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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롄 역

다롄 역

 

06: 20, 밤새 달려온 열차는 다롄 역에 멎었다. 창춘~다롄 간을 8시간에 주파한 대단한 속력이었다. 문명은 점차 사람을 편리하게 해주고 지구촌을 좁혀준다. 하지만 사람은 그와 비례해서 행복하지 않다. 물질문명에서 사람의 행복을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면서도 행복을 누리는가 하면 최고위 직에서도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기쁨이 없다면, 이처럼 고생스럽게 밤을 새워 열차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롄 뤼순 일대 답사 안내를 부탁한 다롄대학교 유병호(劉秉虎) 교수에게 전화하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역 앞 커피 집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커피 맛이 참 좋았다. 유 교수는 김호일 안중근 기념관장 제자로 이번 답사 길에 소개받은 분이었다. 7시가 넘은 뒤에 통화를 하자 우선 숙소를 정한 다음 알려주면 점심시간 무렵 찾아오겠다고 했다.

 

나는 짐을 끌고 숙소를 찾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전단지를 보여주고는 고급 빈관이라고 하면서 하루 200위안이라고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간청했다. 심신이 지친 나머지 그에게 가방을 맡겼더니 다롄 역에서 머지않은 중앙공관이라는 빈관으로 안내했다. 20층이 넘는 고층 고급 빈관인데 값이 매우 쌌다. 아마도 비수기라서 투숙객이 없어 값을 대폭 낮춘 모양이었다.

 

 다롄 항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자 밤새워 달려온 열차 여독이 한꺼번에 가셨다. 산책 겸 아침을 먹고자 다롄 역 앞 일대를 두리번거리는데 만두가게에서 솟아 오른 김이 내 혀를 유혹했다. 거기서 만두로 요기를 했다. 참 나는 시시한 놈이다. 요리의 본고장에서 기껏 물만두나 찐 만두로 끼니를 해결하는 못난이가 아닌가.

 

다롄은 하얼빈이나 지야이지스고보다 위도가 낮기에 날씨가 따뜻할 줄 알았더니 바람이 세찬 게 손이 여간 시리지 않았다. 장갑을 한 켤레 사고자 가게에서 값을 묻자 가게마다 값이 춤을 췄다. 아무래도 속을 것 같아 가죽장갑을 사려고 했던 애초 생각과는 달리 값싼 면장갑을 샀다.

 

중국에서는 물건을 사고도 바가지를 쓰지 않았는지 갸우뚱거릴 때가 많다. 공항 면세점에서 진품이라고 주는 것을 사고도'짝퉁'을 산다고 하니 도시 믿을 수가 없다. 백성들이 정직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12: 00, 유 교수가 빈관 로비에서 전화를 했다. 답사 준비를 하고 로비로 내려갔더니 일행이 있었다. 유 교수는 대학 강의에다, 그 무렵 한중일 삼국의 학술세미나 등으로 몹시 바쁘다고 했다.

 

마침 점심시간으로 세미나에 참석한 일본인과 점심 선약이 돼 있는데, 내가 왔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왔다고 양해를 구했다. 사실 나는 그에게 정확한 도착 날짜를 일러주지 못하고 11월 초순 무렵이라고만 전화로 알렸던 것이다. 더욱이 답사 중에는 내 손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오늘 다롄에 도착한 뒤에야 도착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전차가 아직도 질주하는 다롄 시가지

 

동양 3국 평화의 방안

 

세 사람은 거기서 택시를 타고 한 한국음식점에 갔다. 동석한 일본인은 환일본해경제연구소 연구주임 미무라(三村光弘, 40)로 우리말이 매우 능숙할 뿐 아니라 인상이 매우 좋았다. 유 교수가 내 소개를 마치자 나는 그에게 정식 인터뷰를 하듯이 질문을 마구 쏟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를 부탁합니다."

"그분은 일본인 간수도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그분의 정신은 큰 틀에서 공감합니다. 동양평화론과 동아시아 공동체를 100년 전부터 구상한 것은 안중근 의사의 대단한 혜안입니다. 그 시대 보통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사상으로 정말 대단한 위인입니다."

 

깨끔한 그의 첫 인상에도 호감이 갔지만 그의 말에 적개심을 품고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일본도 서구 세력이 몰려오자 한국처럼 쇄국정책을 쓰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구책으로 제국주의를 수입하여 나중에는 한국을 병탄하고 중국까지 넘보았던 것입니다. 그 무렵 안 의사가 '동양 삼국이 대등하게 뭉치자'라고 역설한 것은 보통사람보다 서너 걸음 앞서간 분이지요."

