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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감옥묘지

나는 뤼순감옥을 나온 뒤 박용근씨에게 뤼순감옥 묘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감옥 묘지로 찾아가는 길옆에는 온통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기자가 뤼순감옥묘지에서 흙을 담다.
 기자가 뤼순감옥묘지에서 흙을 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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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새 일백 년이 지났으니, 이곳인들 어찌 변치 않겠는가. 거기다 속좁은 일제가 어찌 안중근의 무덤을 제대로 남겼겠는가.

설사 남겼더라도 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지만 뤼순감옥 묘지 흙에는 안중근 의사의 육신과 넋이 그대로 녹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흙이나마 한 줌 담아다가 광복 후 백범 선생이 효창원에다 가묘를 한 안중근 의사 묘지에다가 덮어주고 싶었다. 박씨는 뚜벅뚜벅 앞장 서 가다가 한 돌비석 앞에 섰다. 흰 비석에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라고 새겨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꿇어 절을 두 번 드린 뒤 한 흙을 한 줌 담아 주머니에 넣고는 하산했다. 지금도 그 언저리는 한창 개발 중으로 머지않아 이나마 남아있는 뤼순감옥 묘지까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안 의사의 생전 종착역인 뤼순역 플랫폼
 안 의사의 생전 종착역인 뤼순역 플랫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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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역
 뤼순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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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역

12: 10, 뤼순 역으로 갔다. 이곳은 1909년 11월1일 안중근이 하얼빈 일본영사관 지하실을 떠나 열차를 타고 이틀에 걸쳐 11월 3일에 닿은 이생에서의 종착역이었다. 뤼순 역사는 러시아 풍 건물로 벽면에 1900년 러시아 강점기에 지었다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 역도 자동차에 밀려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뤼순 역사가 다롄시 중요문화재 건축물이라는 표지판
 뤼순 역사가 다롄시 중요문화재 건축물이라는 표지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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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마지막 답사지로 거기서 멀지 않은 관동도독부로 갔다. 거기도 지난날 일장기 대신 오성 중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옛 관동도독부
 옛 관동도독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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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점심은 뭘 먹겠느냐고 묻기에 된장찌개가 그립다고 했다. 그랬더니 뤼순 항 바닷가 한 동포 한식집으로 안내했다. 지구촌 곳곳에 우리 동포가 없는 곳이 드물 정도로 세계 곳곳에 뻗어 있었다. 이국땅에서도 강인하게 살아가는 동포들 모습이 꼭 민들레와 같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진해가 고향이라는 주인이 매우 반겨 맞으며 된장찌개를 푸짐하게 끓여왔다. 오랜만에 한식을 맛있게 먹었다.

안중근 의사의 해외유적지 답사는 뤼순감옥 묘지 터 답사로 사실상 끝났지만, 기왕에 어렵게 뤼순까지 왔기에 뤼순 항의 아름다움과 러일전쟁 전적지 203고지를 오르고 싶었다. 박용근씨에게 특별히 청하자 그는 203고지에 가봐야 힘만 든다고 백옥산만 오르자고 했다. 거기에 오르면 뤼순 항을 다 볼 수 있다고 나의 여독을 생각하는 듯 꺼려했다. 나는 보병장교 출신으로 아직도 203고지 정도는 거뜬히 오를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도 해병대 출신이라면서 그제야 택시 한 대를 잡고는 203전적지로 출발했다.

 뤼순감옥에서 처형된 사형수들의 시신은 나무통에 담겨져 이곳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안 의사는 특별히 송판관에 담겨 매장했다고 한다.
 뤼순감옥에서 처형된 사형수들의 시신은 나무통에 담겨져 이곳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안 의사는 특별히 송판관에 담겨 매장했다고 한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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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행장 (22) 

검찰 신문

1909년 11월 1일 하얼빈을 출발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김려수, 김형재, 탁공규 등은 일본 헌병 12명의 삼엄한 감시 속에 1909년 11월 3일 아침 뤼순 역에 도착했다. 곧장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안중근은 특별감시대상 인물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로부터 감옥에 갇힌 뒤로 날마다 차츰 가까이 지내게 되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소장)과 경수계장과 일반관리들이 나를 후대하므로 마음속으로 이것이 참말인가 꿈인가를 의심했다.
- <안응칠 역사> 183쪽

안중근은 제2회 신문에 앞서 1909년 11월 6일 <안응칠 소회>를 작성하여 이토의 죄악상 15개조와 함께 서면으로 검찰에 제출했다.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이 시대를 의례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의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이것을 가히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 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뤼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 67쪽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1909년 11월 14일 제2회 신문을 받았다.

