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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말까지 43회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창춘

지야이지스고~장춘간 열차표
 지야이지스고~장춘간 열차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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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일 오후 4시 42분, 내가 탄 남행 K130 열차가 정시보다 12분 늦게 지야이지스고 역을 출발했다.

조금 전 열차와는 달리 객차 좌석이 반은 비어 있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차창으로 좌우를 살폈으나 망망대해와 같은 만주 벌판이 이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위로 보름달이 덩그렇게 떠올랐다. 음력 9월 보름으로 어머니 제삿날이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다. 눈시울을 적시며 이런저런 가족 생각을 하는 새 열차는 창춘 역에 닿았다. 오후 6시 30분이었다.

지린성 성도인 창춘의 거리
 지린성 성도인 창춘의 거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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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춘은 지린성의 성도(省都)다. 1800년 청(淸) 나라가 창춘청(長春廳)을 설치하여 이 도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러일전쟁 후에는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토지를 매수하여 만철부속지(滿鐵附屬地)를 만들고, 그 중앙부에 창춘 역을 건설함으로써 역 중심의 방사형 도시가 만들어졌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창춘을 수도로정하고는 '신경(新京)'으로 고쳤으나 1948년 다시 창춘으로 본래 이름을 찾았다. 도시 중심에는 인민광장, 남쪽에는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길림공업대학 등이 있고, 그 서쪽에는 성(省) 도서관, 동쪽에는 성 박물관 등이 있다. 창춘은'봄의 도시'로'춘성(春城)'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가로수와 공원이 많다.

창춘은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26개의 대학과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제작소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 도시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가 만주국 황제로 등극했던 위황궁(僞皇宮)이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관동군 사령부와 사법부 등의 건물들이 아직도 만주국 당시 그대로 남아있어 일제침략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창춘 역도 하얼빈 못지않게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1999년에 이어, 2000년에도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답사 계획을 세우면서 가능한 여기서 하룻밤 묵고는  다시 위황궁을 한 번 더 관람할 예정이었다.

위황궁으로 옛 만주국 황제궁 정문으로 지금은 위황궁진열관과 길림성박물관이 되었다.
 위황궁으로 옛 만주국 황제궁 정문으로 지금은 위황궁진열관과 길림성박물관이 되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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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장 덕을 보다

나는 열차에서 내린 뒤 우선 다롄행 열차시간이나 알아보고자 역무원에게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을 보였다. 그는 소개장을 읽고는 나를 역무실로 안내하고는 금테를 두른 상급자에게 인계했다.

나는 그에게 필담으로 "大連行 特快臥車(다롄행특쾌와차, 다롄행 특급침대열차)"라고 써주었더니 그는 10시 20분에 떠나는 차가 있다고 했다. "大連到着(다롄도착, 다롄 도착이 몇 시냐)?"라고 쓰자,  "明朝 6点 左右(명조6점 좌우, 내일 아침 6시 전후)"라고 답을 썼다.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그가 요구하는 돈을 주고 밤 열차 표를 샀다. 중국에서는 외국인들이 특급침대열차표나 비행기 표는 사기도 어렵거니와 웃돈을 주는 경우도 많은데 귀한 표를 정상 요금 그대로 산다는 것도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바깥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무거운 짐을 끌고서 숙소를 찾는 것도 싫었고, 창춘 역 앞의 울긋불긋한 밤 분위기도 조금은 두려웠다. 위황궁도 두 번이나 봤으면 그만이지 세 번까지 볼 거야. 거기다가 밤차로 가면 하룻밤 숙박비도 아끼지 않는가.

나는 원하던 차표를 손에 넣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번 답사에도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 덕을 단단히 보았다. 역무원은 다시 아랫사람을 시켜 나를 개찰구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다. 그가 짐을 운반해 주는 건 물론이고. 아무튼 답사여행을 다니면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귀빈 대접을 받았는데, 이는 문화인 특히 작가에 대한 예우나 인식이 그들이 더 높다는 것일 게다.

창춘역 대합실

열차 출발 시간까지는 3시간 넘게 남았다. 짐이라도 맡기고 가까운 곳에 가서 요기라도 하려고 임시보관소를 찾아보았으나 눈에 띄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창춘 역 대합실 의자에 죽치고 앉았다.

