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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고지 어귀
 203고지 어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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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고지

 이령산 위령탑
 이령산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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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택시기사 핑계를 대면서 중턱 정류장에서 지형설명을 하면서 끝내려는 눈치라, 택시에 내리자마자 안내판을 보고 내가 앞장서서 203고지로 올랐다.

일본군의 러일전쟁 대승첩지 때문인지 그날도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두 그룹이나 보였다. 20여 분 헐떡이며 오르자 마침내 이령산(爾靈山) 정상의 위령탑과 러시아군 포진지, 일본군 280미리 유탄포 전시장, 관망대가 나왔다.
  
이령산 정상에서 보는 뤼순 항은 마치 우리나라 남해 다도해처럼 잔잔한 바다에 여러 개의 섬들이 방파제로 천혜의 군항이었다. 그런 탓인지 이 군항은 청나라가 1882년 현대적 군항으로 개발하여 1890년에 개항했다가 청일전쟁 후 일본에게 빼앗겼다.

그 뒤 러시아가 일본을 밀어내고 차지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이 다시 빼앗아 40여 년 간 일본 군항으로 썼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뒤 다시 러시아가 차지했다가 1955년 중국에게 돌려주었다. 뤼순 항은 천혜의 아담한 아름다운 군항으로,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팔자가 아주 드센 군항이었다.

 백옥산에서 내려다 본 뤼순항
 백옥산에서 내려다 본 뤼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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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승전한 까닭

우리나라 갑오 동학농민전쟁이 빌미가 되어 치러진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청나라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황해 바다에서 무참히 수장되어 마침내 거대 청국이 작은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수십 배나 큰 중국이 일본에 손을 들자 거대중국은 단박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여 세계 열국의 먹잇감이 된 근본 원인은 청나라 서태후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서태후는 개인 별장인 이화원을 짓고자 군사비를 제 마음대로 빼돌리고 군함을 만들었다니 그 군함을 제대로 만들었겠는가. 황해해전에서 일본 군함과 맞서 함포사격을 하는데 일본 군함은 철판이 두꺼워 중국 포탄에 끄떡도 없었지만, 청나라 군함은 일본 군함이 쏜 포탄에 벌집처럼 철판이 뚫려 그대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 국토의 수십 배가 넘는 청나라인들이 어찌 손을 들지 않을 수 있으랴. 한 여인의 부정부패 비리가 나라를 망친 역사의 교훈이다.

 시모노세키에 있는 일청강화기념관
 시모노세키에 있는 일청강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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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3년 1차 일본 역사기행 마지막 날 일본 혼슈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청나라 강화대표 이홍장과 이경방이 일본 측 강화대표 이토 히로부미 전권변리대신과 무츠무네미츠(陸奧宗光) 외상과 청일전쟁 강화조약을 맺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일본이 야비하게도 그때 청나라 강화대표 이홍장과 이경방은 일본 측 강화대표 이토 히로부미 전권변리대신과 무츠무네미츠 외상 앞에서 고양이 앞 쥐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비굴하게 서명하는 장면을 밀납해 놓았다. 나는 그것을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그래도 그들은 목숨은 연명했지만 부하 군인들과 일반백성들은 일제의 총칼 아래 죽어가고 능욕당하며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는가. 사실 정치지도자의 부정부패는 나라를 망친 가장 큰 범죄 행위로 마땅히 처벌했어야 함에도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유야무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지나가 버렸다. 아니 퇴임 후 재임 때 부정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들먹거리며 잘 살고 있다. 그런 결과 나라의 부정부패 깊은 뿌리가 뽑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러일전쟁 승패 원인

군사전문가들은 우리나라와 만주라는 땅덩어리를 차지하고자 벌어진 1904년의 러일전쟁 승패도 일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러시아의 난공불락 요새인 뤼순 203고지를 그들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3고지 포진지 배후면의 교통호
 203고지 포진지 배후면의 교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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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이끄는 일본해군이 하루에 8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일본군 13만 명 가운데 총 6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문자 그대로 시산시해(屍山屍海, 시체로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룸)를 이룬 혈전을 치르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280미리 유탄포의 정확도라고 한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궤멸시킨 것도 일본 해군의 함포사격술이라고 하는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제압하려면 매사에 '정확(正確)'치 않고서는 발붙일 곳이 없을 듯하다.

