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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도 운전하려면 면허증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외국에서 운전하려면 출국 전에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필리핀에선 국제면허증 사용이 쉽지 않습니다. 국제운전면허증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같이 주민증 제도가 없어 회사나 학교, 심지어는 바랑가이(동네) 단위로도 각자 다른 신분증을 만들어 다니는 풍토가 있는지라 이곳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게 되면 국가가 인증한 유일한 신분증을 갖게 되는 셈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필리핀 운전 면허증은 항상 여권을 소지하고 다녀야하는 불편함과 도난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신분증 역할도 해줍니다.

 LTO는 Land Transportation Officeㅇ의 약자로 자동차에 관한 각종 처리를 해주는 기관입니다.
 LTO는 Land Transportation Officeㅇ의 약자로 자동차에 관한 각종 처리를 해주는 기관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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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운전면허증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적게는 3천 페소, 좀 많게는 5천 페소를 들여 브로커를 통해 면허를 취득합니다. 하지만 필리핀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있는 '한국 운전 면허증을 필리핀 면허증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보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여권과 한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마닐라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공증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가까운 교통국(LTO라고 부릅니다)으로 가서 신체검사와 사진촬영 등의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필리핀 면허의 1단계는 마약 검사

신체검사는 교통국 건물이 아닌 담장 밖 사설 검사소에서 실시합니다. 일로일로 교통국 앞에는 많은 삐끼들이 접근하면서 자신이 아는 검사소로 가자고 합니다. 손님을 데려가면 얼마씩 자기 몫을 받는 모양입니다.

"급행으로 처리해 줄게. 300페소 줘."
"500페소만 주면 마약검사 안 받게 해줄게."

삐끼들을 뿌리치고 왠지 간판크기에서 공신력이 느껴지는 검사소를 골라 들어갔습니다. 외관과 달리 계단이 낡아서 삐걱대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이름, 주소, 연락처 등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고 자리에 앉으니 플라스틱 통을 하나 주면서 소변을 받아오라고 합니다.

면허증 바꾸는데 웬 소변검사냐 하겠지만 필리핀에선 마약과 에이즈 검사가 가장 중요한 검사라고 합니다. 문제는 통 하나를 꼭 꽉 채워야 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맥주나 몇 캔 마시고 올 걸 그랬습니다.

 신체검사는 LTO 근처의 사설 검사소에서 받아야 합니다.
 신체검사는 LTO 근처의 사설 검사소에서 받아야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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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보는데서 채우라고?

소변통을 들고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화장실로 가는데 두 명의 여성 입회인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같은 여자이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입회인이 보는 앞에서 소변통을 채워야 한답니다. 그것도 가득.

"(깜짝 놀라) 왜 이렇게 해야 해?"
"그래야 네 것인지 알 수 있지?"
"하지만 네가 쳐다보니 소변을 받을 수가 없잖어."
"바꿔치기가 심해서 안 돼."
"그래도 빤히 보는데 어떻게?"
"그럼 면허 받지 마."

결국 비스듬히 돌아서서 있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내 생애에 이처럼 소변보기가 힘들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다음에 들어온 남성 검사자가 소변통을 채우는 것도 이 여성 입회인들이 감시한다는 겁니다. 나름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남자 아무렇지도 않게 소변을 보고, 여성 입회인들도 너무나 태연하게 과정을 지켜보고 있음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력검사판입니다. 잘 안보이시나요? EDFPOEC만 외우시면 됩니다.
 시력검사판입니다. 잘 안보이시나요? EDFPOEC만 외우시면 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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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는 시력검사

다음 순서는 시력검사입니다. 아니 청력 검사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시력판을 앞에 놓고 가리키는 줄을 옆으로 쭈욱 읽으면 됩니다. 한쪽 눈을 가리는 것도 특별한 도구 없이 자신의 손으로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가리고 읽으면 됩니다.

합격의 비결은 줄서서 기다리면서 앞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귀를 쫑긋 세우면 됩니다.
"D, E, F, P, O, E, C"

드디어 내 차례, 나도 역시
"D, E, F, P, O, E, C"

시력이 좋지 않아도 걱정 마시라. 잘 들으면 잘 보입니다.

 색맹 검사판입니다.
 색맹 검사판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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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운전면허의 당락기준은... 기나긴 기다림

그다음 키, 몸무게, 혈압 등을 체크합니다. 이제 서류 준비가 다 되었으니 준비된 서류를 첨부해서 교통국 창구에 접수만 시키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필리핀 면허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라는 기나긴 기다림과 더위와의 싸움이 남았습니다.

