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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주식과도 같은 짜파티를 만드는 중이다.
 인도의 주식과도 같은 짜파티를 만드는 중이다.
ⓒ 김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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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국토종단을 했든, 팔도 관광을 했든, 며칠 집 밖에서 지내다보면 습관처럼 내뱉곤 하는 말이다.

아무리 전국의 소문난 맛집을 두루 섭렵하고 다닌 배부른 여행이라 할지라도, 익숙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대개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무얼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어디서 잘지 등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하다못해 오늘 하루 귀찮아서 빨래를 안 한다면, 당장 필요한 옷가지들은 준비돼 있는지 등 자질구레한 결정까지 내려야 하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기까지 해 일의 축에도 끼지 못한 시시한 것들이 집 밖에선 늘 선택하고, 결정하고, 돌보아야 할 '일'로 뒤바뀌고 마는 거다.

심지어 유유자적 길 떠난 이들에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닌 유일한 중대사다. 누구 말마따나 다른 사람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턱 올려놓는 일이 다인 내게, 혹은 누군가에 의해 마련된 안락한 집을 어떠한 수고도 없이 누려온 내게,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은 여행의 팔 할을 차지하고도 모자란다.
 
이러한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여행을 갈망하는 것일까. 여행 중에 집을 그리며 내내 풀지 못했던 궁금증이다. 호기심 때문에? 아니면, 남다른 모험심 때문에? 길을 나서는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갖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의식주 해결의 고생스러움이 오히려 여행의 매력이라는 사실을 은밀히 느끼곤 한다.

서점에 널려있는 수많은 여행기를 읽으며 배낭여행이란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흥미진진한 체험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마련이다. 외국의 어떤 작가는 여행의 에피소드는 작가의 생략과 강조, 반복과 압축을 통해 가장 강렬한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단언컨대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듣고 읽는 모든 여행담은 그런 식으로 탄생됐으리라. 특별한 사건, 예컨대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친절한 원주민의 집에 묵게 됐다는 식의 스토리는 사실 긴 여행의 아주 일부분만 차지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은 먹고, 자고, 입는 데에 써버리고 만다. 물론 그러한 여행의 현실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가뿐히 삭제되지만 말이다.

빠듯한 일정의 관광이 아니라면, 배낭여행의 '일상'은 보통 이렇다.

한낮의 낮잠
 한낮의 낮잠
ⓒ 김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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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고쿰마의 맛은? "베리 구~웃!"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속옷이며 양말 따위가 유일한 장식물인 좁은 호텔방에서 잠을 깬다. 또 하루가 시작된 거다. 오늘은 무얼 할까, 보다는 아침은 무얼 먹을까, 부터 고민한다. 여권과 달러 등 귀중품을 주섬주섬 챙겨 복대 안으로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간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루프탑이 있는 전망 좋은 식당에서 토스트 한 조각과 '짜이-홍차와 우유, 인도식 향신료를 함께 넣고 끓인 전통 차-'나 한잔 마셔볼까.

며칠 째 입에 맞는 음식을 못 찾았더니 함부로 새로운 음식에 덤벼들지 못 한다. 마침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00레스토랑 발견!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하루의 일정을 계획해 볼까 하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졸음. 나른한 햇살 탓에 졸고 보니 어느새 점심이다.

과일을 사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점심 먹을 식당을 물색한다. '커리'는 이제 질렸다. 두리번거리다 한국음식 식당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도착한다. 유리벽에 서툰 글씨로 써 붙인 '짬뽕라면, 김치고쿰마'가 보인다. 고쿰마? 인상 좋은 주인 아저씨는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고쿰마'가 뭔지 물으니 대충 볶음밥인 듯한 음식을 설명한다. 김치고쿰마, 김치볶음밥? 발음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김치를 먹어본 지가 언젠지, 잔뜩 기대한다.

드디어 주문한 '김치고쿰마'가 나온다. 한국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매번 실망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실패! 허~연 김치와 찰기라고는 없는 쌀밥의 조화는 둘째 치고, 기름에 볶은 건지 삶은 건지. 느끼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인상 좋은 주인은 맛있냐고 물어본다. 하필이면 꼭 이럴 때만 물어볼게 뭐람! 마음이 약해진다. 별 수 없지, "베리 구~웃(Very good)~!"

반도 비우지 못한 그릇이 민망해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온다. 괜히 맛있다고 했나? 그 주인 혹시 자기네 요리가 엉망이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치고쿰마'같은 음식이나 먹고 사는 줄 아는 건 아냐? 별 걱정을 다해본다. 그러고 보니, 맛있냐고 묻는 주인 얼굴이 초조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무슨 상관이야? 나는 두 끼 째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었을 뿐이다. 저녁에는 고기라도 먹어볼까, 생각한다.

