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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인권의 메시지를 담은 낙서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뱅크시가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작업실에서 영화를 제작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뱅크시 필름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평화와 인권의 메시지를 담은 낙서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뱅크시가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작업실에서 영화를 제작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뱅크시 필름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 뱅크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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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쥐 그림'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뱅크시는 G20 정상회담 홍보 포스터 청사초롱 위에 '쥐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검찰로부터 불구속기소 됐던 박정수씨가 패러디했던 인물로 그라피티 아트의 전설로 불립니다. 당시 뱅크시의 팬 사이트는 '한국의 쥐에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으로 박씨의 구명운동을 벌였고, 그때 만든 쥐 그림 포스터는 아직도 팬 사이트에 걸려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저항문화로 시작된 낙서화(그라피티 아트)는 건물 담벼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나 페인트 등으로 낙서나 그림을 그려놓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거리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뱅크시는 쥐와 경찰 등의 모양을 오려낸 뒤 구멍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찍어내는 스텐실 기법으로 세계 각지의 벽에다 현대 예술, 폭력과 전쟁, 환경오염과 신자유주의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저항의 메시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얼굴 없는 아트 테러리스트'로도 불립니다. 뱅크시는 가명이며, 얼굴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낙서화는 경범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상황은 희한하게 변질되어 갑니다. 브래드 피트 같은 할리우드 배우가 그의 작품을 고가로 사들이는 등 세계 유수의 경매장에서 '범법자 작품'을 고가의 상품으로 소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뱅크시로서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셈입니다.

정작 자신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시멘트 조각에 화살이 박힌 들소와 쇼핑카트를 미는 원시인을 흉내 낸 작품을 몰래 걸어 놓는 등 기발한 퍼포먼스로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예술계를 농락했음에도 말입니다. 낙서와 놀이를 통해 기성 질서의 권위를 신랄하게 조롱해 오던 뱅크시는 결심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자본의 논리를 폭로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현대 예술계에 다시 한 번 발랄하게 도발하기로. 그가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연출한 이유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거리 예술'답습니다. 스프레이를 흔들고 페인트를 혼합 후 야마카시처럼 담벼락을 올라타더니 심지어 빌딩에 매달린 채로 낙서를 합니다. 지하철에 광고판까지 도시 전체가 작업장입니다. 이윽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를 변조한 뱅크시가 작업실에 앉아 영화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길이 올바른 예술의 길인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가 말한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라피티 아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심야의 거리에서 그라피티 작업을 하는 태거들. 한국에서는 법정에 세워졌으나 선진국에서는 다양하게 이들을 후원하며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심야의 거리에서 그라피티 작업을 하는 태거들. 한국에서는 법정에 세워졌으나 선진국에서는 다양하게 이들을 후원하며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 뱅크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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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빈티지 가게를 하는 프랑스 이민자 티에리(티에리 구에타)로 되돌아갑니다. 옷가게 운영은 죄다 아내의 몫, 그의 관심사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찍고 또 찍는 일입니다. 그러다 그라피티 아트를 하는 사촌과 그 친구들을 따라 심야의 거리에서 작업하는 태거(그라피티를 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언더그라운드 세계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 사람'의 인생은 극적으로 뒤바뀝니다.

티에리는 사촌의 소개로 오마바 선거 포스터를 그려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그라피티 아티스트 셰퍼드 페리를 만납니다. 더 좋은 샷을 찍기 위해 더 높고 위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티에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진솔하게 담아가는 '그라피티 기록자'로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와 함께 영화는 모자이크 작품으로 유명한 '스페이스 인베이더' 등 세계 곳곳의 거리 예술가들의 비밀스러운 삶과 작업 모습을 덤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합니다.

단 한 사람 뱅크시만은 카메라에 담지 못합니다. 뱅크시의 행방은 묘연하고 티에리는 애간장만 태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리로부터 연락이 오고 학수고대하던 뱅크시와 만납니다. 2006년 9월 LA에서 열렸던 뱅크시의 '거의 합법적이지 않은(Barely Legal)' 전시회를 위해 티에리가 LA의 '물 좋은 벽'을 안내하기로 한 것입니다. 뱅크시의 뒷모습만 찍고 찍은 테이프를 다시 보는 조건으로 '쥐 그림' 작업을 하는 그를 촬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뱅크시의 전시회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콜렉터들과 메이저 경매사들이 그의 작품을 사고팔기 시작하는 사단이 벌어집니다. 분노한 뱅크시는 티에리에게 그동안 찍은 필름으로 거리 예술의 진실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져 온 결과물은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누가 직조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되기도 하고 신경질적인 너스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는 에둘러 묘사합니다. 

결국 뱅크시는 자신이 직접 티에리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하고 본론으로 접어듭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티에리가 스스로를 '미스터 세뇌'라고 작명한 후 뱅크시 등의 그라피티를 베끼는 과정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라피티를 농담 따먹기 수준으로 전락시킨 채 전시회를 열고서도 상업 언론과 현대 예술계의 생리를 꿰뚫고 함께 짝짜꿍이되어 백만 달러 이상 팔아치운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하겠느냐고.

