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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수상경찰서, 우당 이회영 선생이 체포된 곳, 현 다롄항집단
 옛 수상경찰서, 우당 이회영 선생이 체포된 곳, 현 다롄항집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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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시가지 답사

오후 2시 정각, 유 교수가 소개해 준 안내인이 왔다. 그의 명함에는 '다롄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으로 새겨 있었다. 그는 베테랑 안내인으로 다롄 뤼순 일대의 유적지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어찌나 억센 경상도 말씨라 부모 고향을 물었더니 경북 의성이라고 했다. 내 고향과는 지호지간이 아닌가.

그날 오후 다롄 일대 답사는 택시를 대절해 타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길바닥에 늘려 있는 택시를 타는 게 더 값이 싸다고 하여 우리는 먼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롄항으로 갔다. 거기에는 다롄항집단, 곧 옛 수상경찰서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순국한 곳이다. 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역사의 장소를 이번에 밟았다. 

 옛 만철본사. 현 다롄철로국
 옛 만철본사. 현 다롄철로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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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답사지는 옛 만철본사였다.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하얼빈 역에서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던 인물이다. 지금도 이곳은 다롄 철도국 사무처로 쓰고 있는데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날도 한 무리 일본인들이 옛 만철본사 건물을 추억에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고 있었다. 오늘의 일본인 마음속에는 지난날 자기네들이 지배했던 식민지 땅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듯했다.

다롄은 일본인들이 건설한 도시로 아카시아를 많이 심은 곳으로 해마다 봄철 아카시아 꽃이 필 때는 일본 단체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나도 다롄의 아카시아 꽃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듯했다.

정확하고 정성을 다하는 자세

오후 3시 25분, 다음 답사는 옛 만철병원으로 지금은 다롄대학부속 중산병원이었다. 이곳은 이토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뒤 지혈상태의 응급조치만 받고 다롄으로 온 뒤 이 병원에서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수의로 갈아입혀 입관한 병원이라고 했다. 100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어디 하나 흠이 없어보였다.

정말 일본인은 미워도 그들의 기술과 매사에 정확하고 정성을 다하는 자세만은 찬양하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그래서 그들을 뛰어넘어야 마침내 그들을 이기고 지난 원한을 복수하는 길일 것이다.

용정에서도, 하얼빈에서도, 창춘에서도, 아니 서울역, 한강인도교에서도 그들이 남긴 건축물을 보고는 일백 년이 지나도 흠 하나 없는 것을 보고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치 않고 '쪽발이' '왜놈'이라고 업신여기고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코 일본을 이길 수 없고, 일본에 선의로 복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옛 만철병원, 현 다롄대학부속 중산병원
 옛 만철병원, 현 다롄대학부속 중산병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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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사는는 아파트는 분양한 지 두 달 남짓한데 여기저기 흠이 많았다. 이름이 있는 건설회사에서 최신 공법으로 지었는데도 그렇다. 오죽하면 지은 지 10년도 되지 않은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무너지고, 한강을 가로지른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렸겠는가.

1970년 내가 전방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휴전선에 붙어있던 미군부대가 철수하자 그들 콘세트 막사를 뜯어다가 우리 부대막사로 쓰고자 옮겨짓는데 기초 바닥공사는 자대에서 맡았다. 설계 도면에 따르면 바닥공사에 시멘트 20포가 들어가는데 어찌 된 셈인지 14포밖에 상급부대에 내려오지 않았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그새 2포가 사라졌다. 그 작업을 맡은 선임하사가 내 방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시멘을 비비는 일이 얼마나 고된데 막걸리 한 잔 안 먹이고 참도 안 주며 어찌 병들에게 일을 시킵니까? 벌써 상급부대에서 8포나 삥땅해 먹었습니다. 저에게 맡게 주십시오."

그때 "나는 알아서 하시오"라고 답을 했던 것 같다. 중대 운영비나 내 봉급을 털어 공사하는 병들에게 막걸리나 참을 사주지 않고 상급부대가 지시한 기일 내로 공사가 끝나기만을 족쳤던 것 같다. 아마도 그 기초 바닥공사에는 애초 설계의 1/3 정도의 시멘트밖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건설현장의 한 단면일 것이다. 설계대로 시멘트가 들어가고 철근이 제대로 들어가 시공했다면 지은 지 10년도 안 된 건물이 무너질 수도, 다리가 내려앉을 수 없다.