제2회 신문조서 초(抄)

문: 피고에게는 처가 있고 그는 김홍섭의 딸인가?
답: 그렇다.

문: 피고에게는 두 살 다섯 살 난 자식이 있는가?
답: 다섯 살 난 자식은 있어도 나는 3년 전에 집을 나왔으니까 두 살 난 아이는 모른다.

문: 피고 처자는 지금 하얼빈에 있는데, 알고 있는가?
답: 모른다.

문: 피고 신상은 두 아우로부터 판명되고 있으니까 숨김없이 말하라.
답: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문: 하얼빈에서 신문하였을 때 피고는 처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답: 나는 동양을 위하여 3년 전부터 진력(盡力, 있는 힘을 다함)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처자는 없으므로 없다고 말하였는데 실제로 처자가 있다.

문: 피고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및 통감(通鑑)도 읽었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답: 경서(經書)를 다소 읽고 또 통감도 읽었다.

문: 그밖에는 어떠한 책을 읽었는가?
답: 만국역사(萬國歷史, 세계사), 또는 조선역사를 읽었다.
……………………

문: 피고 아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안창호(安昌浩)라는 자를 안다는데 그런가?
답: 그분과는 두세 번 만났을 뿐 친밀하지는 않다.

문: 그간 최재형(崔在亨), 최봉준(崔鳳俊),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전명운(田明雲), 이춘삼(李春三), 유인석(柳麟錫), 홍범도(洪範圖) 및 차도선(車道善) 등을 만난 일은 없는가?
답: 홍범도만 만난 적이 있다.
……………………

문: 체포되었을 때 이토 공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피고는 이토를 죽었으므로 신(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는가?
답: 그렇다. 그 뒤 나는 대한만세를 불렀다.

피고인 안응칠

위 읽어 들려준 바, 상위(相違) 없는 것을 승인하고 자서(自署)하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이날 제2회 신문에 이어 1909년 11월 15일 제3회 신문이 이어지고 11월 16일 제4회 신문이, 11월 18일 제5회 신문이 이어지다. 이날은 안응칠 우연준(우덕순) 유동하 3인의 대질신문이었다. 다음날인 11월 19일 안중근의 두 동생 공근, 정근도 뤼순으로 불려와 참고인 신문을 받았다.

이어 11월 26일 제7회 신문, 12월 20일 제8회, 12월 21일 제9회, 12월 22일 제10회, 이듬해인 1910년 1월 26일 11회 마지막 신문이 있었다. 초기의 신문과는 달리 12월 20일 제8회 신문부터 마조부치 검찰관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그동안 호의적이고 정중하던 신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했다.

11월쯤 되어서다. 나의 친동생 정근과 공근이 진남포로부터 이곳에 와 반가이 만나 면회했는데 서로 작별한지 3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 생시인지 꿈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로부터 항상 4~5일 만에 혹은 10여 일 만에 차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인 변호사를 청해 올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성사(聖事)를 받을 일들을 부탁하기도 했다.

8회 신문부터 검찰관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의 의거 정당성과 재판관할권의 애매한 입장, 그리고 안중근의 돈독한 신앙심 등에 대한 배려로 형량을 무기징역 정도로 고려했으나 일본 정부 내의 강경파가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密命)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가 표변치 않을 수 없었다. 

안중근과 같이 연행된 9인 가운데 1909년 12월 24일 김형재, 김려수, 김성옥, 탁공규는 무혐의로 석방되고 안중근의 처자를 하얼빈까지 데려온 정대호는 다음해 2월 1일 풀려났으며 안중근 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3인만 공소 제기되었다

공판

1910년 1월 중순, 뤼순지방법원은 안중근에 대한 첫 공판 날짜를 2월 7일로 정하고 장소는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으로 결정하였다. 관동도독부 법원의 재판제도는 지방법원에서는 판사가 단독으로 심리 재판하는 2심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1심 이전에 예심을 거치도록 돼 있으나 안중근의 경우 중대한 사건임에도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곧바로 1심 공판에 부쳐졌다.

1910년 2월 1일,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好雄) 검찰관은 안중근은 살인, 우덕순과 조도선은 살인예비, 유동하는 살인방조의 죄명으로 예심을 생략한 채 지방법원에 공판을 청구했고, 지방법원은 속전속결로 이날 재판부를 구성하여 2월 7일 제1차 공판을 개정키로 최종 확인하였다.

