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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수)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해가 뜨기 전과 후의 기온에 큰 차이가 있다. 겨울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겨울이 오기 전에 이 여행을 끝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점점 더 강해진다. 내일이면 여행을 떠난 지 꼬박 한 달이 된다. 그런데 여전히 '땅끝'을 밟지 못했다. 이런 추세로 동해안 고성군까지 가는 데 얼마나 더 많은 날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아침 기온이 꽤 쌀쌀하다. 바람막이 점퍼 안으로 찬 기운이 스며든다. 이 상태에서 날이 더 추워지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임회면을 나와 금갑해수욕장을 찾아가는 길에 산그늘이 짙다. 여귀산 산자락을 지나가는 길이라 공기는 더없이 시원하고 맑은데,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 많아 몸이 으슬으슬하다.

진도군에선 특이하게 이렇다 할 해수욕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이라는데, 이름이 나 있는 해수욕장 하나 갖춰져 있지 않은 게 조금 의아하다. 어제 저녁에 서망해수욕장을 지나쳤다. 도로표지판에 서망해수욕장 가는 길이 표시가 되어 있어 열심히 달려갔는데,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해수욕장이었다.

서망해수욕장은 크기가 초미니다. 해수욕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다. 심하게 말해 손바닥보다도 더 작다. 그렇게 작은 해수욕장마저,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망해수욕장은 근처 팽목항 확장공사로 폐장했다고 한다. 공사 현장에서 흘러드는 부유물질로 수질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난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찾아가는 금갑해수욕장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규모나 시설 면에서 별로 내세울 게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역시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도 작고 시설도 보잘것없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멋은 있다. 해변을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마저 든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온다면 조용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금갑해수욕장
 금갑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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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용하고 아늑한 해변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열심히 갯벌을 더듬고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바지락을 캐는 것하고 또 다르다. 끝이 날카로운 조새 등으로 갯바닥을 여기저기 탕탕탕 두들긴다. 그러다가는 어느 지점에서 갯벌을 파헤친다. 아주머니 곁에 밥솥만한 냄비가 딸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맛조개가 반쯤 차 있다. 뜻밖이다. 그 귀하기 짝이 없는 맛조개가 이렇게 작은 해수욕장 갯바닥에서 잡히고 있다니,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아주머니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시 물었다. 펄을 밟지 말란다. 펄을 밟으면 맛조개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런, 그 말을 듣고 나서는 그 다음엔 어디로 발을 옮겨 디뎌야 할지 알 수 없다. 갯바닥이 펄과 모래가 적당히 뒤섞여 있어 상당히 단단하다. 그런데 그런 갯바닥을 밟지 말라니, 맛조개란 놈 상당히 예민한 게 분명하다.

조새 등으로 땅을 두들기는 것은 맛조개가 숨어 있는 델 찾기 위해서다. 잘 들으면 소리가 다르다는데 나는 도무지 그 차이를 모르겠다. 갯바닥을 두들기다 소리가 다르다 싶은 곳을 조새 끝으로 파헤치고는 그 안에 소금물을 조금 뿌린다. 그러면 맛조개가 쏙하고 얼굴을 내민다. 그때 그놈을 손가락으로 쑥 잡아 뽑는다.

곁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맛조개 잡기 참 쉽다. 물론 아주머니한테 해당되는 말이다. 나중에 혹시 어디 가서 써먹을 일이 있을지 몰라, 아주머니가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하지만 그만 소리를 구분하는 일에서 포기한다.

아주머니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완도 사투리가 전라도하고도 또 다르다는 걸 발견한다.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서울말'로 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안 된다. 조심스럽게 걸어서 해변을 빠져나온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아주머니는 계속 갯바닥을 두들기고 있었다.

