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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이중성

일본 전문가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든지, 예의가 바르다든지, 근검절약한다든지 장점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반면에 일본인들은 철저한 이중성으로, 강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고 매우 오만하다는 등 단점도 많다고 한다.

그들은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라는 게 있어서 겉보기로는 매우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한 듯 보이지만, 속내는 그와는 전혀 다르게 매우 전투적이며 잔인하다고 한다. 특히 그들의 친절성에는 깜빡하기 일쑤다. 오죽하면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도, 독립신문을 만든 춘원 이광수도, 그들의 회유에 변절했겠는가.

사실 나도 일본을 기행하면서 그들의 친절에 탄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본 아키타 현 오가의 한 호텔에 묵게 되었다. 나에게 배정된 방에 갔더니 출입문에 엽서 크기의 흰 종이가 붙어 있었고, 거기에는 "歡迎 朴鍍(환영 박도)"라는 글이 새겨 있었다. 숱한 해외여행 중 그런 접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매국 고관 부인들의 일본나들이  '한일병탄'에 찬성한 친일 고관부인들이 일제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매국 고관 부인들의 일본나들이 '한일병탄'에 찬성한 친일 고관부인들이 일제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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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탄'을 전후해서 일제는 한국 고관부인들을 일본에 유람시키면서 선물공세를 쏟았다. 거기에 넘어가지 않은 고관부인들이 몇이나 있었을까? 아마도 그들이 뿌린 선물과 은사금 공세에 대신도, 왕족도, 대부분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기개가 시들어버렸을 것이다.

이제 '국치100주년'을 지내면서 웬만하면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새 출발해야겠다. 하지만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 일방으로 그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 정부가 그들의 진정어린 사죄에 앞서 먼저 용서를 말하는 것은 민족자존의 문제다.

13도 창의군 군사장

나는 몇 해 전 한일병탄 당시 침략에 선봉장에 섰던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후손의 한국병탄에 대한 솔직한 소견을 들은 바 있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왕산 허위 선생은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1908년 1월 서울 진공작전에서 패한 뒤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 6월 일본 헌병들에게 포위 체포되어 경성(현, 서울) 헌병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왕산 허위 선생은 평소 안중근 의사가 매우 존경하였던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과정에서도 당당하게 왕산 허위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왕산 허위 선생
 왕산 허위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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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용맹의 기상이 동포 이천만인에게 있다고 하면 오늘의 국치(國恥)를 받지 아니한다. 원래 고관은 자기 있음을 알고 나라 있음을 모르는 자가 많건만, 그는 그러하지 아니한 고로 관계의 높은 충신이라고 하겠다."

체포된 왕산 선생이 당시 헌병대장 아카시(明石)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굽힘이 없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서대문감옥 개설 제1호로 교수대에 보냈다.

미국에 사는 왕산 손자인 허도성씨가 한 세기가 지난 오늘 당신은 이미 구원을 씻고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아카시 후손과 화해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동향인 나에게 중간에서 두 집안간 화해의 다리를 놓는 역할과 아울러, 그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 무렵(2004년 가을) 교육방송국(EBS) 박창순 본부장이 창사특집 다큐 제작에 걸맞은 소재를 부탁하기에, 그 이야기를 하자 선뜻 채택해 주어 함께 추진하였다. 마침 그 이듬해가 한일 '우정의 해'라 성사가 쉬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교육방송국에서는 기획 특집 <잊혀진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제1부에서는 '왕산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뿔뿔이 흩어진 왕산 후손 이야기를, 제2부에서는 '한 세기를 뛰어넘는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기획했다. 그 마지막은 아카시 손자가 왕산 선생이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이나 구미 금오산 기슭에 있는 왕산 묘소에서 사과 헌화한 뒤, 그 자리에서 두 집안 후손이 화해의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키로 했다. EBS 담당 PD(김동관)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카시 손자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때 김 PD가 귀국한 뒤 나에게 보낸 메일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불가피했다

* 당시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생각은?
 아카시 모토지로 일본군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 일본군 헌병대장
ⓒ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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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병합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당시에 조선을 그냥 두었더라면 조선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먹혔을 것이며, 일본은 위험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므로 (한국병합은) 불가피한 것이었음.