창춘 역 대합실은 우리나라 1950~60년대 설날을 앞둔 서울역 대합실과 비슷했다.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대합실에서 떠드는 중국인들의 소음에 귀가 멍했다. 역 구내 빵집에서 우유 한 잔과 빵으로 요기를 한 뒤 다시 개찰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창춘 역은 열차가 자주 출발한 듯했는데 대합실에는 각 노선별로 두세 줄 씩 승객이 기다렸다. 역원 10여 명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장내를 정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역원들이 모두 비상소집이라도 있었는지 잠깐 자리를 비우자 금세 장내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줄은 금세 흩어지고 사람들은 펜스를 뛰어넘어 플랫폼으로 돌진했다.

창춘역 대합실 풍경
 창춘역 대합실 풍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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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에 우리나라 설이나 추석 전날 서울역에서 일어났던 압사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중국 인민들도 아직은 선진국민이 되기는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워낙 공안들이 눌러대니까 겉으로는 질서가 유지된 듯 보이지만, 공안의 손길이 조금만 소홀하면 금세 난장판이 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무질서와 혼란을 보고서 비웃을 만큼 우리의 질서 의식과 준법정신이 투철한가에 대한 반성이었다. 나의 결론은 우리 국민의 수준도 그들과 '오십보백보'였다. 오십 보를 도망친 자가 어찌 백 보를 도망친 자를 보고 웃을 수 있겠는가.

위황궁(僞皇宮)

창춘 역에서 가까운 위황궁(僞皇宮) 진열관에 가보면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동북 군벌정부가 망한 이유를 요약해 놓았다.

'부패(腐敗)' '낙후(落後)' '내전(內戰)' 이 세 단어가 국치를 당한 근본 이유라고 밝히고는, '물망국치(勿忘國恥)'를 돌에 새겨 놓고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역설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거기 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 곳곳마다 '물망국치(勿忘國恥)'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라는 말을 돌에 새겨 인민들에게 교육시키고 있었다.

위황궁 동덕전으로, 용상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이 되었다.
 위황궁 동덕전으로, 용상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이 되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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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부패(腐敗)'가 망국의 원인이라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다 잘 안다.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청나라가 망하고, 장개석 국민당 정권이 망하고, 이웃 조선이 망한 가장 큰 까닭이 '부패'라는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나 지식인, 언론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 '부패'가 개선되지 않는 것은 '나는 아니다' '내 가족은 아니다' '우리 집단은 아니다'라는데 근본 이유가 있다.

정치인들의 비리가 터지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 놈들은 그래"라고 혀를 차며 매도를 하면서도 선거 때면 "다 그런 거지 뭐"하고 새 인물로 바꾸지 않는다.

그동안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쇠고랑을 차거나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했다. 그런데도 백년하청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그런 일을 더 겪어야 우리나라에 부정부패가 사라질지 모르겠다. 백성들 몸속에 암세포처럼 번져 있는 부정부패의 세균을 몰아내지 않는 한, 아무리 정부가, 언론이, 검찰이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고 해도 공염불이 될 것이다. 

나는 해외 답사를 통해서 선진국일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법과 양심을 지키는 것을 확인하였다. 60여 년 살아오면서 숱한 부정부패와 비리를 보아왔는데 곰곰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러한 부정 비리에 조연이나 단역, 때로는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부정 비리에 둔감해 살았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니까 그 잘못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문이나 방송에 비리사건이 보도되면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부 정치인이나 아주 질이 낮은 이들의 소행으로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정치인들의 비리를 보도를 보고 성토하던 일부 교육자들이 떳떳치 못한 자금을 마련하여 단체로 해외연수를 떠나는 대열을 보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더욱이 해외연수에서 돌아온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불참자에게 자기들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매도하는 데는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그 순간 부정부패 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곁,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는, 내 가정, 내 직장이 변하지 않고서는 이 사회를 개혁시킬 수 없다. 나는 이것을 깨치기까지 미련스럽게 6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통탄할 일은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비리를 주도한 사람이 먼저 승진도 하거나 고위직에 오른다는 사실에 오늘의 비극이 있다. 백성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주도하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부러워하고 박수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부정 부패 비리가 망국의 지름길인 줄도 까마득히 모른 채.

