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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 맨 오른쪽 봉우리가 등산로가 험하기로 소문난 8봉.
 팔봉산. 맨 오른쪽 봉우리가 등산로가 험하기로 소문난 8봉.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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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호기를 부렸다.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사전에 답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처음엔 길이 있으니 우선 가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나중엔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길을 가고 있는 건지 후회막급이었다.

자전거여행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이러저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가면 그나마 좀 수월하다. 그런데 여행 중간에 계획에 없던 길로 방향을 바꾸는 욕심을 부렸다. 아마도 남들이 잘 찾아가지 않는, 자동차여행자들은 흔히 보기 어려운 경치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서는 내 앞에 어떤 길이 나타날지 몰라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고된 길이었다. 갈증에 목이 타다 못해 애가 타는 여행이었다.

홍천강.
 홍천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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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춘천의 강촌역에서 내려 자전거 타고 홍천의 팔봉산까지 갔다가, 그 길을 그대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그 거리가 왕복 30km니까 그렇게 짧은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팔봉산유원지에서 되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홍천강에서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강변도로를 따라서 되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길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가볼 생각으로 사전에 탐색이 충분하지 않았던 길이다. 그래서 조금 부담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길이란 항상 어느 방향으로든 열려 있기 마련이니까.

경춘선 전철역, 강촌역. 기차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역 앞에서 여행 안내 지도를 살펴보고 있다.
 경춘선 전철역, 강촌역. 기차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역 앞에서 여행 안내 지도를 살펴보고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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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지고개',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 다친다

화창한 날이다. 초여름 같은 봄날, 강촌역에서 내린 승객들 대부분은 등산복 차림이다. 그 사람들 일부가 삼삼오오 역 앞에 멈춰 서는 노선버스에 몸을 싣는다. 삼악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강촌은 근처에 검봉산, 봉화산, 삼악산 같은 산들이 있어 사시사철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철에서 내려 역 앞으로 나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역사를 오른쪽으로 꺾어 돈다. 이곳에서 팔봉산유원지까지 가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약 1km를 달린 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진입해 남산면사무소 앞을 지나간다. 그러고는 2km를 더 가서는 ㄷ자로 꺾어지는 길로 방향을 바꾼다. 길을 놓치지 않으려면,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강촌 번지점프대.
 강촌 번지점프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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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리까지 가느다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니까, 크게 헷갈릴 염려는 없다. 강촌역에서 팔봉산유원지가 있는 곳까지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긴 언덕이다. 절반이 오르막이고, 나머지 절반은 내리막이다. 수동리까지는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다가, 그곳을 지나면서부터 비교적 경사가 급한 고개가 나타난다. 이 고개는 '나가지'라는 좀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마을 뒷쪽으로 난 고갯길이라 만만하게 봤는데, 결코 가볍게 볼 대상이 아니다.

수동리 가는 길, 농촌도로를 확포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길에 물을 뿌려놨다.
 수동리 가는 길, 농촌도로를 확포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길에 물을 뿌려놨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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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숨이 턱밑까지 받힌다. 얼마 올라가지 못해 자전거에서 내려선다. 자전거를 탄 채로는 도저히 끝까지 올라갈 수 없다. 이런 고개는 아무래도 내 체력에, 겨우 8단밖에 안 되는 기어를 가진 접이식 미니벨로로는 불가항력이다. 경사가 꽤 길게 이어진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땀을 흠뻑 흘리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서야 겨우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 올라선 이후로는 내내 내리막길이다. 팔봉산까지 내리막길만 수킬로미터다. 그 길을 내려가는 사이, 언덕을 올라오며 고생했던 기억을 새카맣게 잊는다. 그러고는 신나게 페달을 밟는다. 이때 아마 나는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고개는 이 걸로 모두 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곳 역시 '명색이 강원도'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건데, 그 탓에 이후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경사가 급한 나가지고개.
 경사가 급한 나가지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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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 팔봉산에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

팔봉산 아래를 휘감아도는 홍천강.
 팔봉산 아래를 휘감아도는 홍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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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명산치고는 고도가 무척 낮은 산이다. 높이가 겨우 해발 302m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높이만 보고 우습게 볼 산이 아니다. 여덟 개 봉우리를 차례대로 거쳐 가는 암릉길이 꽤 거칠다는 풍문이다. 멀리서 봐도 주위 산들과는 다른 기세를 느낄 수 있다. 낙타 혹처럼 솟은 봉우리가 그렇게 편안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산 아래로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이 홍천강이다. 내 경우 이 산이 매력적인 이유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그보다는 산을 내려와 바위 절벽 아래 홍천강가를 지나가는 하산길이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를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길은 강가 손바닥만 한 모래밭을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강 쪽으로 불록 튀어나온 바위 밑을 지나가기도 한다.

