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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9월에 들어서니 확실히 햇살의 느낌이 달라졌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팔뚝을 비추는 햇살에서 여름날의 따가움이 아닌 가을만의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햇살도 종류가 있다면 둥근햇살이다. 더불어 등허리까지 전해지는 마사지 같은 햇볕, 드디어 가을이 왔구나 싶다. 추수를 해야하는 농부님들처럼 도시인들도 부지런해야 하는 계절이다. 해가 갈수록 점점 짧아져만 가는 가을의 정경과 운치를 놓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올해 첫 가을여행을 위해 애마 자전거를 전철에 싣고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가을볕을 쬐며 물굽이가 아름답다는 동강길을 달려보고 싶어서다. (그늘이 드물고 강바람이 시원한 동강은 가을여행이 제격이다) 뱀이 구불구불 가는 듯하다 해서 사행천 (蛇行川)이라고 하는 동강은 지도를 봐도 정말 길쭉한 구렁이 한마리가 연상되는 곳이다. 오랜만에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전철 첫차를 타고 아침 7시 청량리역에서 출발 예미역을 향해 세시간여를 여유로이 달려간다.

기차안에 있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이른 커피를 마시며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에 빠져본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쓴 "기차를 타는 것은 여정을 풍부하게 하고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가는 좋은 방법"이라는 표현에 공감가는 순간이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며 나도 철학자가 된 듯 사유에 빠져본다. 덕분에 읽으려고 가져간 책은 또 보질 못했다. (여행중 잘 읽지도 못할 책을 매번 가지고 가는 나도 참 미련하다)

 오르막 언덕길에 나타난 특이한 동강 이정표가 자전거 여행자의 기운을 북돋는다.
 오르막 언덕길에 나타난 특이한 동강 이정표가 자전거 여행자의 기운을 북돋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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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동강길

아담한 마을의 품속에 있는 작은 기차역 예미역에 내려 가까운 식당에서 늦은 아침밥을 먹는다. 식당이 넓어 자전거를 식당안에까지 끌고 들어와 앉아도 뭐라 하지 않는 주인 아주머니는 보통 자전거탄 사람들이 단체로 여기를 지나가는데 혼자 왔냐고 하시며 고맙게도 맛깔진 산나물 반찬들과 밥을 한번 더 갖다 주신다. 밥을 먹고 그냥 가기 아쉬워 아주머니 세분과 얘기도 나누고 같이 기념사진까지 찍으며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게 다행인게, 동강을 찾아가는 첫 마을인 고성리는 오래된 옛 성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지만 내겐 높을 고(高)자 고성리로 기억하게 하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언젠가는 신나는 내리막길이 나오겠지 하는 희망으로 힘을 냈지만 얼마 안가서 결국 끌바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와 핸들을 잡고 끌고감 ; 자전거 용어). 이번에 달려간 동강길에선 이런 긴 오르막길이 두군데 있는데 이곳 고성리와 정선읍에 들어가는 초입의 솔치재다.   

길가에서 밭을 돌보고 있는 동네 아저씨가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는 자전거 여행자를 흐뭇하게 쳐다보더니, "자전거에 기어 없어요?" 하신다. " 있어도 힘들어요"하며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사실 싱글 기어 8단의 바퀴 작은 자전거가 아니라 내 저질체력이 더 큰 문제임을 체감하기에 자전거탓을 하진 못하겠다. 동강까지 10Km 남았다는, 자전거가 위에 놓여져 있는 길쭉한 팻말이 나타나 그나마 힘을 보태준다.  

 고성리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니 보람차게도 물굽이가 아름답다는 동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성리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니 보람차게도 물굽이가 아름답다는 동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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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될 듯한 동강의 물소리와 물색

물굽이가 아름답다는 동강길은 그리 쉽게 존재를 드러내 주질 않는다. 동강 가는 마지막 고비인 작은 터널이 나온다. 왼쪽의 오르막 산길로 계속 갈까 하다가 터널이 짧고 작아 그냥 가보기로 한다. 트럭은 통행이 안되고 차가 한대씩 서로 교대로 지나가야 하는 작은 터널이다. 그래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컴컴한 동굴같아서 무섭기도 한데 이런 터널을 쉽게 지나가는 요령이 있다.

