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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행장 (23) - 마지막

동양평화론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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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청하기를 "만일 허가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 에 대하여 책 한 권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말하기를 "어찌 한 달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므로 나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 돌아와 항소권을 포기했다.

설사 항소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뻔할 뿐더러,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고 하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 가운데 서문과 전감만 집필하였을 뿐이고(전감 부분도 미완성으로 짐작), 나머지는 미완으로 끝났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의 약속과는 달리 사형 집행이 연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안중근이 쓰고자 했던 내용을 당시 통역이었던  소노키 스에요시(園木末嬉))에게 알려줘 그 기록이 남아 있어 그 대의(大意)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러시아가 동양의 중심지며, 항구도시인 뤼순을 빼앗고, 또 이것을 일본이 빼앗고, 또다시 언젠가는 중국이 도로 찾으러 할 것이니, 뤼순은 동양 각국의 분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이곳을 영세 중립지대로 만들어 그곳에 아시아 각국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을 보내어 아시아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장래의 발전을 도모케 할 것과 각국은 일정한 재정을 제공, 개발은행을 설치하여 어려운 나라를 위한 공동개발의 자금으로 쓰게 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위원회가 동쪽 끝에 있는 점을 감안하여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케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 위원회가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인 바, 오늘날 유럽에 EU가 결성되고  환태퍙양 국가들이 APEC을 만든 것과 일맥상통한다. 안중근은 이미 100년 전에 이런 구상을 한 대사상가요, 경세가였다.

 백옥산탑에서 내려다본 뤼순항으로 천혜의 군사요새항이다.
 백옥산탑에서 내려다본 뤼순항으로 천혜의 군사요새항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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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신부의 면회

안중근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죽음을 준비하고자 아우를 통해 신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조선 가톨릭 교구에 요청했다. 이에 민(閔德孝, Mutel) 주교가 거절하자 홍석구(洪錫九, Wilhelm) 신부가 민 주교의 "가지 말라"는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채 3월 8일 뤼순으로 면회하고, 3월 10일까지 영생영락을 위한 고해성사 등 대예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는 안정근, 안공근 두 동생 그리고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好雄),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 소노키 스에요시(園木末嬉) 통역도 입회하여 20분 동안 기도를 드리고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남겼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유업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노라. 

그때 천주교회 홍 신부가 나의 영생 영락하는 성사를 해주기 위해서 한국에서 이곳에 와 나와 서로 면회하니 꿈만 같고 취한 것 같아 기쁨이 말할 수 없었다.

… 홍 신부는 나에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훈계한 뒤에 이튿날 고해성사를 주시고, 또 이튿날 아침 감옥에 와서 미사성제 대례를 거행하고 성체성사로 천주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니 감사하기 이를 길 없었는데, 이때 감옥소에 있는 일반 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례했다.

 안 의사가 뤼순감옥특별면회실에서 홍석구(빌헴) 신부, 정근 공근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하고 있다.
 안 의사가 뤼순감옥특별면회실에서 홍석구(빌헴) 신부, 정근 공근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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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오후 2시쯤 와서 나에게 이르기를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작별하러 왔다"고 하였다. 몇 시간 서로 이야기하기를 나눈 뒤에 손을 잡고 작별하며 홍 신부는 나에게 말하였다.

"인자하신 천주께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있으라."

손을 들어 나를 향하여 강복(降福)한 뒤에 떠나가니, 때는 1910년 경술 2월 초하루(음력, 3월 11일) 오후 2시쯤이었다.

이상이 안중근 32년 동안의 역사 대강이다.
경술 음력 2월 초5일(양력 3월 15일)
뤼순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

- <안응칠역사> 209-211쪽

고별 편지

1910년 3월 24, 25일 양일 동안 안중근은 곧 있을 사형 집행을 예감한 듯 어머니, 아내, 동생 정근 공근, 홍 신부, 민 주교, 사촌 명근, 숙부 등 모두 7통의 고별 편지를 썼다. 그 가운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다음과 같다.

 안중근의 아내와 두 아들(분도와 준생)
 안중근의 아내와 두 아들(분도와 준생)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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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永福,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복락)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六情, 사람이 가지는 여러 가지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함에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나는 장남 분도가 신부가 되기를 마음에 결정하였으니 그렇게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양력 3월 24일) 장부 도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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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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