팔봉산 아래, 홍천강 가를 지나가는 하산길.
 팔봉산 아래, 홍천강 가를 지나가는 하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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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이 넓게 깔린 강변은 여름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피서철이 되면, 강변이 여름 더위를 피해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갈밭이 텐트로 뒤덮는다. 팔봉산 그늘 아래를 돌아가는 물은 차고 깨끗하다. 그런 반면에 이곳은 강 한 쪽에 '익사 위험이 있으니 수영을 금지한다'는 경고 문구가 바람에 펄럭이는, 조금은 살풍경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바람이 심하게 부는 탓인지 물살이 매우 급하게 흘러 내려간다. 그러다 한순간 강풍이 불더니, 강물이 마치 머리를 들고 일어서는 것처럼 거세게 출렁인다. 중력을 무시한 채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물방울이 강가에 서 있는 내 얼굴을 때린다. 기이한 광경, 놀라운 경험이다.

예나 지금이나 홍천강은 꽤 사나운 강이었음이 분명하다. 팔봉산 등산로 입구 앞, 홍천강을 가로지르는 팔봉교 언저리에 검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일종의 기념비다. 앞쪽 면에 누군가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마 그날도 오늘과 같이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이었던 모양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가신님들의 명복을 빌며

1981년 5월 12일 해가질 무렵
고요히 흐르는 홍천강 나루터에 때아닌 재난이 올줄이야....
철부지 아들딸들의 꿈 많은 소풍준비를 위하여 광판시장을 바쁘게 다녀오던 그날!
세찬바람과 돌개바람으로 나룻배가 뒤집혀 우리 이웃의 여덟분이 유명을 달리하신 뜻밖의 참변....
이 슬픈 사연을 살피신  OOO 대통령각하께서 1억원을 내려주시어 팔봉의 영산 아래 가신님들의 한많은 넋을 위로하며 이 다리를 놓았노라!
영령들이시여!
그토록 오랜 우리들의 소원이 이룩되었으니, 눈물을 거두시고 고이 고이 잠드소서

1982년 6월  일
팔 봉 주 민 일 동

팔봉산 하산길. 멀리 보이는 다리가 팔봉교.
 팔봉산 하산길. 멀리 보이는 다리가 팔봉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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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강 팔봉교 앞에서 발견한 현대판 '비석치기'

팔봉교 언저리 비석치기 당한 기념비.
 팔봉교 언저리 비석치기 당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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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비석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저절로 눈이 간다. 비석 한가운데를 무언가 둔탁한 물건으로 쪼아낸 흔적이 남아 있다. 비석 위에 적힌 이름자를 누군가 일부러 지워낸 흔적이 역력하다. 이름자 뒤에 '대통령각하'라고 쓴 글자가 일부 남아 있는 걸로 봐서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현대판 '비석치기'다. 옛날에 백성들이 관리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송덕비 앞을 지나다니면서 비석에 돌을 던져 썩은 관리의 이름 세 글자를 파내곤 했다. 비석치기를 당한 송덕비는 대대로 탐관오리들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기념물로 남았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으로 펼친 행정을 무슨 큰 시혜라도 받은 것처럼 기념비까지 세워 놓아야 했던 그 시대의 풍경에서 씁쓸한 뒷맛을 느낀다. 생각 같아선 이 물건을 이 모양 그대로 광화문 한복판에 옮겨다 놓고 싶은 심정이다.

팔봉산유원지에서 나와 지나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나가지고개를 넘어 다시 강촌역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다 고갯길로 들어서기 전, 행촌교가 있는 삼거리에서 망설인다. 오른쪽으로 올라서면 나가지고개를 넘어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방향을 고쳐 잡으면 의암류인석선생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홍천강, 고기를 낚는 어부.
 홍천강, 고기를 낚는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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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강 강변 풍경.
 홍천강 강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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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길로 가면 홍천강에서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강변도로를 따라 달릴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고심 끝에 산길을 포기하고, 강변길을 택한다. '거리'를 포기하고 '낭만'을 택한 셈인데, 실상은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로 강변인지 산속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언덕길을 수없이 오르내린다. 강변이라고 위안을 삼기에는 길이 너무 높고, 숲은 너무 울창하다.