에어컨도 없는 야외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이름을 부르면 창구로 가서 사진을 찍고 기다립니다. 한참을 기다려 또 다른 창구에서 부르면 돈을 내고 와서 또 기다립니다. 한참을 졸고 있는데 또 이름을 부릅니다. 언제 다시 부를지 몰라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습니다. 대략 이때쯤이라는 기약도 없이 무한정 기다려야 합니다. 또 사진을 찍습니다.

드디어 면허증을 받은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면허증에 쓰일 사진을 찍는다고 정성껏 바른 화장은 땀으로 다 지워지고, 헤드뱅잉까지 하며 졸다 찍어 잠이 덜 깬 눈동자에 완전 우울한 표정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필리핀 운전면허증에는 필리핀 국기가 그려져 있고, 범죄자 같은 내 사진이 박혀있습니다. 이젠 필리핀에서 운전은 맘 놓고 할 수 있겠지만, 사진을 보이며 신분증으로 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모든 절차가 마이크로 호명하는 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리를 지키고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절차가 마이크로 호명하는 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리를 지키고 기다려야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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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에서 운전학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가는 학생을 본 일은 없습니다.
 필리핀에서 운전학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가는 학생을 본 일은 없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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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갈로그어로 면허 따는 방법도 있습니다

한국인 중에는 간혹 타갈로그어로 면허를 딴 사람도 있습니다. A씨는 한국 면허증을 필리핀 면허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필리핀 교통국에서 그런 방법을 알려줄 리도 없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따러 교통국으로 간  A씨. 우선 지필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타갈로그어? 영어?"
"나 한국인이야, 한국어 줘."
"타갈로그어?"
"한국에서는 타갈로그로 시험 볼 수 있게 해주잖아."
"타갈로그어? 영어?"
"알겠어. 영어로 줘."

한국에서는 영어, 중국어 뿐만 아니라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비롯하여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등 총 10개 나라 말로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필기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2시간의 강의를 듣고 접수 후 1시간 동안 시험을 봅니다. 40문항 중 30문제를 맞춰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2시간의 강의를 듣고 접수 후 1시간 동안 시험을 봅니다. 40문항 중 30문제를 맞춰야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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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 자체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인 아저씨가 영어로 된 문제를 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읽고 풀었지만 불합격입니다. 한번 떨어졌더니 3개월 후에 다시 응시하랍니다. 3개월 후 또 떨어졌습니다. 필기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더니 주변에서 빈정거리는 말들을 합니다. 이 때 직원이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합니다.

"내가 교통국 직원을 하나 아는데..."

그가 제안한 것은 사례금을 주면 편의를 봐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개월 후 다시 교통국으로 향하는 A씨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번 시험에는 필리피노 비서도 동행을 합니다. 시험장 입구에서 만난 교통국 직원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으며 다른 응시자와 분리된 시험장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타갈로그어로 줄까? 영어로 줄까?"
"타갈로그어로 줘."
"넌 프리타임이야. 맘 놓고 해. 다하면 불러."

비서는 타갈로그어로 된 시험지를 풀었고, 비서가 알지 못하는 문제는 영어로 대화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결과는 당연 합격!

 필기시험 전 강의에 사용된 문제집입니다. 감독관이 사진 찍는 걸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내용은 "밤에 운전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 시야가 좁기 때문에", "길을 건너는 맹인이 있을 때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가? 답은 경적음을 울린다" 정도입니다.
 필기시험 전 강의에 사용된 문제집입니다. 감독관이 사진 찍는 걸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내용은 "밤에 운전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 시야가 좁기 때문에", "길을 건너는 맹인이 있을 때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가? 답은 경적음을 울린다" 정도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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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시험은 어떻게 할까?"
"너 운전할 줄 안다며. 그럼 패스~! "

만약 시험을 보게 되더라도 그냥 트랙 한바퀴 돌고, 유턴하는 것 등 아주 기초적인 것만 봅니다. 대부분이 다 통과 가능. 한국에서 운전면허 따는 것에 비하면 필리핀에서의 주행시험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날 이후 A씨의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나... 타갈로그어로 면허증 딴 사람이야. 이만하면 필리핀 이민 성공이지?"

덧붙이는 글 | 신체검사소와 교통국의 사정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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