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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나는 이번 답사 출발에 앞서 안중근 의사의 여정을 벗어나지 않고 가능한 그대로 뒤쫓는 방향으로 취재 범위를 정했다. 그리하여 속초항을 출발하여 연추에서 본격 답사를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 창춘, 다롄을 경유하여 뤼순에서 마치기로 했다. 답사를 기획할 때 중국 여러 곳과 연해주 일대에 안중근 가족이 살았던 곳이 있고 아직도 친척 후손이 살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답사 비용과 시간 문제도 있었지만, 자칫 초점이 흐려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코자 서울 장충단에 세운 박문사. 1932. 10. 26. 낙성.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코자 서울 장충단에 세운 박문사. 1932. 10. 26. 낙성.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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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중인 2009년 10월 31일 저녁, 하얼빈에서 그날 취재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하얼빈역 부근을 산책하는데, 역 대합실 2층에 PC방이 있었다. 그동안 열어보지 못한 메일함이 궁금하여 들어갔다.

엿새간 수신된 메일을 다 본 뒤. 마침 안중근 의사 유적지 답사 중이라 검색란에서 '안중근'을 두드리자 10․26의거기념일을 앞뒤로 많은 기사들이 온라인상에 떠 있었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기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와 마주 앉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한 뒤,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등 통역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 가슴이 송곳에 찔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안중근 의사의 유족(아내와 두 아들, 안중근 아내 김아려에게 안긴 이가 '준생',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큰아들 '분도'이다. 큰아들은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안중근 의사의 유족(아내와 두 아들, 안중근 아내 김아려에게 안긴 이가 '준생',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큰아들 '분도'이다. 큰아들은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 눈빛 <영웅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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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뒤 답사기 집필 중 한 애독자가 보내준 창원대 사학과 도진순 교수의 잡지 기고글 '영웅 안중근 가문의 이산과 죽음'과 자료로 구한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라는 책을 읽고는 망연자실했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표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표지
ⓒ I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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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원작자의 한 사람인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안준생의 진외가가 아닌가. 차마 밝히고 싶지 않은 집안 얘기지만 저자가 바른 역사를 통해 '100년의 교훈'을 삼고자 진실을 공개함에 경의와 함께 공분을 느꼈다.

그 책을 덮자 호남 의병전적지 답사에서 만난 광주 김원국, 김원범 형제 의병장 손자인 김복현씨 얼굴이 떠올랐다. 

의병장 후손의 항변

- 가족들의 수난사를 좀 들려주십시오.
"할아버님(김원국)은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셨고, 아우이신 작은 할아버님(김원범)은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혀를 끊어 23세 나이로 자결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님 얼굴도 모르는데 아버님도 왜놈에게 강제 연행되어 군사비행장 노역 중 공사장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시신을 산에다 버린 것을 수습하였답니다.

집안의 남자는 모조리 왜놈 총칼에 희생되니 저희 어머니는 큰 도둑질이라도 한 양 일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제가 물어도 함구령을 내리면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왜정 치하에서 저희 가족들은 독립운동을 한 괴수의 가족들이라 하여 재산도 몰수되고, 우리 식구들은 전남 보성군 바닷가 허허벌판에 강제 이주되어 거기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먹고살 길이 없어 다시 광주로 와 살았지요."

- 의병장 후손으로 살아온 얘기 좀 들려주십시오.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 손자 김복현씨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 손자 김복현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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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저, 그리고 제 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거지처럼 살았지요. 한마디로 거지였습니다. 꿀꿀거리는 돼지우리 옆에서도 살았습니다. 솔직히 의병 후손임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 '씨앗을 뿌려놓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 자식이 독립운동을 한다면 극구 말리겠습니다. 물론 권유도 하지 않고요. 할아버지 형제는 기록이나 사진 등 유물 한 점 없습니다. 일제 강점하에서 대역죄인 가족으로 살아남기에 급급했으니, 두 분 행적을 지우기에 바빴을 테지요. 어느 집안에서는 남은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자식의 이름을 호적과 족보에서조차 지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동안 내가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것은 '독립운동가 유족이란 걸 꺼내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유족이라고 하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거래처 사람에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소개하면, '존경합니다'라고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는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행동에 제약만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해방 후 우리나라 정계고, 재계고, 친일파 후손들이 주류 아닙니까?"

- 박도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179~180쪽

"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백범 김구와 큰 자부 안미생(안중근의 조카)
 백범 김구와 큰 자부 안미생(안중근의 조카)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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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현씨의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는 말이 공명되기에 늦은 밤임에도 그분에게 손전화를 눌렀다. 

- 안중근 의병장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 데 대해 같은 의병장 후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다 돌을 던져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남은 가족들이 살기 위해 그렇게밖에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그들(일제)의 회유와 공작이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얼마나 집요했겠습니까?

해방 후 가족들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이제라도 그들(안중근 후손)을 포근히 감싸줘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고 한 제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 기사 <영웅 안중근>은 43회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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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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