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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들고 싸워봐야 왜적의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의병에 참여하면 가족의 삶도 보장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왜적을 치러 나가면 목숨을 잃게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떨쳐 일어섰던 이가 한말의병이었다."

호남의병장 전해산(全海山, 1878~1910, 본명 基洪, 일명 垂鏞,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선생의 삶을 정리한 책 <호남의병장 전해산>(상·하)을 엮은 이태룡 문학박사가 한 말이다.

이태룡 박사가 정리한 책 <호남의병장 전해산> 상하권 표지.
 이태룡 박사가 정리한 책 <호남의병장 전해산> 상하권 표지.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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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100년이다. '국치 100년 전북시민대회'(위원장 이석영)의 하나로 호남의병장 전해산 선생을 기리는 추모식이 23일 전북 전주시청에서 열린다. 강연회와 사진자료 전시회 등이 예정돼 있다. 1910년 8월 23일은 전해산 선생이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날이다. 재판을 받은 지 사흘만이다.

대동창의단·호남동의단 결성해 의병 진두지휘

임실 출생으로, 목숨을 걸고 일제 침략을 저지하고자 했던 전해산 선생은 의병부대 명칭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이라 했다. 해산군인과 포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던 대동창의단은 구한국 군대의 전통적인 편제를 갖추고 일원적인 지휘계통으로 구성되었다.

전해산 선생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과 함께 호남의병의 연합조직을 결성했다. 1908년 겨울 이들은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탄생시켰고, 전해산 선생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호남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모두 참여한 것이다.

의병장 전해산 선생.
 의병장 전해산 선생.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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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대동창의단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거나, 한국인 밀정과 일본 수비대, 경찰을 주축으로 하는 변장정찰대를 구성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

1909년에 들어와 탄압은 더 심해졌다. 결국 전해산 의병부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이 위축되어 갔고, 그해 4월 전투에서 잇따라 패한 뒤 재기가 불가능한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전해산 의병장은 그해 12월 17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8월 23일 순국했다.

이태룡 박사는 전해산 의병장이 의병투쟁을 벌일 때 손수 쓴 <진중일기>('전해산 진중일기'로 통칭)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속에 나오는 내용(상권), 광복 후 친족과 장수향교에서 펴낸 <해산창의록>을 번역하고 전해산 의병장에 관한 논문이나 기사들을 묶은 것이라고 소개한 후 전해산 선생이 의병장에 추대된 경위와 의병투쟁 과정에 대한 설명(하권)을 해놓았다.

의병 살육전 벌인 '왜적들'

한말 의병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태룡 박사는 23일 추모식 때 전해산 의병장에 대해 강연한다. 그는 미리 낸 자료를 통해 한말 의병을 소개했다.

"100년 전 한말의병은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목숨을 내던지고 왜적(倭賊)과 싸워야 했다. 과거 임진왜란 때나 (고려 때) 몽골군을 상대로 싸웠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옛날에는 무기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에 의병투쟁은 군인과 민간인의 싸움 정도에 비할 수 있겠으나 창이나 칼, 화승총을 든 한말의병이 6연발총과 기관총을 휴대하고 기마병까지 동원된 왜적을 상대로 승부를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가 정리한 '왜적들'의 주요 의병 살육전은 다음과 같다.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왜경(倭警)이 간여한 살육전 횟수 1976회, 의병수 8만2767명, 순국자 5721명, 포로 1081명, 불탄 집이 1991채였고, 의병 살육을 위한 왜군(倭軍)은 북부수비관구에 보병 6개 연대, 기병 1개 연대, 야포병 1개 연대, 공병 1개 대대를, 남부수비관구에 보병 3개 연대, 기병 1개 대대를 동원했으니, (일본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때보다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의병 살육전을 전개했다."

이태룡 박사는 "왜적은 호남의병 살육을 위해서 1908년 2월 기구지(菊地) 대좌를 대장으로 대규모 살육부대를 편성하고 3월까지 의병 대살육에 나섰다"면서 "이 기간 동안 150여 회에 걸친 살육전으로 의병이 입은 피해는 사망 756명, 부상 수백 명, 포로 700여 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또 그는 "1909년에는 이른바 '남한 의병 대토벌'을 위해 일본군 2개 연대를 동원했는데, 1개 연대는 경남 서부지역에서, 1개 연대는 전북지역에서 각각 전남 방면으로 의병 살육에 나섰으며, 9월 1일에 시작된 대살육전이 두 달 동안 전개되어 420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687명이 체포되었다"고 밝혔다.

전해산 선생 손자 "아버지가 어느 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태룡 문학박사.
 이태룡 문학박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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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위원장은 책 <호남의병장 전해산>의 추천글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100년 전에 이미 나라를 잃으면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한 선각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들은 의병이었다"고 설명했다.

"국치 100년을 맞기까지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우리 의병들의 공적을 하루빨리 찾아 민족의 이름으로 기려야 한다. 우리 민족이 못나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일제의 지배가 도움이 됐으며 오히려 정당했다는 논리는 결국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했던 매국노와 부왜인(附倭人)들의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제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여 민족정기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전해산 선생 손자 영복씨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부친은 일제의 횡포로 인해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겨우 열 살이 지나면서부터 꼴머슴으로 성장했다"며 "그 때문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밝혔다.

"일본헌병대에 붙잡힌 네 조부께서는 오랏줄에 묶인 채, 20리 떨어진 곳에 사시던 증조부모님께 새벽같이 하직인사를 올리고 헌병대로 끌려가셨다. 증조모님께서는 그 충격으로 쓰러져서 다음날 돌아가셨고, 증조부님께서도 채 석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단다."

영복씨는 "할아버지가 일본군경과 싸우면서 친히 기록했다는 <진중일기>만해도 많은 역경을 거쳐 보관해 오면서 날짜 등이 뒤엉켜 있었다"면서 "방대한 <한국독립운동사> 8~19권 속에 흩어져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을 찾아 정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책을 할아버지 영전에 바치며, 수많은 순국선열과 이름조차 없이 스러져간 의병들의 숭고한 삶과 얼을 기리고 계승하는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거제옥포고 교사인 이태룡 박사는 '교장공모'에 뽑혀 9월부터 전북 무주 소재 푸른꿈고등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태그:#경술국치, #호남의병, #전해산 의병장, #이태룡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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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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