재판부는 주임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미나베 (眞鍋十藏), 담당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 관선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 (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正治) 등 전원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와 홍콩의 동포들이 안중근 변호를 위해 성금을 모아 러시아인 변호사 미하일로프(대동공보 전임사장)와 홍콩 거주 영국인 변호사 더글라스, 그리고 서울 유지들과 안중근 어머니가 보낸 안병찬(安秉瓚) 변호사 등이 변호사신고서(변호사 선임계)를 냈으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이를 허가치 않았다.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피고인은 뤼순감옥에서 마차를 타고 일본 헌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관동도독부 법원청사에 도착했다. 피고인들은 9시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 입장한 뒤 포박에서 플려나 피고인석에 앉았다.

이 날의 재판을 보고자 이른 아침부터 500여 방청객이 몰려들었으나 재판소 측은 300명으로 제한했다. 이 날 방청객은 러시아인 3명, 한국인 3명(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 공근과 안병찬 변호사), 더글라스 변호사만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많은 신문기자들이 세기의 재판을 지켜보았다.  

공판 문답 초(抄)

 공판방청권
 공판방청권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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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피고는 안중근(安重根)이라 칭하는 자라는데 일찍이 '안응칠(安應七)'이라고 칭한 일이 있는가?
답: 본국에서는 안중근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으로 간 3년 전부터는 안응칠이라 불러 왔으며 근래에는 오로지 안응칠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 피고는 처자가 있는가?
답: 있다. 나는 16세 때에 결혼했고, 처는 지금 32세다. 자식은 여아 1인과 남아 2인이 있으나 3년 전 집을 나와 그 후로 처자를 만난 일이 없으므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집을 나올 때는 아버지의 재산이 있었으므로 다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  

문: 집을 나온 뒤 3년간은 어떠한 목적으로 지내고 있는가?
답: 그 목적은 외국에 나가 있는 동포를 교육할 계획하고 있었고, 또 나는 의병(義兵)으로 본국을 나와 한국의 국사에 대해 분주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수년 전부터 있었지만 절실히 그 필요를 느낀 것은 러일전쟁 당시로 지금부터 5년 전에 5개조와 3년 전에 7조개의 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더욱 격분하여 지금 말한 목적으로 외국에 나갔던 것이다. 
…………………………………

오직 동양 평화를 위해 거사하다

문: 피고는 작년(1909) 10월 26일 오전 9시를 지나 러시아 동청철도 하얼빈 역에서 미리 준비한 권총을 발사하여 추밀원 의장 공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그 수행원이었던 총영사 가와카미 준히코(川上俊彬) 궁내대신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발과 다리 가슴 등에 각각 총창을 입혔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가?
답: 그렇다. 발사는 하였지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그것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문: 피고는 이번 이토를 살해하면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었는가?
답: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은 사원(私怨, 사사로운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토를 죽여도 자살 따위의 뜻은 없었다.

문: 피고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행 후 도주할 생각은 없었는가?
답: 나는 결코 도주하는 따위의 생각은 없었다.

문: 피고의 직접 상관은 누구인가?
답: 김두성이다.

문: 피고는 특파원으로서 하얼빈에 왔다고 말하나 그것은 김두성으로부터 지휘를 받았다는 것인가?
답: 이번 일에 새삼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고, 이전에 연추(煙秋) 부근에서 나는 김두성으로부터 청국과 러시아령 부근의 의병사령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의병 참모중장으로 거사하다

그날 오후 공판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3년 간 각처로 유세도 하고 또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나갔다. 이번 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刺客, 테러범)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있으나 보통의 피고인이 아니고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우리는 일찍이 이토는 일본을 위해 공로가 있다는 것은 듣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 천황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는 것을 들었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재판장은 더 이상의 진술을 막고 안녕 질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고 법정의 방청객을 퇴정시켰다.

1910년 2월 10일 제4회 공판에서 미조부치 다카오 검찰관의 구형이 있었다.

"안중근 사형, 우덕순과 조도선은 2년, 유동하는 1년 6월에 처해 주기 바란다."

1910년 2월 12일 제5회 공판에서는 피고들의 최후 진술이 있었다. 안중근의 진술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오늘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법률 밑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사람을 죽여도 아무 재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병으로 한 것이니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와 있으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따라 처벌해 주기를 바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배천 조씨(마리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배천 조씨(마리아)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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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안중근은 사형 언도 후 빙그레 웃으며 재판장에게 "이보다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판결 주문에도 "이 판결에 대해 5일 내에 항소(抗訴)를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2월 19일 안중근은 항소권을 포기했다. 이런 결심에는 어머니 조마리아의 여사의 말씀이 크게 작용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정근과 공근을 급히 뤼순감옥으로 보내 당신의 뜻을 전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를 전해들은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하자 뤼순고등법원장 히라이시이 감옥으로 찾아왔다.

- <안중근 의사 공판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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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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