- 당시 조선 민족이 자신의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왕산을 죽게 한 데 대해서는 미안함이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 정세와 국가의 가치관 등에 있어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환경이 있었다고 생각함.

- 조선은 그 당시 반근대적이고 법, 경제 등 여러 부문에서 뒤쳐져 있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문명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조선에게 일본의 문명화된 면모를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 조선에서는 침략 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본은) 그 정도의 악의는 없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적어도 반 정도는 있었다고 생각함.

- 그리고 조선에서는 일본이 잘못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것들이 여러 수치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법률,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이 한국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함.

- 그러나 조선도 그 당시 제대로 된 하나의 국가였고, 그러한 나라에 대해 행한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할아버지 아카시 모토지로는 대만총독으로) 대만에서는 대만 사람들을 존중하고, 일본인과의 차별 없이 잘 대해 준 것으로 알고 있음(대만에서는 할아버지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음. 현재 아카시의 유골도 유언에 따라 대만에 이장되어 있음).

* 선생께서 먼저 그들에게 만남을 제의할 의향은?

-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고 싶다(이 부분에서는 구체적 대답을 회피함).

김 PD가 별도 전화로 전하는 말로는 도쿄 교외에 거주하는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도츠구(明石元紹)는 현 일왕과도 친분이 깊은 사이로 일본 사회 주류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100년 전 할아버지 시대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했고, 한국 방문에 즉답을 회피한 것으로 보아 애초 기획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일본 주류들의 마음 속 생각일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완성된 작품은 EBS 공사창립5주년기획 <왕산가 사람들> 제1편 '의병장 후손으로 살아가기', 제2편 '잊혀진 후예들'로 2005년 6월 22일, 23일 방영하였음]

광복절보다 더 기념해야 할 '국치일'

 1910년 8월 29일, 경복궁 근정전 앞에 게양된 일장기. 이 날로 조선왕조는 문을 닫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복궁 근정전 앞에 게양된 일장기. 이 날로 조선왕조는 문을 닫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 눈빛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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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 100년을 맞은 이즈음 이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할까?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는다. 우리는 반성치 않는 일본을 계속 증오하기보다는 앞으로는 일본의 실체를 바로 아는데 더욱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그들보다 더 정직해지고, 더 정확해진다면, 곧 우리 국력이 그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가장 바람직한 선의의 복수 길이며,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일본의 국력이 우리나라보다 앞섰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을 능히 추월하리라 확신한다. 이 길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며, 또한 역사의 순리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우리가 앞섰고, 현재에는 일본이 앞서고 있지만, 미래는 우리가 다시 앞서갈 차례다. 이것이 역사의 순환이요, 이를 이루는 게 '살아남음 자의 몫'일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회와 정부에 하나 제의하고 싶다. 그것은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國恥日)'인 8월 29일을, 8월 15일 광복절 못지않은 기념일로 정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날 하루만이라도 국민들이 나라가 왜 망했는지 깊이 되돌아보는 날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    

안중근 의사 유적지 답사에서 돌아온 이틀 뒤인 2009년 11월 6일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무덤을 찾았다. 백범기념관 홍소연 자료실장이 영접해 주었다. 나는 안중근 의사 무덤에 엎드려 고유인사를 드리고 뤼순감옥 묘지에서 가지고 온 흙을 봉분 곳곳에 골고루 흩었다.

 기자가 뤼순공동묘지에서 취토해 온 흙을 효창원 안중근 의사 무덤 봉분에 덮고 있다.
 기자가 뤼순공동묘지에서 취토해 온 흙을 효창원 안중근 의사 무덤 봉분에 덮고 있다.
ⓒ 홍소연(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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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효창원 안중근 의사의 무덤 뒤 소나무 숲에서 까치 한 마리가 '까악 까악' 짓다가 뿌드득 날았다. 저녁놀이 새빨갛게 물든 것으로 보아 내일은 찬란한 해가 솟을 듯했다.

덧붙이는 글 | <영웅 안중근>은 다음 43회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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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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