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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말까지 43회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제7일 2009년 11월 1일]

 

오전 6시,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서 푹 자자 몸이 한결 가뿐했다. 다시 짐을 꾸렸다. 어제 두 선생님에게 가지고 온 선물(홍삼)을 전달하자 세 덩이의 짐이 두 덩이로 줄었다. 하지만 무게는 별로 줄지 않았다.

 

 하얼빈-지야이지스고 열차표

텔레비전을 켜자 일기예보를 하는데 '쾌청(快晴) -2 / -13도'라는 자막이 나왔다. 나는 중국말은 잘 모르지만 한자는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중국이나 일본여행은 한결 편했다.

 

일찍이 할아버지에게 목침 위에서 회초리 맞으며 배운 것을 평생 우려먹고 산다. 할아버지는 그때 나에게 말씀하셨다. "동양 삼국에서는 한자를 알면 다 통한다"고. 그 말씀이 명언일 줄이야.

 

나는 짐을 꾸린 뒤 지하 찬청(餐廳,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은 어디나 아침은 간소했다. 하기는 우리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멀건 쌀로 쑨 죽 한 사발에, 삶은 계란 두 개를 소금에 찍어 먹고, 후식으로 과일을 많이 먹어두었다. 답사 때는 가능한 야무지게 먹어두는 게 좋다. 다음 끼니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개장

 

8시 30분, 김우종 선생이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오셨다. 하얼빈 역에서 지야이지스고(채가구) 가는 열차 태워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내가 어제 찍은 사진이 이른 아침시간으로 그늘이 졌다고 선생에게 말씀드리면서 하얼빈 역으로 가기 전에 택시를 대절하여 한 바퀴 더 돌자고 부탁하였더니 그 청을 흔쾌히 들어주셨다.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

김 선생은 내가 하얼빈을 떠난 뒤 다롄까지 또 혼자 여행함을 알고서는 염려가 되셨는지 즉석에서 소개장을 써주셨다.

 

역원이나 공안에게 당신 소개장을 보이면 잘 인도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기는 2000년도 항일유적 답사 때도 선생이 써준 소개장으로 가는 곳마다 귀빈 대접도 받고 요긴하게 썼던 전력이 있었다.

 

좀 챙피하고 내 못난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국내에서보다 국외 답사 여행에서 더 대접을 받는다. 맘모니즘(mammonism, 배금주의)이 가득한 세태에 글쟁이, 특히 '항일'을 더듬는 작가는 별 볼일 없는, 시대를 역행하는 못난이로 여겨지나 보다.

 

나와 김 선생은 빈관 앞에서 택시를 대절하여 옛 일본영사관, 조린공원을 후딱 돌았다. 어제와는 달리 가는 곳마다 플래시를 써가며 촬영을 마치고 부지런히 역에 가니까 9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지야이지스고 행 열차는 오후 1시 33분에 있었다. 지야이지스고는 작은 역이고 완행만 서기에 그렇다고 했다.

 

3시간 남짓 여유가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임시보관소에 맡긴 뒤 구내 찻집으로 갔다. 김 선생은 작별 전 허형식 의사가 산화한 경성현 관계자들이 허형식 공원과 추모비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는 내 취재수첩에다가 허 장군의 고향 구미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적고는, 나에게 그 다리를 놓아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김 선생 면전에서 실망시켜 드릴 수 없어 알아보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나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구미의 정서를 모른 듯하여 매우 안타까웠다. 왕산 허위 선생 후손이 백년 만에 중앙아시아에서 귀향을 해도 구미시에서는 거처와 직장을 마련해 주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제에 대항한 '항일연군'의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선뜻 독립유공자로 끌어안아 주겠는가. 장군의 전력과 이념을 들먹이면서 외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게다. 이런 풍토인데도 장군의 순국지라는 빌미로 구미시가 경성현과 선뜻 자매결연을 해주겠는가.

 

 고층 건물이 즐비한 하얼빈 도심

 

水餃子(수교자)

 

 하얼빈 거리의 거지

김 선생과 작별한 뒤 혼자 역 앞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다가 바람까지 세차 몹시 추웠다.

