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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폭악무도한 일본에 의해 살해되자 이에 대한 복수심이 고조돼 1903년 무성서원에서 호남지역 향교에 통문을 보내 각 향교에서 54명의 전라도내 유림들이 내장산 벽련암에 모여 단을 쌓고 명성황후를 추모하고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했으니 이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이라 한다." -서보단 사적비 비문내용 중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을 때, 호남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타도일본을 외치며 무성서원 주도로 모임을 가졌다. 양반의 근거지가 됐던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림으로써, 전국에 산재했던 600개가 넘는 서원 중 단 47개만 남기로 모조리 통폐합됐다. 전북은 당시 풍파 속에서 오직 무성서원만이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유림을 모으는 창구가 됐다.

 

유림들은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의 흉계에 의해 시해 당하고, 그해 11월 친일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강행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들을 모아 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항일이라는 정신으로 무장됐을 뿐 전혀 체계가 잡히지 않아 짧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 고종 광무 7년인 1903년 3월 한양 유림대회에서 국모에 대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명성황후 감모비 건립사업이 추진됐다. 비록 무장세력을 형성하진 않았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명성황후 추모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이후 추모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지역마다 감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호남지역에서는 그해 6월 무성서원이 전라남북도 각 고을 향교에 통문을 보내, 7월 15일 정읍 내장산에서 호남유림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를 통해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27개 향교 54명의 유림들이 모여 감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모금을 추진했다. 여기에 주목할 점이 있는데 하나 더 있는데, 이곳에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보단을 세워 영원한 표적으로 삼음으로서, 이 모임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유림들은 모두 석란정에 올라 화선지를 바닥에 깔고, 붓 대신 자신들의 손을 단지해 손에서 흐르는 피로 복수를 다짐하는 글귀를 적고, 그 피의 서찰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의 모임을 기억하고, 명성황후의 해원을 맹서하며 해마다 8월 20일에 추모제를 갖기로 결정한다. 이 자리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한 유림들의 집단적 움직임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전북지역은 1906년 병오창의로부터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이 본격화되는데, 호남유림대회가 그 정신적 자양분이 됐던 것이다.

 

당시 유림들이 모여 서보단을 쌓았던 장소는 현재의 정읍 내장산 벽련암 뒤편에 있다. 이곳에는 현재 석란정이 있었다는 표지석이 하나 남아있을 뿐이다. 벽련암은 내장산 서래봉 중턱 330m 고지에 있으며, 원래는 내장사란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던 것이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재의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암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됐으며, 이후 벽련암으로 고쳐쓰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이곳이 내장산의 대표적 공간이었으니, 호남유림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된 이유를 알만할 대목이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석란정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내장산에서도 으뜸가는 경치를 자랑하는 벽련암, 그 뒤로는 서래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석란정은 서래봉 바로 밑에 있다.
 

요금소에서 내장사까지는 한참이지만, 그 길은 평지여서 풍광을 보며 시나브로 걸을만한 길이다. 하지만 석란정은 내장사 일주문에서 우측으로 0.9km를 가파르게 올라야 도달하는 벽련암에서도, 다시 뒤편 서래봉쪽으로 한참을 더 올라야 한다.

 

그리 멀다할 수는 없으나, 경사가 심해 쉽지 않은 길이다. 예전 선비들이 이런 길을 어찌 올랐을까를 상상해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던지, 아님 그 좋은 경치구경을 위해 이만한 수고로움 쯤은 감수할 만치의 풍류가 있었던지. 어쨌든 그러했을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니, 큼지막한 바위 표면에 새겨진 '석란정'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하지만, 글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건물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한때 호남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모였던 장소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보였다. 오직, 간략한 설명문 하나만이 이곳이 역사적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1903년 이곳에 유림들이 모였으니, 겨우 108년 전의 일이다. 그 시간이면 모든 흔적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가보다. 석란정(石蘭亭)이란 이름처럼, 돌 틈 사이로 수북이 난이 자라고 있을 거란 상상도 해봤지만, 그것 역시 나그네의 상념이었을 뿐이었다.

 

한말의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가 하면,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세력이 한반도로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의 힘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기에 우리 정부는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특히,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해 11월 친일내각에 의한 단발령 강행은 한말 의병항쟁의 발단이 됐다. 이들 두 사건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 전통적 풍습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었고, 이에 전국 각처 유림들의 주도하에 많은 의병들이 봉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을미사변은 개항이래 일제의 침략을 증오하던 조선 백성들의 항일의식에 불을 당겼다. 당시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포고된 단발령은 유교사상에 젖은 일반 백성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명성황후 피살 후 불붙기 시작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단발령의 발표에 이르러 더욱 거세졌고, 마침내 항일무장 투쟁의 선봉인 을미의병(1895)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때 전북지역에서의 의병활동에 관한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에서의 치열했던 동학농민운동이 유림에 큰 위압감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의거를 주저하게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을미의병이 대체로 학맥을 따라 이뤄진 점을 볼 때, 정신구국을 주장한 화서 이항로 계통의 유림들이 비교적 적었던 반면, 간재 전우의 수정주의 사상을 계승한 유림들이 많았던 것도 그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 1903년 마침내 이곳에서 호남유림대회가 열리고, 1906년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의기투합해 봉기함으로써, 한말 호남의병사가 쓰여지게 된다.

 

현재, 당시의 정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시설은 석란정 표지석과 함께 1991년 내장사 가는 길 주변에 다시 세운 '서보단사적비'가 유일하다. 이 비석은 내장사를 향하다 보면 오른편 길가에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지만,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지는 지금, 아름다운 가을단풍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현재는 당위성을 상실하고 만다. 의지적으로라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하는 역사임에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호남의병, #의병, #석란정, #호남유림대회, #서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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