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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금정 주변에서 바라다 본 바다.
 영금정 주변에서 바라다 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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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 남은 생애,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날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9월 15일 서울 집을 떠난 지 68일째 되는 날, 마침내 강원도 속초시에서 고성군의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종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음이 들뜬다.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오래 전의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 탑승시간을 기다리던 때와 흡사한 기분이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흥분해 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다.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평범한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저녁과 다를 것이 없는 거리를, 이른 아침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 앞을 지나, 속초여객선터미널 앞을 지나가는 대로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지금 이 들뜬 기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싶다. 오늘이 지나면 이 기분도 더 이상 느끼기 힘들다.

설악산 울산바위가 바라다보이는 동명항
 설악산 울산바위가 바라다보이는 동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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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명항

속초등대 전망대
 속초등대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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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항에서 영금정과 속초등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꺾으면 동명항이다. 동명항은 크기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항구다. 속초항 북쪽에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마치 곁방살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동네 사랑방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항구다.

항구에 활어센터가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항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속초등대와 영금정 같은 볼거리들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명항에서 바라다보는 설악산도 또 다른 멋이다. 부둣가에 서서 바라다보면, 설악산 중턱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속초등대는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 높이 올라서 있다. 해안 쪽에서 철제 계단을 밟아 오른다. 이 계단이 꽤 가파른 편이라서 힘이 든다. 하지만 끝까지 올라간 보람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속초 시내와 바닷가 풍경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인다.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장사항
 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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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등대에서 내려와 바닷가 길을 따라가면, 영랑호와 장사항이 나온다. 영랑호 호수 둘레로 아스팔트 도로와 함께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이곳은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도로가 한적해, 가족끼리 자전거를 타면서 여행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호수 둘레를 돌아보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자전거가 없으면 빌려서 탈 수도 있다. 호수를 오른쪽으로 300여 미터 돌아가면, 카누경기장 옆에 자전거대여소가 있다.

장사항은 속초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항구다. 항구는 작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바닷가에 횟집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곳에 마을 어촌계 운영하는 '활어회 직판장'이 들어섰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 잡아온 것들이다. 자연산 활어회를 비교적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장사항은 매년 여름마다 열리는 '오징어 맨손잡기 축제'로도 유명하다. 속초에 와서 대포항을 찾아갔다가 너무 많은 인파에 놀랐다면, 발길을 장사항 같은 곳으로 돌려볼 만하다.

속초등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속초 시내
 속초등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속초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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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경포대 부럽지 않은 해수욕장들

장사항을 지나면 곧 이어 고성군이다. 고성군으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 동해안 여행을 끝마쳐야 한다. 여행이 끝나가고 있는 게 아무리 아쉽다고 해도, 길 위에서 마냥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고성군의 낭만가도, 해안길. 길 표시가 잘 되어 있어 바닷가 길을 찾아가기 좋다.
 고성군의 낭만가도, 해안길. 길 표시가 잘 되어 있어 바닷가 길을 찾아가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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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은 자전거여행을 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앞서 달려온, '자전거 10대 거점도시'인 강릉이 전혀 부럽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서,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를 달릴 수 있다. 자전거도로 같은 걸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바닷가 길로 들어서기 위해 마을 샛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일이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이곳에서 맛보는 묘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바닷가 풍경이 무척 다채롭다. 해안선을 따라 쉼 없이 나타나는 해수욕장과 항구들이 제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해수욕장들이 별다른 치장 없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정겹다. 어느 정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연산'들이다.

해운대나 경포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아마도 고성군의 바닷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백사장 가까이에 오종종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마을들이 있고, 백사장으로 들어서는 주택가 담장 너머로 간간이 마을 사람들의 삶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꽤 푸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본 '화진포의 성'. 산 중턱 하얀 건물.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이 휴가를 다녀간 적이 있다 해서 김일성별장으로 알려졌다.
 화진포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본 '화진포의 성'. 산 중턱 하얀 건물.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이 휴가를 다녀간 적이 있다 해서 김일성별장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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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진항. 그물에 걸린 도루묵을 떼내는 사람들.
 아야진항. 그물에 걸린 도루묵을 떼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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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서민 품으로 다시 돌아온 도루묵

바야흐로 도루묵 철이다. 이름도 독특한 아야진항에서 어부와 그 가족들이 그물에서 도루묵을 떼내느라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두에 쌓인 그물이 모두 도루묵으로 묵직하다. 주문진항에서 잠깐 도루묵 그물을 손질하는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이곳처럼 도루묵이 가득 잡혀 올라온 그물은 보지 못했다. 도루묵은 주로 찌개를 끓여 먹거나 구워서 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도루묵의 원래 이름은 '묵어'다. 묵어가 도루묵으로 바뀌는 데 선조의 변덕스런 입맛이 크게 작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가 이 물고기를 한 번 먹어보고는 그 맛에 반해 '은어'라고 고쳐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은어를 다시 맛본 선조가 그때는 그 맛이 이전만 못했는지 '도로 묵어'로 부르라고 했단다.

