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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인력시장 사무실. 일거리를 찾으러온 노동자가 앉아 있다
 새벽녘 인력시장 사무실. 일거리를 찾으러온 노동자가 앉아 있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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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새벽 골목길. 한쪽 어깨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드문드문 한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 앞에는 대여섯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태우거나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큼직한 간판이 보인다. '○○인력공사'

"지현씨, 오늘은 재수 좋은 줄 알아. 이번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왔잖아. 그래서 요새 일거리가 통 없었거든. 신분증은 복사하고 줄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

○○인력공사 사장은 몇 년 만에 인력시장에 온 기자에게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근래 상황을 설명해 준다. 기자는 혼자 멍하니 앉아 있기도 멋쩍어 건너편에 앉은 젊은 노동자에게 말을 건넨다. 인사치레로 기자와 이런저런 말을 섞던 김병교(29, 가명)씨는 한숨을 쉰다.

"인테리어 작업하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건설 경기가 죽으면서 사장이 집에서 쉬라고 하더라고. 당장 살기가 막막하고, 돈은 벌어야 하니까 인력시장에 나왔어. 그런데 지난달 내내 비가 오니 일을 할 수가 있었나. 그래도 오늘은 비가 안 올 것 같아서 참 다행이야."

김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담배를 태우던 문경식(53, 가명)씨가 말을 잇는다.

"우리 같은 '노가다꾼'은 단순 작업만 하는데, 비가 오면 현장 잡일은 뚝 끊기는 거여. 그러면 그냥 집에서 막걸리 한 병 구해다가 온종일 마시는 거지. 나도 오랫동안 일 못하고 있었는디, 오늘은 일당 좀 벌어야것어…."

문씨와 김씨, 그리고 기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사장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점점 밝아오는 새벽 골목을 때린다.

"거기. 문씨 아저씨부터 묶어서 다섯 명은 수인선 지하철 공사 현장으로 가니까 슬슬 갈 준비 하세요. 안전화 갈아 신고…."

"비 많이 온 7월은 '꽝'... 추석까지 바짝 쪼여야"

기자를 비롯한 다섯 명의 노동자가 닿은 곳은 공사가 한창인 인천 송도역 수인선 공사현장. 현장의 함바식당(현장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공사장 안전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 함께 온 청년 장민석(27, 가명)씨가 기자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요. 오늘 처음이죠? 그래도 날씨는 좋네요. 비 올 때 일하면 정말 죽을 맛이거든요."

건설 현장은 비가 오는 날에는 실외 작업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는 그의 말을 유심히 듣는다.

"지지난 주에는 이삿짐센터에 용역으로 간 적이 있었거든요. 일 시작할 때는 하늘이 우중충하더니만 이제 짐 좀 나를 만하니까 비가 쏟아지더라고요. 하필이면 그날 가정집도 아니고 사무실 이사하는 곳에 걸려서…. 비 쫄딱 맞고 일은 일대로 다 하고 나서 인력시장 사무실로 가니까 '비 맞으면서 놀다 왔냐'고 묻더라고요. 나 참…."

현장에서 잠시 쉬는 일용직 노동자. 추석되기 전까지 바짝 쪼여서 일해야 한단다
 현장에서 잠시 쉬는 일용직 노동자. 추석되기 전까지 바짝 쪼여서 일해야 한단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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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교육을 마치고, 우리 일행이 하루를 보낼 곳에 닿는다. 무질서하게 쌓인 공사자재들, '용역'이라 불리는 우리의 임무는 공사자재를 정리하는 일이다. 말없이 자재를 쌓고 또 쌓는다.

중간중간 틈이 나면 함께 온 노동자들이 한곳에 모여 쉰다. 오늘 처음 봤지만 제법 친해진 김병교씨가 기자를 툭 치며 살갑게 말을 건넨다.

"내일도 올 거지? 이제 추석 얼마 안 남았다. 할 수 있을 때 바짝 벌어놔야지 추석도 좀 걱정 없이 쇠지 않겠어? 지난달에는 날씨 때문에 일을 못했으니까 추석되기 전까지 '빡세게' 일해야지. 추석까지 이제 20일도 채 안 된다고. 주말에는 좀 쉬고, 평일에 확 쪼여야 한다니깐."

김병교씨뿐만 아니라 다른 일용직 노동자들의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 때문에 생긴 공백을 이제부터라도 채워야 한다'는 것. 비록 따가운 햇볕에 얼굴은 그을지만 일 하는 손놀림은 사뭇 재빠르다.

여우비에도 움찔... "이럴 땐 비가 원수"

함바식당에서 점심 끼니를 때우고 다시 현장으로 발걸음을 돌릴 즈음. 공사현장 인근 야산 너머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비가 오면 어쩌냐' '그냥 흐릴 뿐이니 걱정하지 마라' 등의 반응을 보인 노동자들은 다시 공사자재 정리현장에 닿는다. 흙먼지와 땀방울이 섞인 다섯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을 때, 기자의 어깨에 빗방울 하나가 똑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야산 너머에 있던 비구름이 공사 현장 위를 메우고 있다.

점점 내리는 비. 다행히 여우비다. 하지만 장민석씨는 "이러다 일 멈추는 거 아니냐. 이럴 때는 비가 웬수 같다"며 넋두리를 해댄다. 그러자 일을 하던 문경식씨가 기자에게 말한다.