이곳에 들어가려는 차 운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량 앞에 자전거를 앞세우고 함께 가는 것이다. 앞에서 오려는 차들은 물론 뒤에서 오는 차량들에게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래도 터널속에서 들려오는 뒤차의 엔진소리가 어찌나 큰지, 산허리를 강제로 구멍뚫린 산들의 비명소리같아 오싹하다. 터널을 지나자 지금까지는 동강가는 시험길이었다는 듯 길은 신나는 내리막길로 바뀐다. 오르막길이 길었던만큼 한참을 내리막길 라이딩을 즐길 무렵 저 앞에서 푸른 동강이 희끗희끗 얼굴을 내민다.

 곱디 고운 빛깔의 동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청년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곱디 고운 빛깔의 동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청년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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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산성 팻말과 함께 보이는 정말 손바닥 만한 고성분교 운동장으로 들어가 화장실도 이용하고 수돗가에서 아이들처럼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운치리를 향해 동강길을 본격적으로 달리면 된다. 짙고 푸르기 이를데 없는 동강을 처음 마주한건 동강변의 '제장마을'에서다. 트래킹하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칠족령'이 있는 이 마을은 병풍같이 둘러선 강원도의 힘이 느껴지는 거친 산들도 인상적이고, 그 밑의 자갈 모래톱 사이로 흐르는 동강은 물소리도 청아하기 그지없거니와 진하디 진한 초록빛으로 흐르다가도 굽이쳐 흐르면서 곱디 고운 옥빛으로 변하는 물색은 보는 이를 동강 마니아로 만들 만하다.  

운치리에 들어서면 길은 강변을 따라 아름답고 운치있게 나있는 편안한 동강길의 연속이다. 강변가에 있는 '예미초등학교 운치분교장' 이정표를 놓치지 않고 따라 가본다. TV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서 출연자들이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놀던 자그마한 운동장 위로 귀여운 동상들과 교정이 다소곳이 서있다. 학교를 청소하고 관리하는 소사 선생님인 듯한 분이 키큰 은행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고 계신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동강과 참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학교다. 

 구름과 산들과 강물이 함께 흘러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동강가다.
 구름과 산들과 강물이 함께 흘러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동강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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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여성의 아름다운 미소에 반하다

강가에 사공없는 작은 쪽배 한척이 한가로이 떠있다. 그 위로 연결된 줄과 함께 동강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같다. 저 배를 타고 줄을 당기면서 너머의 마을로 가나본데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동강의 깊고 푸른 물소리와 어울려 무척 낭만적이다. 주변에 높이 솟아나있는 산등성이위로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강이 흐르듯 흘러간다.

구름과 산들과 강물이 이렇게 멋진 조화를 이루며 흘러가다니,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풍경이다. 그런 풍경 사이 사이로 옛날엔 정겨운 섶다리였을 작은 잠수교 다리들이 나타난다. 강변 마을로 이어주는 다리로 비가 많이 내렸던 올 여름엔 대여섯번이나 잠겼다고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귀띔해주신다.     

그렇게 동강길을 달리다보니 우유까지 따로 준비했음에도 어느 새 물이 떨어져 물통을 들고 강변가에 앉아 옥수수를 캐고 있는 아낙네에게 다가갔다. 바로 앞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하는 아낙네는 멀리 서남 아시아에서 온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주 여성이다. 시골에서 이주 여성들을 마주치는건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오지라고 하는 동강가에서 만나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줄을 당겨 건너 마을로 가는 쪽배 한척이 동강과 참 잘 어울린다.
 줄을 당겨 건너 마을로 가는 쪽배 한척이 동강과 참 잘 어울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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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햇살 아래 앉아 힘들게 일하면서도 외지인을 향해 웃음짓는 아름다운 미소가 가을 햇살만큼이나 따스하고 눈부시다. 순수와 순진함은 곧 낙오자, 바보를 의미하게 된 속물국에 사는 내게 그녀의 지극한 미소는 자비로운 부처님을 연상하게 하고 왜 그런지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집 마당 수돗가에서 호스로 나오는 물을 받고 있는데 집에서 나온 다른 이주 여성 한분이 1.5 리터짜리 차가운 생수 한병을 건네 준다. 이 머나먼 곳까지 떠나 왔는데 친구가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어지는 마을인 가수리를 향해 달려가는 자전거 페달질이 조금은 가볍다.