황제 푸이가 내빈 접대와 의식장소로 사용된 위황궁 근민루로, 지금은 아편에 찌든 황후 완용의 납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황제 푸이가 내빈 접대와 의식장소로 사용된 위황궁 근민루로, 지금은 아편에 찌든 황후 완용의 납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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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

'낙후(落後)' 조선조 오백년 동안 백성은 거의 변화가 없는 낙후된 삶이었다. 가장 기본인 의식주(衣食住) 어느 하나 획기적인 변화나 발전이 없었다. 대부분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누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늘만 쳐다보는 농사는 해마다 가뭄과 홍수의 되풀이로 봄이면 대부분 백성들은 양식이 떨어졌다.

거기다가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백성들은 괴나리봇짐을 싸서 남부여대로 국경 넘어 만주로 연해주로, 하와이 멕시코 등 사탕수수밭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서양은 산업혁명으로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데 일부 지배계층만 가마나 말을 탔을 뿐, 백성들은 아무리 먼 길이라도 걸어서 다녔다. 오백년 내내 괭이나 삽으로 땅을 팠고, 등짐을 지거나 머리에 인 채 짐을 날랐다.

양반 계층들이 일하는 것을 업신여기는 노동 천시사상은 노동인구의 부족으로 생산의 저하를 가져와 낙후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허례허식과 공리공론에 집착한 결과 백성들의 삶의 질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양반은 농사나 장사도 하지 않아도 살 수가 있고, 조금만 공부하면 문과에 오르고 진사는 할 수 있으며, 배는 종놈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이나 두고, 궁한 선비가 되어서 시골에 가 살아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이웃집 소가 있으면 내 논밭을 먼저 갈게 하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 밭의 김을 먼저 매게 하는데, 어느 놈이든지 감히 말을 듣지 않으면 코로 잿물을 먹이고, 상투를 붙들어 매고, 수염을 자르는 등 갖은 형벌을 가해도 원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이런 양반신분 사회가 500년을 이어왔으니 뼈 빠지게 일한 계층은 일부 상민이나 천민에 불과했다. 같은 시대 서구와 비교하면 단순노동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성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갖은 인권이 침해된 사회였고, 사회진출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여성의 창의와 능력은 그대로 빛을 보지 못한 암흑의 사회였다. 이런 봉건사회에서는 백성들의 생활 개선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조선조 '낙후'의 원인은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집권층은 기득권을 잃을 양 변화와 개혁을 철저히 막았다. 이런 수구 보수 세력으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낙후'를 면치 못하다가 결국 망국을 맞았다.

위황궁 집회루, 푸이 황제와 황후 완용의 거실이었다. 이들이 사치의 극치를 이루는 동안 동북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위황궁 집회루, 푸이 황제와 황후 완용의 거실이었다. 이들이 사치의 극치를 이루는 동안 동북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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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내전(內戰)'은 나라 안 동족끼리의 싸움으로 내란, 민란도 포함될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집안도 나라도 멸망 원인에는 골육상쟁의 내전이 빠지지 않았다.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을 세계문명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사상)에 빠져 소중화(小中華)에 자족하면서 서구의 합리적 사상이나 과학을 무시하거나 깔보면서 내부 개혁을 하지 않은 집권층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진주민란이 일어났고, 이어 삼남뿐 아니라 경기 황해도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소요가 일어났다. 이들 민란의 원인은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지역 차별, 과거제도의 문란에 따른 매관매직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분출된 결과였다.

이런 민란에도 지배계층은 내부 개혁을 소홀히 하다가 마침내 갑오 동학농민전쟁을 맞았다. 관군이 동학군을 진압치 못하자 조정에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인 결과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지역 간 계층 간 갈등의 틈이 깊다. 38선(휴전선)은 한반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뉴욕에도 파리에도 베이징, 도쿄에도 있다. 미국의 한 주, 중국의 한 성보다도 더 적은 나라 안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감정이 실아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눠지고, 부유층과 빈곤층 등 갈기갈기 나눠져 또 다른 내홍(內訌,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개찰시간이었다.

오후 10시 20분, 창춘 역 플랫폼에서 다롄 행 열차에 올랐다. 기관차가 우리나라 KTX와 비슷했다. 승차권을 보니 2차 15호 하단이 내 자리로 객차에 오르자 만원이었다. 가방을 침대 곁에다 놓고 옷을 입은 채 눈을 감았다. 열차가 미끄러지듯 창춘을 출발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다. 창밖은 어둠과 고속으로 보이는 게 없었다. 피로가 겹치고 차내의 온기로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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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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