 

이런 날씨에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동냥하는 거지도 보였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할 수 없나 보다. 역 일대에서도 커피숍이 눈에 띄질 않았다. 김우종 선생의 말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자주 먹고 즐겨먹는 게 '水餃子(수교자)' 곧, 물만두다. 중국 요리 이름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물만두는 값도 싸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만두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나와도 겨우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느긋하게 하얼빈 역을 카메라에 실컷 담았다.

 

그래도 개찰 시간이 두 시간은 더 남았다. 역 대합실을 살피니 마침 2층에 PC방이 있었다. 거기서 인터넷을 연결하여 그동안 밀린 메일을 다 읽고 국내소식도 알았다. 이상하게도 바깥에 나가면 국내소식이 그 소식이 그 소식으로, 며칠 건너뛰어도 그만이었다. 

 

 오늘의 하얼빈 역

 

일반 대합실 개찰구는 사람들이 엄청 붐벼 짐이 많은 나로써 엄두를 낼 수 없어 일등 대합실을 이용했다. 12시 50분 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을 거쳐 객차에 올랐다. 1548열차 12차 41호 좌석이었다. 잠시 후 일반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데 잠깐 새 객차는 만원이고 짐은 선반뿐 아니라 통로에까지 가득 찼다.

 

순간 나는 어제 이른 아침에 안중근 의사 의거지 하얼빈 역 플랫폼 촬영한 게 떠오르며 그림자가 진 게 삼삼했다. 내가 언제 여기를 다시 촬영할 수가 있겠는가.

 

가방을 선반에 둔 채로 노트북 가방에 카메라를 어깨에 멘 채 의거 장소로 냅다달려 가 서너 컷을 찍은 뒤 헐떡이며 객차로 돌아왔다. 그새 내 자리에 한 호로(胡老, 중국노인)가 앉고서는 비켜 줄 생각도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포기한 채 통로에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로 여간 불편치 않았다.

 

지야이지스고 행 열차

 

우리나라도 1970년대까지 그랬다. 완행열차 좌석도 2인석이지만은 으레 3인석이었고, 선반 위나 바닥에서도 누워 가는 이도 있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밤 열차를 타고 가는데 좌석이 없어 서서 가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몰려오는 잠을 참을 수 없어 객차 사이 빈 공간에 신문지를 깔고 쪼그려 앉아 꼬박 졸면서 간 적도 있었다.

 

거기다가 그 시절은 무임승차 승객이 많았다. 여객전무가 차표 검사라도 할 때면 무임승객들이 몰려다니느라 엄청 소란스러웠다. 나는 지야이지스고로 가는 열차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5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중국 동북지방 완행열차 안 풍경

 

필담

 

오후 1시 35분, 열차는 올드랭사인이 울리는 가운데 출발했다. 내가 통로에서 지나가는 승객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아무 말도 없이 차창 밖만 바라보며 서서 가자 한 젊은이가 선뜻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했다.

 

나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취재수첩에다 "謝(사) 謝(사)"라고 쓰고는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시했다. 내가 그의 신상을 묻자 그는 학생으로 이름이 '이경국(李慶國)'이라고 취재노트에 적었다. 객차 언저리 승객들이 나에 대해 질문을 마구 쏟았다.

 

나는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어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을 보이자 한 젊은 여성이 그걸 읽고는 눈에서 광채가 나듯이 반기며 필담으로 물었다.

 

"韓國(한국)? 朝鮮(조선)?"

"韓國(한국)."

"問您多大年紀(문니다대연기)?"

 

내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자 그는 다시 적었다.

 

"年齡(연령)?"

"65歲(65세)."

 

그러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차내 언저리 승객에게 뭐라고 말하자 승객들이 번갈아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혁명가의 발자취를 좇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했다.

 

중국 인민들이 혁명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대단함은 내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인민들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혁명가에게는 최대 존경심을 표할 뿐 아니라, 혁명열사묘지와 기념탑은 그들 고장의 가장 높은 곳에다 세워 추모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과 나는 필담으로, 또는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네들은 나의 행선지 지야이지스고가 어느 정도 남았다고 손짓이나 필담으로 시간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베푼 친절이 고마워 취재노트에다 크게 썼다.

 

"中國歷史悠久 韓中善隣親善 萬歲(중국역사유구 한중선린친선 만세)!"

 

그들은 내 글씨를 돌아보며 "하오 세 세"를 연발했다.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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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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