'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그라피티 아트

뱅크시가 9.11 추모를 맞아 관타나모의 폭력을 상징하는 테러 용의자 인형을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에 세워두고 티에리는 이 장면을 기록한다.
 뱅크시가 9.11 추모를 맞아 관타나모의 폭력을 상징하는 테러 용의자 인형을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에 세워두고 티에리는 이 장면을 기록한다.
ⓒ 뱅크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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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 직전 뱅크시는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에게 예술을 해 보라고 권유하지 않겠다"며 자괴감에 젖어 말합니다. '티에리 현상'에 대한 총평을 에둘러 빗댄 이 말은 영화의 제목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 제목은 뱅크시가 영국 브리스톨 시 박물관에 전시했던 작품의 문구로 관람객들이 관람 후에 꼭 선물 가게를 지나야만 출구로 나갈 수 있도록 한 상업화된 현대 예술계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입니다.

뱅크시의 이런 예술관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되어 왔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현대 문화예술과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질 높은 파괴자(반달리즘)라고 했습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그들의 정치적, 예술적 권위에 도전하기 위한 그의 행보는 '미술관 테러'로 향합니다. 영화에서 뱅크시가 미술관 벽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붙이는 장면은 런던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 들어가 자기 작품을 슬쩍 걸어놓으며 소수의 전유물이 된 현대 예술계를 희화화한 퍼포먼스를 가리킵니다.

반달리즘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 뱅크시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퍼포먼스 때문은 아닙니다. 그의 진면목은 '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사회적 메시지에 있습니다. 그에게 사회적 현실에 눈 감는 예술은 배부른 자들의 유흥에 불과합니다. 폭력과 전쟁 등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권력과 물질만능의 욕망과 우상으로 세계를 갈라놓는 신자유주의의 '벽'을 허물고 평화와 인권이 소통하는 '소통의 벽'을 만들기 위해 그라피티를 채택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갈라놓는 장벽에서 작업하는 뱅크시를 조명합니다. 높이 8m에 700km에 달하는 분리장벽에 남긴 9점은 폭력에 저항하는 희망을 상징하며 뱅크시의 작품 중 백미로 꼽힙니다. 유엔으로부터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통지를 받기도 한 이 작업에 대해 영화 속 뉴스는 "사악한 전쟁을 목표로 삼은 뱅크시가 히트 앤 런의 반달리즘의 초점을 국제적 문제로 돌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합니다. 

9·11 추모일에 맞춰 관타나모에 구금된 테러 용의자들에게 가해지는 고문 등 권력의 폭력을 이슈화시키려는 그의 작업 또한 저항을 매개로 한 소통의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티에리와 LA 전시회를 준비하던 뱅크시가 디즈니랜드로 가 테러범을 닮은 공기인형을 놀이기구 옆에 걸어 놓자 디즈니랜드는 발칵 뒤집어집니다. 이 퍼포먼스는 남자 경찰 두 명이 키스를 하는 그의 유명한 '경찰 시리즈'와도 맞닿습니다.

이 같은 정치적 불온성으로 거리 뒷골목에서 신격화된 예술과 권력의 부조리한 진실을 폭로하고자 했던 그의 '저항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권위의 전복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환기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거악을 물어뜯으며 법치주의를 지키는 검찰을 기대한다

뱅크시가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사용한 쥐를 의인화해 만든 영화 포스터. 그는 이 포스터를 통해 한국검찰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뱅크시가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사용한 쥐를 의인화해 만든 영화 포스터. 그는 이 포스터를 통해 한국검찰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 뱅크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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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포스터도 의미심장합니다. 의인화한 쥐에 붉은 페인트로 '쥐 벽서' 사건을 되돌아보도록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검찰은 '쥐 벽서'가 반정부 운동의 일환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쥐 그림의 원조인 뱅크시는 "당신이 지저분하거나 존중받지 못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면 당신의 역할 모델은 쥐"라고 했습니다.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누리꾼들은 그 '가여운 쥐'를 대통령을 풍자하는 쥐로 바꾸었고, 선진국에서는 뉴스감도 안 되는 '쥐 그림'을 검찰은 법정에 세우며 관용과 소통에 대못질을 박은 것입니다. 

그것은 '견찰'로 불리는 한국 검찰의 불행한 전통에 연유합니다. 한동안 잠잠했던 이 말이 이명박 정부 들어 상종가를 치고 있는 것은 국무총리 민간인사찰부터 저축은행 사건까지 권력형 거악은 물어뜯지 않고, '쥐 벽서' 사건처럼 만만한 민간인들만 물어뜯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주구를 자처하는 '견찰'이 다시 이빨을 갈고 있습니다. 신임 한상대 검찰총장이 취임 일성으로 종북좌익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레임덕에 걸린 이명박 정권의 집권 후반기를 공안통치로 통제하기 위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문제는 과거 간첩사건이 법원에서 줄줄이 무죄판결을 받고 있음에도 색깔론을 들고 공안독재로 회귀하려는 것입니다. 공안정국으로 차기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다목적 포석이라고 해도 이것은 명백한 시대착오적 국민협박입니다. 반면 영화에서 경찰은 그라피티를 하는 거리 예술가들을 연행하지 않습니다. 전담반까지 운영하면서도 막상 이들을 눈감아주는 것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선진국 법치주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상대 총장이 설마 다운계약서와 병역기피 등 백화점식 의혹에도 자신을 임용한 주인을 위해서 전쟁 선포를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거악을 물어뜯으며 국민들로부터 박수도 받고 품격을 지키며 제대로 법치주의를 지키려는 검찰을 믿습니다. 헌데, 뱅크시의 다음 말이 목에 가시처럼 자꾸 걸립니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태그:#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 #그래피티, #쥐 벽서,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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