 강즙(薑汁), 죽력(竹瀝), 도담탕(導痰湯), 용뇌소합원(龍腦蘇合元), 개관산(開關散) 등의 약제가 국왕에게 올려졌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광해군이 의식을 잃어버린 국왕을 마지막으로 진찰하라고 지시하자 허준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편전 안에서 25세의 젊은 중전(인목대비)이 토해내는 곡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가 57세를 일기로 붕어하고 광해군이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게 됐음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국상이 끝나고 어의 허준은 임금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로 추국의 도마에 올랐고, 결국 귀양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이듬해인 1609년 11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허준을 석방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허준은 전임 어의 양예수가 손대기 시작했던 <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본 것처럼 허준은 침구로 승부했던 침의가 아니라 첩약으로 승부했던 의원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의 사회상을 기술한 일부 사대부의 일기와 문집 등에 나타난 의원 허준의 진료 모습을 계속해서 살펴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허임기념사업회가 최근 발간한 <조선 침뜸이 으뜸이라-허임의 생애와 침의들의 역사를 찾아서>에 상당 부분 의존해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태그:#허임, #허준, #구당, #침구,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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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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