 

그는 동양 삼국 역사에 매우 해박했다.

 

 밥상 토론을 벌인 한중일 세 사람(왼쪽부터 환일본해경제연구주임 미무라, 필자,  다롄대학교 역사학과 유병호 교수).

 

"왜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한국과 중국이 과거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여 동양평화를 이루지 않겠습니까?"

"일본은 가해자로서 피해 당사자에게 당연히 사과해야 함에도 과거를 반성치 않고 피해국에게 만족한 사과를 하지 못한 것은 일본인의 담력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일본인들의 그릇이 작은 탓입니다."

 

그를 카메라에 담자 덕담처럼 카메라가 매우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일제 캐논입니다. 10년 전부터 항일유적답사를 다니면서 매번 일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전에 썼던 필름 카메라도 캐논이었지요. 아직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광학이나 정밀기술에는 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기술자를 숭상하는 전통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은 철학에서 일본보다 앞섰지요. 예를 들면 주자학과 같은."

 

"그 결과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수해 주던 한국이 오히려 일본에 역전을 당했지요. 일본인들의 배우려는 자세와 기록의 철저함은 높이 평가합니다. 역설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누가 친일을 하고 항일을 했는지 일본 기록에 가장 정확히 드러나 있더군요."   

"아무튼 일본인들은 땀 흘려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혼다(本田, Honda)의 창시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는 죽기 전까지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기업경영을 모른다고 전문인에게 맡기고 대신 기술을 당신이 장악했지요. 일본에서는 현장 중심으로 실무자인 과장의 파워가 가장 셉니다. 왜냐하면 실무자인 과장이 현실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장이나 이사, 사장들은 현장이 잘 돌아가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더 분발해야

 

여러 차례 일본을 둘러보고 그들을 만나보고 느낀 바지만, 결코 우리는 일본인을 일방으로 증오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본을 네 차례 역사 기행을 했는데, 첫 번째 방문 때는 일본 공무원들과 동행하면서 안내를 받았다. 그들은 동행 내내 큰 봉투를 들고 다녔는데 나중에야 그 봉투 속에는 방문지 일대의 자료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방문자의 불시 질문에 자기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자료를 들춰 대답했고, 그 자료에 없는 질문은 메모했다가 이튿날 만나자마자 답했다. 나는 바로 그것이 작은 일본이 수십 배나 큰 중국과 러시아를 이긴 결과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미무라 주임과 대담을 끝내고 유병호 교수에게 가장 궁금한 안중근 의사 유해에 대해 물었다.

 

"안 의사 순국 후 동생들이 형의 시신 인도를 일본 측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뤼순감옥소 측의 말로는 안 의사 시신은 사형수 무덤에 매장했다는데, 거기에 매장되었다면 당시 법으로 3년 후에 소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유해를 찾기란 불가능하지요. 다만 안 의사는 특수한 경우이니까 일본이 별도 매장해서 관리하였다면 찾을 수 있을 테지요."

 

유 교수의 견해도 이제까지 알려진 이상 특별할 게 없었다. 그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대해 더 정확히 알고 있다면 벌써 특종감으로 이미 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반장되었을 것이다. 그는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에게서 배웠다고 하여, 내가 아는 연변대 김태국 교수를 얘기하자 대학 2년 선배라고 했다. 말이 난 김에 그 자리에서 김태국 교수와 즉석에서 전화 연결하여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는 지금 동양 3국 경제협력방안에 대한 세미나를 다롄서 열고 있다는데, 북한 학자까지 참여했기에 사실은 동양 4국 경제협력 세미나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말한 <동양 평화론>이 이제 빛을 보는 듯했다.

 

"동양 3국의 평화, 말은 쉽지만 힘의 균형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진정한 동양 3국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더 분발해야 합니다."

 

유 교수의 마무리 말이 나에게는 모범답안처럼 들렸다. 집안 형제도 서로 사는 게 엇비슷해야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가. 내가 둘러본 동양 삼국에서 한국과 중국은 기술면이나 일의 처리 정확도에서, 그리고 일반인 생활 속의 정직성에서 많이 뒤처지고 있었다. 일본 시골 오지마을에서도 집 앞 평상에다 채소를 무인 판매하는 것을 보고 탄복했다. 한일 패리나 도쿄 전철 역 자판기에는 한국동전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고 하지 않은가.  

