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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뤼순감옥 내 안중근이 수감된 감방
 뤼순감옥 내 안중근이 수감된 감방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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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5일 저녁, 지바 도시치(千葉十七)가 귀띔을 했다.

"내일 오전에 형 집행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에서부터 호위와 뤼순감옥 수감 동안 내내 안중근을 감시해 왔다.

안중근은 그 말을 들어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은 이제 시작했을 뿐인데…'

탈고 때까지 형 집행을 연기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이 원망스럽다가 아마 그의 뜻이 아닐 거라고 안중근은 곧 마음을 추슬렀다. 안중근은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긴 묵상에 잠겼다. 곧장 그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로 담담했다.

1910년 3월 26일

1910년 3월 26일 새벽이 밝아왔다. 감방 창문 밖으로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예삿날과 마찬가지로 몸가짐을 가다듬고는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이생에서 마지막 아침밥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간수 지바가 찾아와 머뭇거렸다. 안중근이 눈치를 채고서는 물었다.

 안중근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
 안중근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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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부탁한 것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쓰지요."
"감사합니다."

지바는 고개를 숙여 예를 드리고는 벼루에 먹을 갈았다.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수감된 뒤 숱한 글씨를 남겼다(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200여 점을 썼다고 하는데 현재 확인된 것은 50여 점이다).

그때 안중근의 머릿속에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8자가 떠올랐다. "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마음속으로 읊어보았다.

'그래, 나는 이것을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던 거야'

안중근은 붓을 들고는 온 정성을 다해 힘차게 써내려갔다.

爲國獻身軍人本分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아주 통쾌했다.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농부가 추수를 끝낸 들판을 바라보는 흐뭇한 심정이었다. 아니 목동이 양떼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심경이었다. 안중근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마음으로 왼손에 먹을 묻힌 뒤 낙관을 찍었다.

"신품(神品)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지바가 감동하면서 말했다.

"그동안 고마왔소."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그 뒤 지바는 뤼순감옥 근무를 마치고 간수직을 퇴직했다. 지바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센다이(仙台)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안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그의 집 한켠에는 안중근의 반명함판 사진과 이 유필족자를 신주처럼 모셨다. 1944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아침저녁 안중근의 사진과 유묵을 모시다가 후사가 없자 조카 미우라(三浦)를 양녀삼아 이 일을 잇게 했고, 미우라는 뒷날 이 유묵을 한국에 가지고 와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했다.

유언

안중근은 마지막 유묵을 쓰고는 곧 두 아우 정근, 공근을 면회했다. 안중근은 담담한 말로 아우들에게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두 아우가 형의 사형 집행 전 마지막 면회임을 알고서 비통해 하자 나무랐다.

"나는 티끌만한 상심도 없는데 너희가 왜 그러냐?"

그 말에 아우들도 마음을 가다듬자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순국 5분 전의 안중근 의사
 순국 5분 전의 안중근 의사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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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늙으신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라. 앞으로 정근은 공업에 종사하여 한국공업의 후진성을 벗어나는데 이바지해 주고, 공근은 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들 분도를 꼭 신부로 만들어 달라."

안중근은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온 뒤 어머니가 동생 편에 차입해준 흰 명주저고리와 검정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런 뒤 그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다음 이승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안중근은 두 간수가 양팔을 잡고 이끄는 대로 교형장으로 갔다.

 간수의 인도로 교수대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
 간수의 인도로 교수대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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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독립해야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안중근이 말을 마치자 형 집행 간수가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맸다. 그런 뒤 안중근을 부축하여 일곱 계단을 올라 교수대 위에 세웠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구리하라 전옥이 이를 허락하자 안중근은 교수대에서 3분 남짓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가 끝나자 안중근의 목에 밧줄이 드리웠다. 오전 10시 4분이었다. 10시 15분, 의사가 절명을 확인했다.

장엄한 낙조

사형 집행 후 안중근의 두 동생이 안 의사의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끝내 일본은 이를 들어 주지 않았다.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기에 일본은 이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유해는 송판으로 된 관에 안장된 채 그날 오후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날 새벽부터 내린 보슬비는 하관할 때까지도 내렸다. 이천만 대한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안중근 의사에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뒷날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 의사의 총탄을 발에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이사의 회고담이다.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神)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안중근 의사의 하관을 마친 뒤는 날씨가 활짝 개더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는 저녁놀로 뤼순 앞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한 영웅의 운명을 기리는 장엄한 낙조였다.

 뤼순 앞바다
 뤼순 앞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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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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