처음 맛본 탄두리 치킨! 그런데 웬걸

며칠 전부터 점찍어둔 이슬람사원을 가기로 했다.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단다. '내 신발보다 사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똥이 더 더러울 것 같은데···. ' 오늘따라 흰 양말을 신고 올게 뭐람. 문득 빨래할 일이 고달파진다. 그깟 양말 빨래, 뭐가 그리 힘들까 싶지만, 인도에서 양말만 수십 번 빨았다. 그저 그런 건축물일 뿐, 아무런 감흥도 없는 사원을 휙 둘러본 뒤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를 좀 더 깨끗한 곳으로 옮길 생각이다.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마땅한 숙소가 없다. 괜찮다 싶은 곳은 가격이 비싸고, 가격이 적당하면 시설이 엉망이다. 며칠만 더 참기로 하고, 저녁이나 맛있게 먹기로 한다. '고기! 고기!'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고기가 인도에서는 간절하다. 지역마다 고기를 전혀 안 팔기도 하고, 판다고 해도 탄두리 치킨 (화덕에 구워 낸 인도식 닭요리)정도다. 혼자 먹기에 한 마리는 너무 많을 테니 반 마리로 주문. 오랜만에 뱃속에 기름칠 할 생각으로 마냥 행복해 하는 내 모습이, 좀 우습다.

그런데 웬걸, 치킨 반 마리는 고작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다. 게다가 살점은 없고 가죽만 남아 있다. 이걸 음식이라고 파는 거야? 하루 종일 먹었던 음식이 떠오르며 짜증이 솟구친다. 그러다 순간, 길에서 음식 쓰레기를 뒤적이고 있던 소나 닭들이 떠오른다. 하긴, 닭이 이렇게 작을 만도 하지. 사람 먹을 음식도 부족한 이곳에서, 닭들이 무얼 먹고 살이 토실토실 오르기를 바라는 걸까. 며칠 굶은 사람처럼 '고기! 고기!'를 외쳤던 내 안의 야만성과 음식쓰레기를 뒤지던 짐승들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식욕이 그만, 뚝 떨어진다.


"하얘질 때까지!"


엄마는 물을 몇번씩이나 길어 와서 아이를 씻기고 있었다.
 엄마는 물을 몇번씩이나 길어 와서 아이를 씻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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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밀린 빨래를 하기로 한다. 속옷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겉옷은 매번 빨기가 쉽지 않다. 자주 이동해야 하는 탓에 건조하기가 힘든 두꺼운 옷은 빨 엄두도 못 낸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챙겨오긴 했지만 여행길에서는 그마저도 거추장스럽다.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일명 '알리바바' 바지라고 부르는 이곳의 바지를 사서 보름 째 입고 있다. 밑위가 길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이 바지는 활동성이 좋아 여행길에 '딱'이다. 더군다나 얇아서 세탁도 간편할 테니 주야장천 입고 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빨지는 않으리라! 천연 색소로 염색했다는 이 바지는 물에 담그기만 하면 거침없이 보랏빛 물감을 내뿜는다. 언제까지 물이 빠질까, 하고 물었더니 누군가 대답했다. "하얘질 될 때까지!"

좁은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앞으로의 남은 일정의 계획을 세워본다. 아직 가야할 곳은 많은데 몸이 뜻대로 말을 안 듣는다. 벌써부터 고단하다. 지도를 펼치기도 전에 눈이 감겨온다. '뭘 한 게 있다고...' 풀리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짐을 싸면서 내일은 떠나볼까, 생각한다. 이틀째 제대로 샤워를 못했다. 다음에 가는 도시는 더운물이 콸콸 나오기를, 하며 잠을 청한다.

그리도 뜨겁던 사막은 지금부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워진다.
▲ 사막의 노을 그리도 뜨겁던 사막은 지금부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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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서의 고생... 지금이 즐겁다

40여 일의 인도 여행 중, 지극히 평범한 어느 하루의 일과다. 누군가 이렇게 재미없는 여행도 있느냐며 실망할지라도 별수 없는 일이다. 먹는 일, 자는 일, 입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고단함 뿐이랴. 먹다가 탈이 나기라도 하면 혹은 숙소를 정하지 못한 채 밤이 돼 버리면, 그 시시한 일들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먹는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황홀한 풍경 앞에서도 한낱, 나약한 인간임을 드러내고 마는, 이게 바로 여행의 '보통 날'이다.

누군가에 의해 마련된 안락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두고서도, 기를 쓰고 떠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다. 내일도, 1년 뒤의 일도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오늘'만을 살아야 하는 지금이 나는 즐겁다.


태그:#인도, #인도여행, #배낭여행,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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