 옛 조선은행대련지점
 옛 조선은행대련지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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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의 거리

다음은 일본조선은행다롄지점을 갔는데 서울 소공동의 한국은행 본점을 보는 듯했다. 이어서 야마토(大和) 호텔과 그밖에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들을 보고는 러시아 거리로 갔다. 그곳은 온통 러시아 풍 건물과 상점들로 거대한 중국대륙이 마치 하이에나에게 뜯긴 누처럼 강대국에게 유린된 자국들이 아직도 뚜렷했다. 

 옛 관동주청, 현 다롄인민정부청사
 옛 관동주청, 현 다롄인민정부청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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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일본 관동주청으로 갔는데 지금은 다롄인민정부 청사로 쓰고 있었다. 지난날 욱일승천하던 일장기 대신 지금은 붉은 중국기가 휘날렸다. 안내책자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본은 1905년 다롄을 다시 점령하여 관동주를 설치하고, 관동도독부(후에 관동청, 관동주청으로 변경), 관동군, 만철을 세워 식민통치를 위한 3대 기구로 삼았으며, 다롄을 일본의 중국 침략 교두보와 거점으로 삼았다.

다롄 거리에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때 운행하던 전차가 그대로 시내를 질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서울 시내에 운행되던 전차와 똑같았다. 다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노동공원에서 시가지를 조망했다. 박씨는 다롄을 소개했다.

 다롄 거리의 전차
 다롄 거리의 전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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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은 요동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원래는 자그마한 어촌이었는데, 그 규모가 확장된 것은 19세기말 러시아가 이곳을 조차(租借)하여 항만시설을 건설한 뒤부터였습니다. 그 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그 이권이 일본에 승계되었습니다. 이 도시를 여러 나라가 눈독을 들인 것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어 제8일 답사를 거기서 마무리했다. 박용근씨는 당신 집이 뤼순 부근이라며 시간 단축을 위해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택시기사를 내 숙소까지 보내기로 했다.

안중근 행장 (21)

1909년 11월 1일,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는 안중근 등 9명에게 구류장을 첨부하여 오전 9시에 관동도독부의 헌병대에 신병을 인도하고 이들을 뤼순감옥으로 호송하였다. 뤼순으로 호송된 9명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김려수, 김형재, 탁공규 등이었다. 그들 외 하얼빈에 남은 김성화, 정서우 등 6명은 모두 무혐의자로 석방되었다.

오전 11시 안중근 등 9명은 헌병의 삼엄한 호위 가운데 하얼빈 역을 출발하였다. 호위병 가운데 헌병 상등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안중근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는 육군에 징병되자 헌병을 지원하여 직업군인이 되었다.

그가 10월 27일, 하얼빈 출장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범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호송 중 열차 안에서 본 안중근은 평온한 표정에 사람을 감싸는 듯한 분위를 풍기는 데다 전혀 비굴치 않는 그의 태도에 적개심은커녕 점차 매료되었다.

-  <광야의 열사 안중근> 197~198쪽

이토 히로부미 행장 (3)

1909년 10월 26일 오전 11시 15분 러시아 군악대의 장송곡 속에 하얼빈을 떠난 이토 히로부미의 영구(靈柩, 시신을 담은 관)는 10월 27일 밤 다롄으로 이송되었다.

10월 28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의 영구는 본국에서 급파된 군함 <아키쓰시마(秋津州)>에 실렸다. 이 군함은 이토 히로부미의 영구를 싣고 다롄 항을 출항하여 간몬해협을 경유하여 10월 31일 밤 요코스카(橫須賀) 항에 입항했다.

11월 1일 오전 11시 요코스키 진수부(鎭守府, 해군) 군악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히토 히로부미를 실은 6량의 특별열차는 신바시 역(新橋驛)으로 행했다. 다음 날 오후 1시 히토 히로부미의 영구를 실은 특별열차는 기적소리도 없이 신바시 역에 조용히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행렬(도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행렬(도쿄)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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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4일 도쿄시 히비야 공원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장의 국장 장례식이 40만 도쿄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오모리온시칸(大森恩賜館)에 가까운 오이무라(大井村)에 안장됐다. 그의 마지막 장의행렬은 "대단히 화려했다"고 일본의 언론들은 대서특필했다.
- 정일성 <이토히로부미>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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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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