 

 고층빌딩이 솟아오르는 다롄 시가지
 
안중근 행장 (20)

 

제1회 신문조서(訊問調書) 초(抄)

 

피고인 안응칠(安應七)

 

이자에 대한 살인피고사건에 대하여 명치40년(1910년) 10월 30일 하얼빈 일본제국 총영사관에서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서기 기시다 아이부미(岸田愛文) 통역촉탁 소노키스 에요시로(園木末喜) 통역으로 검찰관은 피고인에 대하여 신문한 바는 다음과 같다.

 

문: 성명, 연령, 신분, 직업, 주소, 본적지 및 출생지는 어디인가?

답: 성명은 안응칠, 나이는 31세, 직업은 엽부(獵夫, 사냥꾼), 신분은 - , 주소는 한국 평안도 평양, 본적지 출생지도  평양이다.

 

문: 피고는 한국 신민인가?

답: 그렇다.

 

문: 한국의 병적(兵籍)에 들어있는가?

답: 병적에는 없다.

 

문: 피고의 종교 신앙은 무엇인가?

답: 나는 천주교 신자다.

…………

 

문: 피고가 평소 적대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답: 이등박문(伊藤博文)이다

 

문: 이토(伊藤) 공작을 왜 적대시하는가?

답: 그를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많다. 그 원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토를 살해한 이유

 

제1,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하였다.

제2,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토는 병력으로써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한국에 대하여 대단히 불이익한 조항이다.

제3,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이익한 사건이다.

제4, 이토는 기어이 한국 황제의 폐립(廢立, 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세움)을 도모하였다.

제5, 한국군대는 이토로 때문에 해산되었다.

 

제6, 조약 체결에 대하여 한국인이 분노하여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관계로 이토는 한국의 양민을 다수 살해하였다.

제7,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하였다.

제8,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이토의 지휘 하에 소각하였다.

제9, 한국의 인민에게 신문의 구독을 금하였다.

제10, 얼마만큼 충당시킬 돈이 없는데도 성질이 좋지 못한 한국 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인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드디어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고 있다.

 

제11, 한국인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23백만 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인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을 관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분배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한국에 대하여는 대단히 불이익한 사건이다.

제12, 이토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 까닭은 즉, 노일(러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고 하면서 한국 황제를 폐립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의 결과를 보기에 이르러 한국인 2천만은 다 분개하고 있다.

제13,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한국 보호의 이름을 빌어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施政)을 하고 있다.

제14,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현 일본 황제의 부군(父君)인 분을 이토가 없애버린 사실을 한국인이 다 알고 있다.

제15, 이토는 한국인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하여 속이고 있다.

 

이상의 죄목에 의하여 이토를 살해하였다.

…………

 

동포 모두가 같은 마음

 

문: 이달 26일 아침 이토 공작이 당 하얼빈 정거장에 도착하였을 때 피고는 단총(短銃, 권총)을 갖고 공작을 저격하였는가?

답: 틀림없다.

 

문: 그것은 피고 혼자서 실행하였는가?

답: 그렇다. 혼자였다.

 

문: (증거물로 압수한 권총을 보이며) 피고가 사용한 흉기는 이것인가?

답: 그렇다.

 

문: 이 단총은 피고의 소유인가?

답: 그렇다.

 

 안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

 

문: 어디에서 입수하였는가?

답: 금년 5월 무렵 내가 의병(義兵)에 가입하였을 때 동지가 어디에서인가 사다 주었다.

 

문: 피고는 전부터 이토 공작을 한국 또는 동양의 적으로 알고 죽이고자 결심하고 저격하였는가?

답: 그렇다. 나는 3년 전부터 이토의 생명을 뺏으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은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점점 한국은 이토로 인하여 불리해지므로 나는 마음이 변하여 이토를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한국 2천만 동포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

문: 피고가 발사한 결과 이토 공작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답: 전혀 모른다. 또 그 결과는 아무에게도 듣지 못하였다.

 

문: 피고는 이토 공의 생명을 잃게 하였으니 피고의 신체는 어찌할 생각인가?

답: 나는 내 몸에 대하여는 원래 생각한 일이 없다.

…………

피고인 안응칠

 

위 기록을 읽어주었던 바 승낙 후 자서(自署)하다. 즉일 앞에 기록한 장소에서 단 출장 중이므로 소속관서의 인(印)을 사용치 못함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 <안중근 의사 공판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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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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