그 이후로 이 물고기를 '도루묵'으로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조의 입맛이야 어찌됐든, 도루묵은 상당히 감칠맛이 있는 물고기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이맘 때 동해안 최고의 별미로 불릴 만하다. 그 맛을 알고 나면 도루묵을 서민들 품으로 되돌려 보내준 선조가 고마워질지도 모른다.

알밴 도루묵은 아무 때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개 알이 톡톡 터져나가면서 입 안을 고소한 맛으로 가득 채우는데, 12월이 지나면 더 이상 그 맛을 보기 어렵다. 아야진항뿐 만이 아니라, 고성군의 항구가 지금 모두 도루묵으로 들썩들썩 하고 있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백도해수욕장 앞 백도.
 백도해수욕장 앞 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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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위에 올라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갯바위에 올라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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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양의 동해 갯바위와 바위섬들

고성군의 갯바위와 바위섬 역시 독특한 멋을 보여준다. 천학정 위에서 내려다보는 갯바위는 숨은그림찾기를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얼핏 봐도, 코끼리, 상어, 발가락 같은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천학정은 교암리의 바닷가 절벽 위에 지어진 정자다. 문암항 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바위도 무척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능파대'라는 이름의 이 바위는 마치 금강산의 일부분을 축소해서 옮겨다 놓은 모습이다.

백도해수욕장과 송지호해수욕장 앞에서 바라보는 섬 풍경은 동해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백도해수욕장 앞의 섬, 백도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바다 위로 삼각형 모양의 육중한 몸을 드러내고 있다. 바위 표면이 온통 하얀 색이어서 신비한 느낌을 준다.

송지호해수욕장 앞의 죽도는 바다 위에 너부죽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섬 일부가 나무숲으로 뒤덮여 있는 게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백사장에서 지척이다. 백도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섬이다. 송지호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고, 오토캠핑을 즐길 수 있는 송지호가 가까이에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가진항을 지나면서부터는 반암항까지 7번 국도를 타고 한동안 바닷가에서 떨어진 도로 위를 달려야 한다. 멀리 바닷가로 소나무 방풍림이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이 장관이다. 반암항을 지나면서 다시 바닷길로 접어든다. 이곳의 해안도로에서는 거진항이 매우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보여준다.

바닷가 소나무 방풍림
 바닷가 소나무 방풍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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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항
 거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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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산줄기 하나가 쭉 뻗어 나와 있다. 산비탈 여기저기에 집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아래로 항구가 길게 자리를 잡았다.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힘들게 깔끔한 풍경이다. 지금까지 바닷가 여행을 하면서 '미항'이라는 수식어를 단 항구들을 수없이 많이 지나쳐 왔다. 하지만 이곳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거진항처럼 아름다운 항구도 드물다. 항구도 항구지만, 항구 뒤에 자리를 잡은 마을들이 더 없이 아늑한 느낌이다.

거진항을 지나면, 화진포해수욕장이다. 화진포는 동해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수욕장 중에 하나로 꼽힌다. 화진포해수욕장은 해수욕장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주변 풍경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오른쪽으로는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을 비롯해 '이승만별장'과 '이기붕별장'이 있고, 왼쪽으로는 광개토대왕능으로 추정되는 '금구도'가 있으며, 뒤로는 동해안 최대의 석호인 '화진포'가 있어 고성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 여행 중에 절대 빠트릴 수 없는 곳이다.

화진포
 화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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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는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이후 대진항이 나오면, 동해안 여행도 마침내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다. 대진항에 서서 항구 뒤로 우뚝 올라선 하얀 등대를 올려다보는 데 이게 모두 꿈만 같다. 바닷가여행은 사실상 여기가 끝이다. 대진항은 남한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항구다. 자전거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가 있는 곳까지 북쪽으로 1km 정도 더 올라갈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닷가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은 대진항이 마지막이다. 자연히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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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읍에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사이 구간 도로 공사 현장.
 간성읍에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사이 구간 도로 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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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항에서 출입국신고소가 있는 곳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내가 이 땅에서 자전거로 북쪽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 없다. 이곳에서 다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하려면, 그때는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전거여행을 자동차여행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내 나라 땅을 드나들면서 출입국신고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일이 영 마뜩치 않다. 만약에 자동차를 타고 오지 않은 사람이 전망대까지 올라가려면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빌려 타야 한다. 오후 3시 40분, 신고소에서 전망대 출입이 곧 마감되니 빨리 서두르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나 역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서둘러 간성읍까지 되돌아 내려간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오늘밤은 간성읍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진부령을 넘어 홍천까지 달려갈 생각이다. 그리고는 홍천에서 서울까지 또 다시 하루가 걸린다. 그러니까 이제 집에 돌아갈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지금 마음 같아선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 집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가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마음을, 젊은 군인들로 시끌시끌한 읍내 중국집에서 혼자 잡채밥을 먹으며 달랜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6km, 총누적거리는 4748km다.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이곳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자전거 통행이 불가능하다.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이곳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자전거 통행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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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성군, #동명항, #장사항, #거진항, #대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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