 해수욕장에서 캐낸 맛조개
 해수욕장에서 캐낸 맛조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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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수욕장 한쪽에서 맛조개를 캐고 있는 아주머니
 해수욕장 한쪽에서 맛조개를 캐고 있는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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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갑해수욕장에서 고군면 '신비의 바닷길'까지 가는 길이 매우 복잡하다. 할 수 없이 지도상에 그려져 있는 길을 포기하고,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에 집중한다. 그 길이 어떻게 해서든 나를 신비의 바닷길로 이끌 것이다. 이럴 땐 지도보다, 도로 표지판이 더 유용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신비의 바닷길에 도착하기 전에 삐에르랑디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삐에르랑디, 진도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삐에르랑디는 신비의 바닷길을 세계에 알린 프랑스인이다. 그는 진도에 잠시 들렀다 진도 앞바다가 쩍 갈라지는 걸 광경에 너무 놀라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는 내용의 글을 프랑스 신문에 게재했다.

그로 인해 신비의 바닷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 공원은 그의 그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내가 보잘것없다고 소홀히 해온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엔 무척 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고군면 동쪽 해안도로
 고군면 동쪽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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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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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이 유명해진 뒤로, 이 지역에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바닷길이 열리는 지점을 공원화하는 한편으로 관련 전설을 되살리고 상징화하는 작업이 계속돼 왔다. 그 과정에서 '뽕할머니'가 되살아났다. 뽕할머니는 진도 고군면의 앞바다가 열리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전설이다.

바닷길이 어느 날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뽕할머니가 행한 기도의 결과라는 거다. 섬에 홀로 남아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뽕할머니가 바닷가에서 '용왕님'께 기도를 올린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용왕의 마음을 움직여 바다가 열린다. 모세가 행한 기적이 뽕할머니에게도 똑같이 일어난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신비의 바닷길 앞에, 뽕할머니가 일으킨 기적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찾아온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바다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 뽕할머니 조각상 앞에서 한창 굿이 벌어지고 있다. 뽕할머니는 지극히 평범하고 수더분한 인상이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 신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하다.

 뽕할머니영당.
 뽕할머니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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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뽕할머니 동상. 바닷길이 열리는 모도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뽕할머니 동상. 바닷길이 열리는 모도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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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기적의 땅을 떠난다. 신비의 바닷길 이후로 전개되는 고군면의 바닷가길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신비의 바닷길이 아니더라도, 고군면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법한 길이다. 해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서쪽 해안을 지나가는 세방낙조로만큼이나 아름답다. 길은 넓고 쾌적하다. 차량마저 드물어 자전거타기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도를 빠져나가기 직전에 '삼별초 궁녀 둠벙'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안내판이 눈에 띈다. 안내판이 탈색이 심하고 훼손이 많이 돼 있는 걸로 봐서 그리 관리가 잘되고 있는 곳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명칭이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첫 번째 이정표를 그냥 지나쳤다가 두 번째에서 결국 핸들을 꺾는다.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물웅덩이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느 물웅덩이보다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진도에서 삼별초가 몽골군에 쫓길 때의 이야기다. 삼별초가 왕으로 내세운 '온'을 모시던 궁녀들이 있었다. 그 궁녀들이 몽골군에 쫓기다 적에게 욕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함께 이곳 둠벙에 몸을 던졌다는 설명이다.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것과 흡사하다.

백제에 이어 고려시대에까지 여자들이 한꺼번에 물로 뛰어들어야 하는 안타까운 역사가 계속됐다. 삼별초 궁녀 둠벙은 그냥 간과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곳이다. 둠벙 주변을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공원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실상은 작은 동산에 불과하다. 둠벙 물가에 동백나무를 심은 건 땅에 떨어져서도 싱싱한 기운을 잃지 않는 그 붉은 꽃이 궁녀들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뽕할머니의 기적이 이들 궁녀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진도에 와서, 명량대첩에서 보여준 진도 사람들의 충정도 그렇고 삼별초를 대하는 진도 사람들의 진지한 열정도 그렇고, 진도 사람들만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진한 사람들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달린 거리는 80km, 총 누적거리는 2064km다. 금갑해수욕장을 벗어나 얼마 안 간 지점에서 2000km를 돌파했다. 그새 5000리를 넘어섰다. 아무래도 이 여행이 1만리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삼별초 궁녀 둠벙.
 삼별초 궁녀 둠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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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대교에서 내려다본 전라우수영 관광지.
 진도대교에서 내려다본 전라우수영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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