속시원하게 흘러가는 동강 물소리를 감상하며, 다리춤을 걷어 올리고 강물위에서 수렵을 하는 마을 주민들을 구경하며 강변을 달리다 보면 저 앞에 첩첩히 포개진 산허리에 붉은색을 띤 독특한 기암절벽이 보인다. 가수리의 절경 중 하나인 '붉은 뼝대'로 뼝대는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의 강원도 사투리란다. 이제 동강길의 오른편에는 뼝대들이 마을과 동강을 지키는 거대한 초병들처럼 줄곧 서있다. 동강길의 또 다른 명물 '동강 할미꽃'도 이 뼝대에서 피어난다.

 품이 넓어 포근한 느낌이 드는 가수리 느티나무에서 보이는 동강 또한 절경이다.
 품이 넓어 포근한 느낌이 드는 가수리 느티나무에서 보이는 동강 또한 절경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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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물이요, 물이 산이다

도시락이나 간식을 가지고 갔다면 꾹 참았다가 이곳 가수리에서 먹을 일이다. 강변가에 570살 먹은 느티나무가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길손을 맞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흐르는 동강을 내려다보며 먹는 도시락 맛은 단지 허기를 때우는 것 이상의 맛이난다. 몇몇 관광객들은 아예 평상에 누워 꿀같은 낮잠을 자고 있다. 느티나무 뒤에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가수 분교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동강변의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봄에는 곱고 아름다운 동강 할미꽃이 피어나는 마을 귤암리에 들어서니 길은 강을 닮아 구비구비 나있어 동강을 마주보기도 하고 굽어보기도 한다. 성철 스님이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유명한 말은 동강에선 "산은 물이요, 물이 산이다"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산과 물이 따로 놀지 않고 한 몸인 마냥 푸르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정선읍 오일장터의 맛나고 소박한 음식들이 배고픈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준다.
 정선읍 오일장터의 맛나고 소박한 음식들이 배고픈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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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유역의 이런 비경과 천혜의 생태환경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동강의 물줄기를 막아 세우려는 댐 건설 추진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6년부터 댐 건설사업을 시작했으나 국민적인 반대에 부딪치고 결국 2000년에 댐 건설은 백지화 되었다. 2001년 '자연 휴식지'로 정하고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취사와 야영을 금지시키는 등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많은 여행자와 관광객들이 동강의 청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이견에도 아랑곳없는 4대강 개발로 동강같은 아름다운 곳들이 훼손되고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동강처럼) 강가에 자전거 도로가 없으면 어떤가, 자전거는 차량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다니는 길만 있어도 지나다닐 수 있다.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도 잘 이용하지 못할 곳에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며 4대강 개발 홍보에 친환경이동수단의 상징인 자전거를 자꾸만 동원하는 정부의 행태에 자전거족으로서 모욕감마저 든다.   

동강길의 마지막 오르막 관문이자 정선읍으로 들어가는 초입인 솔치재를 오르고 나면 매 2, 7일날 열리는 정선 오일장이 떠들썩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름도 정겨운 배추지짐, 수수 부꾸미떡, 감자떡, 콧등치기 국수, 올챙이 국수, 곤드레 나물밥이 배고픈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준다. '얼른 와요, 여기가 장터래요'라고 써있는 시장입구의 간판이 가을 햇볕에 고슬고슬하게 탄 여행자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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