그 비탈진 길을 쉼 없이 오르내리다 슬그머니 회의가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기였다. 되돌아가기에도 어정쩡한 위치에 와 있었다. 박암리를 지나 홍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는 지점인 관천리에서 다시 한 번 갈등한다.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언덕을 앞에 두고 흰색 바탕 표지판에 2km 지난 지점부터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낭패다. 도로는 둘째 치고 이후로 계속 길이 나온다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눈앞에 길이 보이는데 그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모험을 감행한다. 춘천시에서 제작한 여행용 지도에는 분명히 북한강 강변으로 한 줄기 길이 그려져 있다.

홍천강 강변에서.
 홍천강 강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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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다, 그냥 아무 데나 드러눕고 싶다

2km가 지난 지점부터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 임도가 나타난다. 방법이 없다. 이제는 제발 이 길만이라도 중간에 끊어지는 일 없이 끝까지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흙과 자갈이 뒤섞여 있는 길이 수 킬로미터 계속된다. 길이 마치 뱀이 기어가듯이 이리 저리 휘어지는 동시에, 파도가 출렁이듯이 위아래로 사정없이 오르내린다.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것 같다.

왼쪽으로는 북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을 깎아 길을 만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길을 바퀴 둘레가 20인치밖에 안 되는 미니벨로를 타고 지나간다. 자갈 때문에 타이어가 찢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려니 핸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까딱 잘못 하면 자전거바퀴가 한 번 구르는 사이에 왼쪽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런 길이 끝날 듯 말 듯 계속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데,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다.

북한강 가 산 허리를 감아도는 비포장 임도. 맨 왼쪽 사진이 아스팔트 도로에서 산 속 임도로 이어지는 부분.
 북한강 가 산 허리를 감아도는 비포장 임도. 맨 왼쪽 사진이 아스팔트 도로에서 산 속 임도로 이어지는 부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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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길은 중간에 끊어지는 일 없이 계속 이어진다. 길은 농바위골을 지나 남이섬과 자라섬이 건너다보이는 강변도로로 연결된다. 농바위골을 지나면서부터는 평탄한 길이 나타나기 시작해 더 이상 긴장할 일도 없건만, 한 번 굳은 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사이 핸들을 얼마나 꽉 쥐고 있었던지 어깨와 등이 심하게 결린다. 마음 같아선 그냥 아무 데나 벌렁 드러눕고 싶다.

굴방산역을 찾아가는 길 마지막 언덕. 경사도 10도 표지판이 서 있다.
 굴방산역을 찾아가는 길 마지막 언덕. 경사도 10도 표지판이 서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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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고돼도 이 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생각 외로 아름답다. 그런 풍경마저 없었다면, 사실 이 길을 끝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생한 보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길을 여행하려면, 미리 알고 가는 게 좋다. 중간에 사람 구경하기 어렵다. 매점 같은 편의시설은 눈 씻고 봐도 없다. 먹고 마실 것은 따로 챙겨 가야 한다. 만약에 산속 임도를 피해 가려면, 의암류인석선생유적지를 지나 술어니고개를 넘어가면 된다.

굴봉산역까지 남아 있는 힘을 다 쏟아붓는다. 가는 길에 최근에 개장한 수목원인 '제이드가든' 이정표가 보인다. 수목원에 들러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시간도 늦었고, 몸은 서 있기조차 힘들다. 제이드가든에서 굴봉산역이 멀지 않다. 비로소 내 몸과 마음에 약간의 안식이 찾아온다. 여행은 때로 고행이다. 이날의 총 여행 거리는 70km다.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폐선이 된 경강역(왼쪽)과 경강역을 대체하게 된 신식 전철역인 굴방산역(오른쪽).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폐선이 된 경강역(왼쪽)과 경강역을 대체하게 된 신식 전철역인 굴방산역(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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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강촌역, 2번 나가지고개, 3번 팔봉산 가는 길, 4번 관천리(홍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최대 난코스, 이 코스를 피하려면 술어니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5번 남이섬, 6번 굴봉산역. 붉은 점이 술어니고개.
▲ 여행지도 1번 강촌역, 2번 나가지고개, 3번 팔봉산 가는 길, 4번 관천리(홍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최대 난코스, 이 코스를 피하려면 술어니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5번 남이섬, 6번 굴봉산역. 붉은 점이 술어니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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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춘천, #팔봉산, #홍천, #강촌역, #팔봉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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