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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재보선이 막을 내렸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울에서 범야권 후보 박원순이 집권당을 물리친 것은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사건'이다. 박원순은 선거 초반 10~15%의 '큰 우세'를 보였다가 선거 종반 '백중우세'로 쫓기면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약간의 반등에 성공하더니 지지표를 크게 잃지 않고 선방했다. 특히 투표 40시간 전에 극적으로 이루어진 안철수 원장의 지원 이벤트는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었다.

 

서울시장 선거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지하듯이 이번 재보선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에 두고 치러졌다는 점에서 더욱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 25개 구 중 한나라당이 이긴 곳은 강남 3구와 용산을 합쳐 4개 구뿐이다. 나경원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인 중구에서도 크게 뒤졌다.

 

서울시 전체 국회의원 48명 중 36명의 한나라당 의원은 어느 누구도 차기 총선에서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또한 2006년 한나라당 오세훈의 서울시장 당선은 2007년 이명박의 대선 승리로 연결됐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범야권 후보 박원순의 서울시장 선거 승리는 내년 총선과 대선의 야권 승리를 선도하는 징표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시장 승리의 의의, 토목정권의 미친 존재감을 격파

 

첫째,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한국의 선거 유형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건국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의 선거는 '여촌야도'(지방은 여당, 도시는 야당) 현상을 뚜렷이 나타냈었다. 1970년대부터는 영호남 지역 대립으로 인해 영남은 보수, 호남은 진보로 확연히 갈라지는 유형을 나타내왔다.

 

선거에서 특정 집단이 특정 후보를 70% 이상 지지할 경우 그것은 '이상 현상'으로 간주된다. 영남의 70% 한나라당 몰표나 호남의 90% 민주당 몰표는 분명히 이상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대 몰표'라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30대 유권자의 75%가 야권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예측하건대 이런 현상은 차츰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어 내년 총·대선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이번 선거는 집권세력을 응징하려는 시민들의 욕구가 분출한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토목정권의 '미친 존재감'을 시민들의 '미친 존재감'으로 날려 버렸다고나 할까? '선거의 여왕'이자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라는 박근혜 전 대표가 4년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작심하고 출정했지만 시민들은 그것을 '노쇠한 정당의 콧김' 정도로 받아준 것이다. 또한 집권세력을 응징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시민들은 야권단일 후보 박원순의 하자와 결점을 그리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다.

 

셋째, 이번 선거는 '연대의 힘'을 확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과 국민참여당 등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시민세력을 기꺼이 지원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오히려 지리멸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제히 단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 말은 분열할 만큼 분열했으니 이제는 각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과거 한국의 민주정치세력은 끊임없이 재야세력, 운동권 세력과 제휴했기 때문에 공룡과 같은 독재집단과 맞설 수 있었다. 오늘의 시민세력은 재야세력과 운동권세력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과 2004년 박원순이 총선시민연대를 통해 낙천 낙선 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독재세력에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도출했다. 이번 선거는 '정치세력과 비정치 시민세력의 제휴'라는 한국인의 투쟁 전통을 실로 오랜만에 재현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넷째로는 안철수의 등장이 지니는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아직 정치 참여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요지부동으로 지속되던 '대세론'을 고통스럽게 균열시키고 있다. 반면에 그의 등장은 지난 4년 동안 '한 후보만의 대세론'을 처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던 시민의 무력감에 예기치 않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앞날이 미지수인 그는 여태 '메시아적' 이미지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극적인 시간에 정치의 복판에 뛰어들었다는 점은 이번 선거가 가지는 유별난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날의 과제'는 지난하다

 

분단 한국에는 35%에 달하는 수구 보수 유권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과거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에게 대권을 안겨 준 유권자의 비율과 비슷한 수치다. 그들은 누구를 내세워도 수구 보수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이다. '반공'은 그들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진보 개혁 세력의 앞날이 지난한 것은 바로 그들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진보 개혁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현저히 적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다. 도취와 분열은 금물이다. 서울 양천구, 부산 동구, 대구 서구, 충북 충주, 충남 서산, 강원 인제 등지에서 한나라당의 승전 기별이 오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에 '올인'한 나머지 야권은 아주 많은 곳에서 피를 흘린 결과를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고작 전북 남원과 전북 순창에서 민주당의 승리가 확인된다. 문재인이 발 벗고 나선 부산 동구에서 한나라당이 낙승한 것은 이 나라에 아직도 지역 패권의 망령이 부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이번 선거는 진 것도 아니고 이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비록 서울시장 선거는 졌지만 호남 두 곳을 제외한 지방 전 지역에서 완승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 말을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박원순에게 맡겨진 사명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에게는 아주 무거운 사명이 맡겨졌다. 그는 자신에게 몰표를 선사한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해서든 응답을 주어야 한다. 선거에서 자기를 외면하는 집단도 문제지만 어느 면에서는 몰표를 안겨 주는 집단이 더 부담스러운 법이다. 몰표를 준 지역에 응답하는 것보다 몰표를 준 세대에게 응답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서울시장의 권한만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결국 젊은이들이 박원순에게 몰표를 준 것은 서울시장으로서의 역할 기대보다 집권 세력을 바꾸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사를 드러낸 측면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연대'가 필수적이다.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제 아무리 '인물'이 있어도 '연대'가 없을 경우 번번이 패배했다.

 

'연대'하지 않은 DJ는 대선에서 세 번이나 분루를 삼켰다. '연대'한 DJ는 네 번째에 비로소 성취할 수 있었다. 노무현 역시 민주당과 시민세력이 합세했기 때문에 집권이 가능했다. 박원순은 이제 시민세력과 정치세력의 중간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국 그에게 떨어진 사명이란 시민세력과 정치세력이 융합되도록 하는 매개자의 배역이라고 본다.

 

이 성취의 시점에서도 박원순에게 사심 없는 축하를 보낼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박원순이 있어서 야권과 시민이 모인 것이 아니다. 그는 시민과 야권이 연대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여망에 이름을 실었을 뿐이다. 시민이 열망하고 야권이 뭉쳐 주었다. 추가로 안철수의 막판 지원까지 얻었다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섰다고 해도 실패할 수가 없는 선거였다. 박원순에게 부하된 사명은 시민과 야권의 중재역이다. 그는 더 큰 연대를 위해 희생하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승리를 일구어낸 모두에 당부한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안철수·박원순을 필두로 하는 시민세력과 '혁신과 통합'과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다. 이 중 어느 누구도 승리를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가슴과 머리를 맞대고 공정한 통합과 합리적인 연대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10.26재보선, #야권연대, #박원순,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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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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