"이 정도 비면 다행인 거여. '뭐 이 정도 오다 말것지…' 하면서 일하면 돼. 이러다 빗줄기가 굵어지면 어떡하냐고? 하하. 지금 3시 넘었지? 현장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3시 넘으면 임금은 거의 다 받으니께. 괜찮은 거여. 근데 어떤 현장은 (우천으로 인해 현장 작업이 중단되면) 절반만 주는 곳도 있더라고. 어쨌든 나르던 거나 마저 나르자고!"

다행히도 비는 작업에 무리를 주지 않을 만큼 내리다 그친다. 공사 자재들을 대강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오후 5시 30분. 작업 시간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인력시장으로 향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일한 임금은 받아야 하지 않는가.

일을 마치고 인력시장에 닿은 다섯 노동자는 돈을 받고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그저 "내일 봅시다"라는 말이 인사의 전부. "내일도 맑을 것 같으니 또 나오라"는 김병교씨의 인사를 뒤로 한 채 기자는 버스에 올라탄다.

일기예보 듣다가 '큰일 났다' 여기기 일쑤

기자가 닿은 곳은 인천의 한 시장. 이곳에도 날씨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바로 노점상 상인들. 버스에서 내리자 시장 곳곳에 각종 채소, 과일, 주방기구, 의류 등을 늘어놓은 노점상 상인들이 거리에 앉아 있다.

기자가 배회한 노점상 밀집지역(위), 45년 경력의 정춘자 씨 조차 "이번같은 여름은 난생 처음"이란다(아래).
 기자가 배회한 노점상 밀집지역(위), 45년 경력의 정춘자 씨 조차 "이번같은 여름은 난생 처음"이란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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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에 물건들을 풀어놓았다. 아파트 단지가 바로 옆이라 유동인구는 제법 있었지만, 그들의 자판에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늘진 담벼락에 기대 도라지를 다듬고 있던 정춘자(72)씨는 "장사 잘되세요?"라는 질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칼을 멈추고 답한다.

"장사가 잘되긴 뭐가 잘 돼? 지난달에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장사 다 공쳤어. 내가 (비를 피할) 천막이 있어 뭐가 있어? 게다가 물가도 오르니 우리 장사는 완전 꽝이야, 꽝. 그래도 이제 추석이 오니까 '아, 이제 대목이 오나 보다'하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 거지. 내가 장사 경력이 45년째 거든? 근데 이번 같은 여름은 정말 난생 처음이야. 에휴."

그녀의 좌판에는 각종 채소가 즐비했다. 판매 품목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비가 오면 매출이 60~70% 이상 떨어진다. 오늘 그녀는 1500원에 사온 대파를 두 단밖에 팔지 못했단다. 한 단에 2000원에 파니 오늘 그녀의 순수입은 달랑 1000원.

말없이 도라지를 손질하고 있는 정춘자씨를 뒤로하고 시장 주변을 배회하다 보니 계란빵 상인이 눈에 들어온다. 달콤한 냄새가 위를 자극했는지 '1개 700원'이라 적힌 그곳으로 향한다.

파라솔을 친 계란빵 좌판. 계란빵을 찍어내는 틀에는 계란빵이 거의 없다. 이미 만들어 놓은 계란빵은 플라스틱 통에 가득이다. 그만큼 장사가 안된다는 이야기. 올해로 15년째 계란빵과 어묵을 팔고 있는 이숙자(62)씨의 이번 여름은 어땠을까.

텅 빈 계란빵 틀거리. 이숙자 씨는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텅 빈 계란빵 틀거리. 이숙자 씨는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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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저절로 나와요. 물론 계란빵이 여름엔 잘 안 팔리는 품목이긴 한데, 이번 여름은 좀 심했다 싶더라고요. 여기는 파라솔도 있고 좌판에 천막도 쳐서 비는 피할 수 있는데, 바람만 불었다 하면 난리 나는 거죠. 그래서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하는데, '내일 비 온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아 이거 어쩌나, 큰일 났다'라고 혼잣말해요."

더는 비 때문에 미간에 먹구름끼지 않길

계란빵 먹으며 이야기 듣느라 허겁지겁하는 기자에게 물을 건네는 이씨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솔직히 이젠 돈 벌기는 틀렸다고 봐요. 그냥 끼니 거르지 않으려고 장사하는 거죠.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해야죠. 제가 말한다고 비가 안 오나요, 아니면 비싼 계란 값이 내려가나요? 그냥 버티는 겁니다."

이씨는 15년 전, 몸 하나 누일 방 한 칸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아끼고 아껴 겨우 방 한 칸을 얻었는데 이젠 형편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예상한다. 따로 실내에서 장사하지 않는 이상, 노점상 상인들의 형편은 그날 날씨가 크게 좌우한다.

이번 여름, 많이 쏟아진 비 때문에 전국이 물난리였다. 수해는 많은 이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와 노점상 상인들 역시 수해를 입은 것과 다름없다.

"이제 대목이 오나 보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노점상 정춘자씨의 바람, "다가올 추석을 걱정 없이 쇠고 싶다"는 건설노동자 김병교씨의 소망. 하늘은 이들의 편일까?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태그:#일용직 노동자, #인력시장, #노점상, #비가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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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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