203고지에서 내려다보니까 뤼순 항 들머리는 좁고 항만은 마치 복어 배처럼 볼록했다. 박용근씨는 지형설명에서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뤼순 항 들머리 좁은 물길에다가 자기네 군함을 격침시켜 러시아 배들이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침공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서산간척지 방제공사 마무리공사 때 폐 유조선을 가져다가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킨 것은 아마도 일본 해군의 뤼순 항 봉쇄작전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전쟁도 사업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성공하기 마련이다.

물망국치(勿忘國恥)

 '물망국치'
 '물망국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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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뤼순전투에서 희생한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203고지 정상에다 이령산 위령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거대한 탑신은 러일전쟁 후 수거한 포탄의 탄피를 속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탑신을 올려다보니까 가히 그들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이 갔다.

위령탑을 보고 옛 러시아군 참호로 가는 어귀에 '명기역사 물망국치(銘記歷史 勿忘國恥, 역사를 마음에 새겨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라)'가 새겨져 있었다.

오늘의 중국이 이만큼 국력이 커진 것은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 중국 역대지도자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교훈삼아 인민들을 교육하고 지도자 스스로 청빈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면서 부국강병에 힘쓴 결과일 것이다.

영광된 역사도 치욕의 역사도 다 배우고 기억하면서 현재를 바로 살고 미래를 건설해 가야만 역사발전이 있을 텐데 우리나라는 치욕의 역사는 너무 빨리 지워버리는 흠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 현장을 둘러보면 치욕의 현장도 흉물스럽게 그대로 보존하면서 국민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었다. 사람들이란 건망증이 심해서 자주 보고 듣고 배우지 않으면 지난날의 시행착오를 쉽게 잊어버린다.

한 예로써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을 때 그 국난의 원인은 우리 내부에 있었다. 지도자의 무능과 안이함에다가 가난한 날의 기억을 잊어버린 백성들의 분수를 모르는 과소비와 외화 낭비 유출은 나라의 곳간을 텅 텅 비게 하여 마침내 IMF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위기를 맞았다. 아직도 그 여파에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대륙 진출의 꿈

 280미리 유탄포
 280미리 유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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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편 봉우리로 가자 일식 280미리 유탄포의 포문(砲門)이 뤼순 앞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번갈아 가며 그 포구(砲口)를 통해 뤼순 앞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지팡이를 짚은 80대 노인들도 보였는데 지난날 다롄 일대에서 참전했던 관동군의 역전 용사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했다.

일본의 처지에서 본다면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열강들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옴)의 격랑 속에 살아남기 위해 부국강병에 전력을 쏟은 나머지 마침내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자 욕심이 달라져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을 실현하고자 청일,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숱한 젊은이를 제물로 바쳐 일본제국주의의 깃발을 드날렸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그동안 삼킨 영토를 한꺼번에 다 게워 놓은 일본의 기성세대의 머릿속에는 늘 지난날 자기네가 점령했던 땅에 대한 향수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군 묘지
 러시아군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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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다음 발길이 머문 곳은 러시아군 위령탑이었다. 이곳은 러시아군 묘지로 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러시아 장병 무덤이었는데 뒤편에는 러일전쟁 때 전사한 장병의 무덤도 보였다. 거기서 조금 더 가자 백옥산이 나오고, 곧 백옥산탑(白玉山塔)에 이르렀다.

 백옥산탑
 백옥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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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의 본래 이름은 '表忠塔(표충탑)'으로 러일전쟁 후 일본이 자기네 전몰장병을 위로코자 1907년 6월에 시작하여 1909년 11월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탑은 일본군 납골당으로, 일제 패망 전에는 2만여 함의 유골을 보관했다고 한다.

지금은 백옥산이 다롄 10대 풍치지구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거기서 뤼순 항을 내려다보니까 오른편은 군항으로 중국 함대들이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뤼순 내항과 외항, 그리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카메라 셔터를 원 없이 눌렸다.

답사를 모두 마치자 오후 4시로 출국시간에 다소 여유가 있었다. 이틀간 수고해준 박용근씨에게 봉사료를 묻자 1000위안을 요구하는데 예상보다 적었다. 나는 가욋돈 약간을 더 드리고는 박씨 거주지에서 작별인사를 나눈 뒤 그 택시를 그대로 탄 채 다롄공항으로 갔다.

오후 6시 10분, 인천행 중국남방여객기는 이륙한 뒤 기수를 남동쪽으로 돌렸다. 마침내 나의 아흐레간 안중근 의사 유적지 답사여행은 막을 내렸다. 묵직한 피로에 눈을 감았다.

 뤼순군항
 뤼순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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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연재는 43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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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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