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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야, 이제 와서 그걸 말이라고 해!" 선배의 고함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휘어 팠다. "미안해요, 집사람이 워낙 반대해서…." 선배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선배가 그토록 분해하는 것은 당연해서 죄인으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한 영사관에 근무하는 선배를 광화문 종합청사에서 만난 것은 한 보름쯤 전이었다.

 

업무차 일시 귀국한 선배는 계약직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막막했던 때였다. 징계를 당하고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발령까지 났다. 하루하루가 힘겨웠고 무기력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탈출구를 찾을 궁리에 빠져있던 차였다. 직장에서는 외톨이였다. 의기투합했던 동료는 자리를 떠났고 남은 자들은 남 같았다. 행여 아는 척 하는 양도 불이익을 당할까 몸을 움츠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업무방해로 경찰에 불려 다니기는 했어도 여권이 나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여권 담당자는 조회를 하더니 빤히 쳐다보며 현재로서는 여권발급이 불가능하단다. 경찰서를 가니 검찰로 가란다. 검찰에서는 벌금을 내더라도 풀리려면 한 달 이상은 걸릴 거란다. 선배가 준 시간은 보름정도였으며, 여권과 함께 이력서 등 구비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일정상 그래야 정해진 스케줄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멀리서나마 다른 입을 통해 나의 생활을 간간히 들었던 모양이었다. 걱정이 되었던지 "안기부에서 뒷조사 할지 모르니까 졸업하고 그냥 고시준비하고 있었다고 그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다시 다짐을 받았다. "문제될 거 없는 거지?" 이랬던 선배에게 '전과로 여권이 안 나옵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래 근무지로 출국을 앞둔 선배에게 집 사람을 핑계 대니 선배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미리 예기했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구했을 거 아냐"라는 호통이 무리는 아니었다. 선배는 적임자를 정해놓았다고 상사에게 단단히 보고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배 따라갈 후배들이 줄을 섰었다. 결국 대타로 나와 동기인 그 중 하나가 선택되었고, 그는 계약기간이 끝나고 현지에 남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교민 모임을 하면 고급식당을 통째로 빌려버린다고 했다. 선배는 처음 제안할 때부터 돈이 되는 사업을 이야기했으며, 동기는 거기에 적중했다.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 그 선배에게 미안함이 남아 있다.

 

징계는 이직의 올무임과 동시에 새로운 동기가 되었다. 그 후 또 한 번의 징계가 있었다. 안팎으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웃겠지만 월차가 없었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월차를 달라고 집단휴가를 낸 것에 주동자로 몰려 당한 징계가 어긋남의 시작이었다.

 

부처 산하기관으로 기본적 노동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때였다. 법적으로 대응도 했지만 법은 언제나 강자 편이었다. 감독부처에서 징계지시가 떨어지고, 이행에 차질이 생기면 특별감사를 명목으로 철저히 보복했다. 아수라장이자 정글이었다.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정교하고 강력하게 조직화된 정부의 힘을 등에 업은 회사에 넘치는 혈기로 '전태일 열사' 정신을 외치는 갓 입사한 일부 직원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시간들을 헤치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입사 동기들은 승진을 거듭했다. 정부가 바뀌며 사면이 있었지만 잘못된 첫 단추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아니, 퇴직할 때까지 계속될 공산이 크다. 남들처럼 똑같이 올라가면 무엇인가에 대한 배신이라는 무의식이 현재의 주범이었다.

 

군사정부와 민주정부라는 격동기와 함께 젊음을 모두 태워버린 이 직장이 분명 제대로 된 만남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시대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이같이 어긋나고 잘못된 시대와 일터와의 만남이 혼자 뿐이겠으랴.

 

그리고 그러한 만남들의 축적과 쌓임이 모두를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겠는가. 불화 없는 제대로 된 만남만 있다면 결국 우리는 후퇴만 보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 응모 글


태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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